현대차 위기의 본질
현대차 위기의 본질
현대차그룹이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졌다. 미·중 G2에서 고전하고 있고, 일·중 사이에 낀 브랜드는 시장 포지션이 모호해졌다. 글로벌 완성차 시장의 급속한 변화엔 늘 한발 처진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병이 들었음을 자각해야 하는 법. 현대차는 한국 경제의 대들보다. 위기를 딛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 그러려면 위기의 본질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만들기만 하면 무조건 팔릴 줄 알았다.”
최근 위기에 처한 현대차그룹(이하 현대차)의 이야기가 아니다. 2012년 4월 도요타자동차의 도요타 아키오 사장이 기자회견 중 한 말이다. 생산량 증대 등 외형 성장에 주력한 나머지 대량 리콜 사태를 초래한 것에 대한 반성이었다. 아키오 사장은 “그동안 소비자가 원하는 차를 개발하기보다 많이 팔 수 있는 차를 만들었다”며 “이제 판매량과 수익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이후 도요타는 처절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플랫폼 공용화를 통해 비용을 절감하고 내부 조직 체계를 정비해 몸집을 가볍게 했다.
5년이 흐른 지금, 현대차의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현대차 경영 위기의 본질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에 따른 중국 내 반한(反韓) 정서가 아니다. 현대차는 판매량에 연연하다가 품질 경영과 멀어졌고, 독일과 일본의 고급 브랜드 자동차와 저가 중국산 자동차의 틈새 속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됐다. 미래 자율주행차 개발을 위한 전략적 제휴와 기술 투자 역시 부진하다. 2010년부터 7년 연속 지켜온 글로벌 5위 위상마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현대차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판매 부진이다. 올 상반기 현대·기아차의 전체 판매량은 351만8566대로 지난해 동기 대비 8.7% 감소했다. 전체 판매의 80%가 넘는 해외에서 9.3%나 줄었다. ‘사드 직격탄’을 맞은 중국 시장에선 7월까지 43% 가량 줄어든 50만1000대 판매에 그쳤고 시장점유율은 3%대까지 추락했다. 상반기 미국 판매량도 7.4% 감소한 34만6000대로 뒷걸음질했다.
현대차는 사드 갈등에 따른 중국 내 판매 부진을 주요인으로 분석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현대차의 경쟁력 추락에서 근본 원인을 찾는다. “빠른 양적 팽창에 취해 세부적 전략이 부재했다”는 게 공통적인 지적이다. 현대차는 도요타를 비롯한 글로벌 메이커들이 동반 부진에 빠졌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부터 2014년까지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자체 경쟁력 향상보다는 반사이익 효과였다.
현대차는 지난 5년간 그룹의 생산능력을 573만대에서 878만대로 53.2% 증대시켰다. 2012년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800만대 생산 강행군’에 따른 시장점유율 확대 전략이었다. 그러나 양적 팽창은 오래가지 못했다. 매출은 같은 기간 10.8%밖에 늘지 않았다. 지난해엔 18년 만에 매출이 감소세로 바뀌었다. 판매 부담이 커졌고 이는 결국 장기·저리할부 남발, 보증기간 연장, 렌터카영업 확대 등 사실상 가격할인이나 다름없는 마케팅으로 이어졌다. 매출은 올랐는데 영업이익률이 2012년 10.0%에서 지난해 5.5%로 반 토막 난 이유다. 빠른 확장에 따른 후유증, 이른바 ‘현대 속도’가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현대차가 시장점유율에 급급한 나머지 정작 소비자가 원하는 품질 향상과 다양한 모델 출시에서 뒤처졌다고 분석한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현대차의 위기는 ‘생산량을 기술력으로 오해한 것’에서 시작됐다”며 “양적 성장에 치우친 나머지 신기술과 미래차 개발에 소홀했다”고 꼬집었다.
