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인택의 혁신을 일군 아시아의 기업인(11) 토니 페르난데스 에어아시아 회장
채인택의 혁신을 일군 아시아의 기업인(11) 토니 페르난데스 에어아시아 회장
아시아 최대 저가항공사 에어아시아 그룹 토니 페르난데스 회장이 한국인 여성과 비공개 결혼식을 올린 것이 알려져 화제다. 아시아의 도전적인 경영인으로 꼽히는 그가 저가항공사 시장에 도전하게 된 과정을 살펴봤다. 아시아 최대 저가항공사인 에어아시아 그룹의 토니 페르난데스(53) 회장이 2017년 10월 갑자기 전 세계 미디어에 등장했다. 말레이시아의 소수민족인 타밀계인 페르난데스 회장은 10월 14일 ‘클로에’라는 프랑스식 이름으로만 알려진 한국인 여성과 프랑스 남부의 지중해 해안을 가리키는 코트다쥐르에서 비공개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 보도됐다.
결혼식만 비공개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신부에 대한 정보도 지극히 제한적이다. 결혼식 초대장에 ‘토니와 클로에’라고 적어 이 여성을 클로에로 부른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뿐이다. 말레이시아 스트레이트 타임스를 비롯한 현지 언론에서는 페르난데스의 신부가 30대 초반 여배우라고만 보도했다. 에어아시아 승무원 출신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페르난데스가 이 여성과 2년여 정도 연애를 거쳐 결혼했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이다. 사진도 한 장만 공개됐다. 결혼식에는 신랑과 신부의 가족, 친지와 에어아시아 그룹의 고위 임원, 페르난데스 회장이 설립자 겸 이사회장인 튠 그룹의 고위 간부, 말레이시아 정치계 인사 등 150여 명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무사 히탐 전 말레이시아 부총리와 라피다 아지즈 전 통상산업부 장관 등이 참석자에 포함됐다. 피로연에선 미국과 영국, 한국 출신의 유명 가수들이 축하공연을 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누구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페르난데스는 딸 하나를 두고 있으며 이번 결혼은 재혼으로 알려졌다. 사실 이 결혼식은 페르난데스 회장의 입지와 영향력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작고 비밀스럽게 치러졌다는 평이다. 그는 그동안 창업과 수성 과정에서 끈기와 저력, 창의력과 도전정신을 생생하게 보여준 아시아의 ‘경영 귀재’ 기업인으로 꼽혀왔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저가항공 사업을 시작해 이를 궤도에 올린 그는 현재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힘 있는 기업인의 한 사람으로 통한다. 에어아시아는 현재 아시아 최대의 저가항공사로 군림하고 있다. 1993년 창업해 1996년 11월 말레이시아 국영항공사의 하나로 영업을 시작한 이 기업은 2001년 페르난데스가 인수하면서 저가항공사가 됐다. 말레이시아는 물론 아시아 최초의 저가항공사다.
에어아시아는 2017년 12월 현재 자회사를 포함해 에어버스사의 180인승 A320-200 73대, 186인승 A320네오 14대 등 모두 87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다. 이 여객기로 자회사를 포함해 25개국 165개 노선에 취항하고 있다. 이 규모는 조만간 5배 이상인 444대로 늘어날 예정이다. 에어아시아가 에어버스사에 186인승 A320네오 257대와 236인승 A321 100대 등 모두 357대를 주문해둔 상태이기 때문이다. 에어아시아는 창업 초기 보잉사의 보잉 737-300을 운용했지만 지금은 모두 에어버스사의 여객기 일색이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하면 페르난데스 회장의 경영 스타일이 나온다. 항공기를 구매할 때 하나의 업체를 잡고 필요한 모든 항공기를 한꺼번에 주문해 상당한 할인을 받아 구매 비용을 줄이는 방식이다.
페르난데스 회장은 2011년 6월 파리에어쇼에서 에어버스사의 A320네오를 200대나 한꺼번에 주문했다. 당시 시제품만 나온 상태였으며 생산 공급은 2015년에야 가능해질 전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페르난데스 회장은 에어버스사에 단일 주문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의 거래를 제안했다. 정상가로는 180억 달러에 이르는 규모였다. 하지만 에어아시아는 페르난데스 회장의 과감한 배팅으로 상당한 할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통해 에어아시아는 단일 항공사로는 에어버스사의 최대 고객이 됐다.