현대차는 글로벌 완성차 시장에서 포지셔닝에 실패했다. 2000년대 이후 자동차 시장은 전체 판매량이 정체된 가운데 고급차와 저가차 비중이 확대되는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에 벤츠를 비롯한 글로벌 선두 브랜드는 새로운 세그먼트 확충을 통해 라인업 확장에 적극 나섰다. 하지만 현대차는 2015년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를 출범시켰을 뿐 세분화·다양화하는 소비자들의 트렌드 변화를 빠르게 따라잡지 못했다. “자동차 시장 양극화는 고급차 업체나 신흥 시장의 현지 업체들에는 성장의 기회지만 양산차 업체에는 위협요인이다. 양산차 업체들은 라인업의 경계를 확장해나갈 필요가 있다.” 김현정 현대차 글로벌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의 진단이다.
지역적으로는 현대·기아차 판매의 23%를 차지하는 중국 시장의 트렌드 변화를 읽지 못했다. 현대차는 그동안 중국 시장에서 세단을 주력 제품으로 내세웠지만 최근 시장의 대세는 SUV다. 험난한 지형이 많은 데다 최근 여가활동을 즐기는 중국인이 늘면서 현재 중국에서 판매 중인 SUV 모델 수는 160종이 넘는다. 김필수 대림대 교수(자동차학)는 “중국과 미국에서 현지 적합형 차종 개발과 신차 출시가 늦어지면서 타이밍을 빼앗긴 것도 원인”이라며 “신차종 개발 전략은 더 치밀하고 세밀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는 ‘자괴(自壞·스스로 무너짐)’ 위기에 놓여 있다.”
최근 일본 산케이신문이 현대차의 위기를 진단하면서 지적한 대목이다. 자괴를 구체적으로 보면 그동안 현대차의 장점으로 꼽혔던 가격경쟁력과 품질의 추락이다.
현대차는 그동안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에 진출했다. 특히 2002년 5월 중국의 자동차업체인 베이징 기차와 합자로 ‘베이징현대’를 세운 후 중국 진출 5년2개월 만에 생산·판매 누계 100만 대 돌파 기록을 세웠다. 중국 내 자동차회사 중 최단 기간에 이룬 성과로 ‘현대속도’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독일·일본 브랜드와 비슷한 품질,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이 중국 소비자들에게 통했던 것이다.
하지만 곧 중국 토종 업체들이 무섭게 성장하며 현대차를 위협했다. 2015년 창안자동차에 밀린 현대차는 시장점유율이 한자리 수로 떨어졌다. 김필수 교수는 “중국 토종 완성차 업체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짝퉁 이미지를 털어냈다. 품질이나 안전성 등은 대폭 개선됐음에도 동급 차량에서 가격 격차는 2배 가까이 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분석했다. 과거 현대차는 싸고 좋은 차였지만 이제는 싼 차도, 좋은 차도 아니라는 말이다.
최근 중국 합작 파트너인 베이징기차와의 ‘불협화음’은 원가구조 때문이다. 중국에는 국내 협력업체 142곳이 진출해 현대·기아차에 부품을 납품하고 있다. 베이징기차는 이들에게 비용절감을 위해 납품 단가를 20% 이상 인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 현대차는 일본 브랜드보다 원가구조가 한참 뒤처진다. 도요타나 닛산은 단일 차종 기준 10만 대만 생산해도 이익이 나는 구조로 원가를 줄여놓았지만 현대·기아차는 단일 차종으로 최소 30만 대 이상은 팔아야 이익이 난다.
‘양적 성장’에 도취해 ‘품질의 궤도’를 이탈한 것도 위기의 원인이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이 틈만 나면 ‘품질 경영’을 외치고 있지만 올 들어 국내외에서 리콜(제작 결함 시정)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5월부터 미국 도로교통안전국에서 세타2엔진 차량 리콜과 관련해 적정성 조사를 받고 있다. 앞서 3월엔 브레이크 진공호스 제작 결함이 드러나면서 그랜저IG와 K7 등 차량 6531대를 리콜했다. 안전벨트 결함으로 미국에서 쏘나타 97만8000대 가량을 리콜했고, 투싼과 스포티지 등 디젤모델이 자동차 배출가스 기준을 초과한 것으로 나타나 20만6000대를 리콜했다.
이 과정 또한 과거 도요타 사태와 비슷하다. 도요타는 글로벌 자동차 1위 업체였던 미국의 GM을 따라잡기 위해 2000년 당시 185만 대였던 해외 자동차 생산량을 2008년 420만 대로 급속하게 늘렸다. 2007년 도요타는 GM을 제쳤다. 하지만 품질관리에서 허점이 드러났고 결국 대량 리콜 사태로 이어졌다. 김정하 국민대 학장(자동차융합대학)은 현대차의 위기를 기술력 부족과 업계 흐름에 대한 전략 부족에서 찾았다. 김 학장은 “글로벌 자동차업계는 최근 ‘친환경·고안전’으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데 현대차는 이 같은 변화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고연비·저공해를 골자로 한 전기차 등 친환경차 기술 개발, 운전자는 물론 보행자의 안전까지 생각한 고안전 차량 개발 등에 매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현대차가 우버·바이두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과의 협업으로 차세대 자동차를 개발하는 노력을 하지만 여전히 사업구조가 내연기관 자동차에 치우쳐 있다며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네이버가 지난 3월 공개한 자율주행차가 현대차 모델이 아닌 도요타의 프리우스를 기반으로 제작된 것을 현대차가 ‘장기적 도전’에 부딪힌 예로 지적했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의 연구개발(R&D) 투자는 미흡한 수준이다. 지난해 현대·기아차의 R&D 투자비용은 3조9986억원으로 매출액 대비 2.7%였다. 이는 도요타(3.8%), 폴크스바겐(6.3%), GM(4.9%)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일본의 글로벌 자동차산업 전문조사기업 포인도 최근 발간한 ‘현대자동차그룹의 2025년 전략’ 보고서에서 “2025년까지 플랫폼 쇄신, 신흥국 시장의 생산능력 증강, 선진국 대상 친환경차 개발, 첨단 안전장치, 자율주행기술 완성을 위해 현대차에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다”며 “이런 상황에서 현대차그룹이 2020~2025년까지 연산 1000만 대 체제를 갖추는 것은 우선 과제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2014년 9월 현대차가 신사옥 건축을 위해 삼성동 한전 부지를 평가액의 3배인 10조5500억원에 사들인 것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업계 관계자는 “그 금액이면 국내에 공장을 2~3개는 더 지을 수 있을 것이고, 연구·개발이나 신차 개발에 매달렸으면 지금보다 경쟁력이 향상됐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쇳물부터 자동차까지’ 수직계열화도 한계에 이르렀다는 지적이다. 현대차는 자동차의 원재료인 강판부터 부품, 해외 운송과 할부 금융까지 공정의 수직계열화가 완성차 업체 중 가장 잘 이뤄져 있다. 빠른 의사결정과 추진력으로 이익을 극대화해왔다.
하지만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모기업인 현대·기아차가 흔들리자 매출의 70~80%를 의존하고 있는 부품 계열사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부품 제조사인 현대모비스는 상반기 영업이익이 지난해 동기 대비 22.8% 줄었고, 변속기·엔진 등을 만드는 현대위아의 2분기 영업이익은 지난해 동기 대비 66.8%나 급감했다. 완성차 판매가 흔들리면 그룹 전체 수익성이 동시에 악화되는 수직계열화의 구조적 취약함을 드러낸 것이다.
수직계열화는 다양한 기업과의 활발한 합종연횡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최근 자동차산업에는 부품업계와 소재, 배터리 및 IT 업계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완성차 업체들은 적극적으로 기업 간 협업에 나서고 있다. 도요타만 해도 최근 일본 경쟁사들(마쓰다·스바루·스즈키)과 전기차 개발을 위한 업무 제휴를 맺었다. 이항구 선임연구위원은 “‘패스트 팔로어’ 시절에는 수직계열화가 유용한 전략이었지만 끊임없는 혁신과 탄력적인 대응이 필요한 미래 산업에서도 통할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현대차는 2030년 완전자율주행 기술 상용화를 목표로 경기 남양연구소 자체 인력만으로 연구개발을 진행 중이다. 업종을 넘나드는 ‘합종연횡’이 활발한 글로벌 완성차업계 트렌드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김기찬 가톨릭대 교수(경영학)는 “그동안 한국 자동차 업체들은 ‘혼자 다 해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집착했다”면서 “이제는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다는 ‘오픈 이노베이션’ 철학을 바탕으로 깔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선 최근 현대차의 상황을 보면서 ‘노키아’를 거론한다. 휴대전화 거함 노키아는 급변하는 사업 환경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결국 휴대전화 사업을 접었다. 현대차가 노키아 실패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는 저서 『혁신자의 딜레마』에서 세계적 우량기업이 시장지배력을 잃는 원인을 분석하면서 “‘달콤한 관성’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게임의 룰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파괴적 혁신’을 일궈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경영권 승계를 앞둔 정의선 부회장이 어떤 리더십을 발휘할 것인지 주목된다. 그는 올해 들어서만 10회 이상 해외 출장길에 나서는 등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그룹 내의 혁신 분위기다. 업계에서 ‘현대차 임원은 머슴’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문제가 된 상명하복 시스템을 우선 손보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오너가 잘못된 결정을 해도 이를 견제할 시스템이 없으면 그 기업에게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최근 현대차의 위기와 해법을 논하면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바로 ‘도요타’다. 도요타는 2009년 렉서스 차량 결함을 부인하다가 1000만여 대의 자동차를 리콜하고 천문학적인 손해를 입어 존립 위기에 직면했다. 도요타 아키오 사장은 취임 1년 만인 2010년 2월 렉서스 등의 급발진 사고와 관련해 미 하원 청문회에서 미국 정치인들의 질타와 야유를 받으며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고 울며 사과했다. ‘살아 있는 경영학 교과서’로 불렸던 일본 자본주의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를 반면교사 삼은 도요타는 3년 만에 연간 1000만대를 생산하는 글로벌 1위 자동차 기업이 됐다. 2015년엔 영업이익 3조 엔의 사상 최고 실적을 냈다. 핵심엔 도요타 창업자 가문의 손자 도요타 아키오 사장이 있다. 그는 “원점으로 돌아가자”를 모토로 내걸고 자동차 기술적 문제뿐만 아니라 의사소통 부족, 초기대응 실패, 위기대책 부재 등 근본적인 문제 개선에 매진했다. 아키오 사장은 외형을 중시하던 확장경영의 함정을 경계했다. 기업설명회 등을 주관할 때도 ‘숫자’와 관련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 대신 경영의 최우선 가치를 ‘품질 중시’로 바꿨다.
전문가들은 현대차가 도요타에서 배워야할 1순위로 ‘원가절감’을 꼽는다. 현대차의 영업이익률이 10%대에서 5%대로 하락한 원인은 상품경쟁력 약화보다 원가경쟁력이 취약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도요타의 레고블록형 설계전략 ‘TNGA’에 주목한다. TNGA는 자동차 엔진 섀시와 차체(보디) 등 생산방식을 공용화하는 전략이다. 2015년 신형 프리우스에 처음으로 적용해 2021년까지 전체 판매 차량의 60%를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일본 자동차산업의 최고 분석가인 도쿄대 경영 대학원 후지모토 다카히로 교수는 “도요타는 위기의 과정을 통해 배우는 능력이 매우 탁월하다. 문제가 끝난 다음에 좀 더 진화하는 능력이야말로 도요타의 가장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왜 다시 도요타인가…』의 저자 최원석은 “도요타 아키오 사장이 미국 의회 청문회장에서 울먹이던 당시만 해도 누가 도요타의 부활을 예측했겠나”라며 “도요타의 위기 극복 7년 과정은 한국의 대기업을 비롯해 부실과 성장률 둔화, 리더십 부재를 겪고 있는 기업들의 위기 타개 방안에 시사점을 준다”고 말했다.
- 조득진 기자 chodj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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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위기에 처한 현대차그룹(이하 현대차)의 이야기가 아니다. 2012년 4월 도요타자동차의 도요타 아키오 사장이 기자회견 중 한 말이다. 생산량 증대 등 외형 성장에 주력한 나머지 대량 리콜 사태를 초래한 것에 대한 반성이었다. 아키오 사장은 “그동안 소비자가 원하는 차를 개발하기보다 많이 팔 수 있는 차를 만들었다”며 “이제 판매량과 수익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이후 도요타는 처절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플랫폼 공용화를 통해 비용을 절감하고 내부 조직 체계를 정비해 몸집을 가볍게 했다.
5년이 흐른 지금, 현대차의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현대차 경영 위기의 본질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에 따른 중국 내 반한(反韓) 정서가 아니다. 현대차는 판매량에 연연하다가 품질 경영과 멀어졌고, 독일과 일본의 고급 브랜드 자동차와 저가 중국산 자동차의 틈새 속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됐다. 미래 자율주행차 개발을 위한 전략적 제휴와 기술 투자 역시 부진하다. 2010년부터 7년 연속 지켜온 글로벌 5위 위상마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진단1 | ‘현대 속도’엔 브랜드 전략이 없다
현대차는 사드 갈등에 따른 중국 내 판매 부진을 주요인으로 분석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현대차의 경쟁력 추락에서 근본 원인을 찾는다. “빠른 양적 팽창에 취해 세부적 전략이 부재했다”는 게 공통적인 지적이다. 현대차는 도요타를 비롯한 글로벌 메이커들이 동반 부진에 빠졌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부터 2014년까지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자체 경쟁력 향상보다는 반사이익 효과였다.
현대차는 지난 5년간 그룹의 생산능력을 573만대에서 878만대로 53.2% 증대시켰다. 2012년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800만대 생산 강행군’에 따른 시장점유율 확대 전략이었다. 그러나 양적 팽창은 오래가지 못했다. 매출은 같은 기간 10.8%밖에 늘지 않았다. 지난해엔 18년 만에 매출이 감소세로 바뀌었다. 판매 부담이 커졌고 이는 결국 장기·저리할부 남발, 보증기간 연장, 렌터카영업 확대 등 사실상 가격할인이나 다름없는 마케팅으로 이어졌다. 매출은 올랐는데 영업이익률이 2012년 10.0%에서 지난해 5.5%로 반 토막 난 이유다. 빠른 확장에 따른 후유증, 이른바 ‘현대 속도’가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현대차가 시장점유율에 급급한 나머지 정작 소비자가 원하는 품질 향상과 다양한 모델 출시에서 뒤처졌다고 분석한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현대차의 위기는 ‘생산량을 기술력으로 오해한 것’에서 시작됐다”며 “양적 성장에 치우친 나머지 신기술과 미래차 개발에 소홀했다”고 꼬집었다.
현대차는 글로벌 완성차 시장에서 포지셔닝에 실패했다. 2000년대 이후 자동차 시장은 전체 판매량이 정체된 가운데 고급차와 저가차 비중이 확대되는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에 벤츠를 비롯한 글로벌 선두 브랜드는 새로운 세그먼트 확충을 통해 라인업 확장에 적극 나섰다. 하지만 현대차는 2015년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를 출범시켰을 뿐 세분화·다양화하는 소비자들의 트렌드 변화를 빠르게 따라잡지 못했다. “자동차 시장 양극화는 고급차 업체나 신흥 시장의 현지 업체들에는 성장의 기회지만 양산차 업체에는 위협요인이다. 양산차 업체들은 라인업의 경계를 확장해나갈 필요가 있다.” 김현정 현대차 글로벌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의 진단이다.
지역적으로는 현대·기아차 판매의 23%를 차지하는 중국 시장의 트렌드 변화를 읽지 못했다. 현대차는 그동안 중국 시장에서 세단을 주력 제품으로 내세웠지만 최근 시장의 대세는 SUV다. 험난한 지형이 많은 데다 최근 여가활동을 즐기는 중국인이 늘면서 현재 중국에서 판매 중인 SUV 모델 수는 160종이 넘는다. 김필수 대림대 교수(자동차학)는 “중국과 미국에서 현지 적합형 차종 개발과 신차 출시가 늦어지면서 타이밍을 빼앗긴 것도 원인”이라며 “신차종 개발 전략은 더 치밀하고 세밀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진단2 | 사라진 ‘가격경쟁력’ ‘품질경영’
최근 일본 산케이신문이 현대차의 위기를 진단하면서 지적한 대목이다. 자괴를 구체적으로 보면 그동안 현대차의 장점으로 꼽혔던 가격경쟁력과 품질의 추락이다.
현대차는 그동안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에 진출했다. 특히 2002년 5월 중국의 자동차업체인 베이징 기차와 합자로 ‘베이징현대’를 세운 후 중국 진출 5년2개월 만에 생산·판매 누계 100만 대 돌파 기록을 세웠다. 중국 내 자동차회사 중 최단 기간에 이룬 성과로 ‘현대속도’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독일·일본 브랜드와 비슷한 품질,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이 중국 소비자들에게 통했던 것이다.
하지만 곧 중국 토종 업체들이 무섭게 성장하며 현대차를 위협했다. 2015년 창안자동차에 밀린 현대차는 시장점유율이 한자리 수로 떨어졌다. 김필수 교수는 “중국 토종 완성차 업체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짝퉁 이미지를 털어냈다. 품질이나 안전성 등은 대폭 개선됐음에도 동급 차량에서 가격 격차는 2배 가까이 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분석했다. 과거 현대차는 싸고 좋은 차였지만 이제는 싼 차도, 좋은 차도 아니라는 말이다.
최근 중국 합작 파트너인 베이징기차와의 ‘불협화음’은 원가구조 때문이다. 중국에는 국내 협력업체 142곳이 진출해 현대·기아차에 부품을 납품하고 있다. 베이징기차는 이들에게 비용절감을 위해 납품 단가를 20% 이상 인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 현대차는 일본 브랜드보다 원가구조가 한참 뒤처진다. 도요타나 닛산은 단일 차종 기준 10만 대만 생산해도 이익이 나는 구조로 원가를 줄여놓았지만 현대·기아차는 단일 차종으로 최소 30만 대 이상은 팔아야 이익이 난다.
‘양적 성장’에 도취해 ‘품질의 궤도’를 이탈한 것도 위기의 원인이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이 틈만 나면 ‘품질 경영’을 외치고 있지만 올 들어 국내외에서 리콜(제작 결함 시정)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5월부터 미국 도로교통안전국에서 세타2엔진 차량 리콜과 관련해 적정성 조사를 받고 있다. 앞서 3월엔 브레이크 진공호스 제작 결함이 드러나면서 그랜저IG와 K7 등 차량 6531대를 리콜했다. 안전벨트 결함으로 미국에서 쏘나타 97만8000대 가량을 리콜했고, 투싼과 스포티지 등 디젤모델이 자동차 배출가스 기준을 초과한 것으로 나타나 20만6000대를 리콜했다.
이 과정 또한 과거 도요타 사태와 비슷하다. 도요타는 글로벌 자동차 1위 업체였던 미국의 GM을 따라잡기 위해 2000년 당시 185만 대였던 해외 자동차 생산량을 2008년 420만 대로 급속하게 늘렸다. 2007년 도요타는 GM을 제쳤다. 하지만 품질관리에서 허점이 드러났고 결국 대량 리콜 사태로 이어졌다.
진단3 | 연구개발(R&D) 투자에 인색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현대차가 우버·바이두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과의 협업으로 차세대 자동차를 개발하는 노력을 하지만 여전히 사업구조가 내연기관 자동차에 치우쳐 있다며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네이버가 지난 3월 공개한 자율주행차가 현대차 모델이 아닌 도요타의 프리우스를 기반으로 제작된 것을 현대차가 ‘장기적 도전’에 부딪힌 예로 지적했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의 연구개발(R&D) 투자는 미흡한 수준이다. 지난해 현대·기아차의 R&D 투자비용은 3조9986억원으로 매출액 대비 2.7%였다. 이는 도요타(3.8%), 폴크스바겐(6.3%), GM(4.9%)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일본의 글로벌 자동차산업 전문조사기업 포인도 최근 발간한 ‘현대자동차그룹의 2025년 전략’ 보고서에서 “2025년까지 플랫폼 쇄신, 신흥국 시장의 생산능력 증강, 선진국 대상 친환경차 개발, 첨단 안전장치, 자율주행기술 완성을 위해 현대차에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다”며 “이런 상황에서 현대차그룹이 2020~2025년까지 연산 1000만 대 체제를 갖추는 것은 우선 과제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2014년 9월 현대차가 신사옥 건축을 위해 삼성동 한전 부지를 평가액의 3배인 10조5500억원에 사들인 것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업계 관계자는 “그 금액이면 국내에 공장을 2~3개는 더 지을 수 있을 것이고, 연구·개발이나 신차 개발에 매달렸으면 지금보다 경쟁력이 향상됐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진단4 | 장점에서 단점이 된 ‘수직계열화’
하지만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모기업인 현대·기아차가 흔들리자 매출의 70~80%를 의존하고 있는 부품 계열사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부품 제조사인 현대모비스는 상반기 영업이익이 지난해 동기 대비 22.8% 줄었고, 변속기·엔진 등을 만드는 현대위아의 2분기 영업이익은 지난해 동기 대비 66.8%나 급감했다. 완성차 판매가 흔들리면 그룹 전체 수익성이 동시에 악화되는 수직계열화의 구조적 취약함을 드러낸 것이다.
수직계열화는 다양한 기업과의 활발한 합종연횡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최근 자동차산업에는 부품업계와 소재, 배터리 및 IT 업계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완성차 업체들은 적극적으로 기업 간 협업에 나서고 있다. 도요타만 해도 최근 일본 경쟁사들(마쓰다·스바루·스즈키)과 전기차 개발을 위한 업무 제휴를 맺었다. 이항구 선임연구위원은 “‘패스트 팔로어’ 시절에는 수직계열화가 유용한 전략이었지만 끊임없는 혁신과 탄력적인 대응이 필요한 미래 산업에서도 통할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현대차는 2030년 완전자율주행 기술 상용화를 목표로 경기 남양연구소 자체 인력만으로 연구개발을 진행 중이다. 업종을 넘나드는 ‘합종연횡’이 활발한 글로벌 완성차업계 트렌드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김기찬 가톨릭대 교수(경영학)는 “그동안 한국 자동차 업체들은 ‘혼자 다 해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집착했다”면서 “이제는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다는 ‘오픈 이노베이션’ 철학을 바탕으로 깔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기 탈출, 정의선 부회장에 달렸다
이 때문에 경영권 승계를 앞둔 정의선 부회장이 어떤 리더십을 발휘할 것인지 주목된다. 그는 올해 들어서만 10회 이상 해외 출장길에 나서는 등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그룹 내의 혁신 분위기다. 업계에서 ‘현대차 임원은 머슴’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문제가 된 상명하복 시스템을 우선 손보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오너가 잘못된 결정을 해도 이를 견제할 시스템이 없으면 그 기업에게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박스기사] 도요타는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나 - 위기에서 배워 진화하는 능력이 큰 자산
그러나 이를 반면교사 삼은 도요타는 3년 만에 연간 1000만대를 생산하는 글로벌 1위 자동차 기업이 됐다. 2015년엔 영업이익 3조 엔의 사상 최고 실적을 냈다. 핵심엔 도요타 창업자 가문의 손자 도요타 아키오 사장이 있다. 그는 “원점으로 돌아가자”를 모토로 내걸고 자동차 기술적 문제뿐만 아니라 의사소통 부족, 초기대응 실패, 위기대책 부재 등 근본적인 문제 개선에 매진했다. 아키오 사장은 외형을 중시하던 확장경영의 함정을 경계했다. 기업설명회 등을 주관할 때도 ‘숫자’와 관련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 대신 경영의 최우선 가치를 ‘품질 중시’로 바꿨다.
전문가들은 현대차가 도요타에서 배워야할 1순위로 ‘원가절감’을 꼽는다. 현대차의 영업이익률이 10%대에서 5%대로 하락한 원인은 상품경쟁력 약화보다 원가경쟁력이 취약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도요타의 레고블록형 설계전략 ‘TNGA’에 주목한다. TNGA는 자동차 엔진 섀시와 차체(보디) 등 생산방식을 공용화하는 전략이다. 2015년 신형 프리우스에 처음으로 적용해 2021년까지 전체 판매 차량의 60%를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일본 자동차산업의 최고 분석가인 도쿄대 경영 대학원 후지모토 다카히로 교수는 “도요타는 위기의 과정을 통해 배우는 능력이 매우 탁월하다. 문제가 끝난 다음에 좀 더 진화하는 능력이야말로 도요타의 가장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왜 다시 도요타인가…』의 저자 최원석은 “도요타 아키오 사장이 미국 의회 청문회장에서 울먹이던 당시만 해도 누가 도요타의 부활을 예측했겠나”라며 “도요타의 위기 극복 7년 과정은 한국의 대기업을 비롯해 부실과 성장률 둔화, 리더십 부재를 겪고 있는 기업들의 위기 타개 방안에 시사점을 준다”고 말했다.
- 조득진 기자 chodj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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