2012년 12월 에어아시아는 64대의 A320네오와 36대의 A320ceo 등 모두 100대를 추가 주문했다. 2016년 영국에서 열린 판버러에어쇼에서는 A320네오 100대를 추가 구매하기로 했다. 정상가로 126억 달러에 이르는 거래다. 에어아시아는 이렇게 주문한 A320네오를 2016년 9월부터 순차적으로 공급받고 있다.
에어아시아는 현재까지의 주문도 부족해 조만간 추가 주문을 또 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이런 집중 거래를 통해 에어아시아는 머지않은 장래에 에어버스사의 A320계열의 여객기를 모두 575대 보유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되면 에어아시아는 에어버스사의 단일 생산라인 여객기의 최대 단일 구매사가 된다. 에어버스사가 에어아시아를 극진하게 모시며 최상의 가격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지난 10월의 결혼식이 프랑스에서 이뤄진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페르난데스의 에어아시아 창업 과정을 살펴보면 ‘청년 도전기’ 그 자체다. 그는 말레이시아 수도인 쿠알라룸푸르 출신의 말레이시아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말레이시아의 소수민족인 타밀족이다. 그는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영국 런던 남부에 있는 엡섬 칼리지에서 중·고교 과정을 마치고 런던정경대(LSE)를 다녔다. 대학 졸업 뒤 영국의 유명 기업으로 리처드 브랜슨이 창업한 항공사인 버진 애틀랜틱에서 회계사로 일했다. 1987~89년에는 버진 레코드에서 자금 담당을 맡았다.
1989년 귀국한 그는 말레이시아 워너뮤직에서 근무하다 1992년 동남아 담당 간부로 승진해 2001년까지 자리를 지켰다. 워너뮤직의 모기업인 타임워너가 아메리칸온라인에 합병되면서 상당액의 퇴직금을 받게 되자 그는 안락한 생활을 하는 대신 새로운 꿈에 도전했다. 퇴직금을 밑천 삼아 말레이시아 최초의 저가항공사를 창업하겠다는 꿈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저가항공에 대한 그의 꿈은 버진 애틀랜틱에 다닐 때부터 꿈틀거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영국 엡섬 칼리지에 유학하던 10대 때 당시 친구들은 주말에 집으로 가는데 자신은 항공료가 너무도 비싸 방학 때도 가기가 힘들었던 경험을 가끔 털어놓는다. 이 때문에 저가항공 사업에 뛰어들게 됐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인허가였다. 말레이시아 정부로부터 항공사업권을 얻는 것은 쉽지 않았다. 민간항공사도 드문 나라에서 유럽에나 있는 저가항공사를 만들겠다는 제안에 선뜻 허가를 내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비행기 타는 걸 엄청난 특권으로 생각하던 당시 기내식도, 공짜 음료도, 무료 신문·잡지를 제공하지 않는 대신 가격을 낮추는 저가항공은 상상이 힘든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유럽에서나 하지 아시아에서는 무리라는 인식이 강했다. 상당수 나라에서는 관심도 없을 때였다. 아시아 최초의 저가항공은 오히려 조건이 열악한 말레이시아에서 싹튼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다. 그 계기는 뜻밖에도 권력자와의 만남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페르난데스는 개인 인맥을 이용해 2001년 10월 마하티르 총리를 만나게 됐다. 마하티르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페르난데스는 인허가를 받아 새 항공사를 창업해 저가항공사를 만들지 말고 기존의 항공사를 구입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마하티르가 말한 ‘기존 회사’가 바로 에어아시아였다.
당시 에어아시아는 말레이시아의 국영 대형기업으로 자동차, 중공업, 부동산, 서비스업 등을 운영하던 DRBHICOM의 자회사였다. DRB-HICOM은 현재 일본의 혼다·스즈키, 독일의 메르세데스벤츠·폴크스바겐, 인도의 타타 등 자동차 업체의 완성차를 말레이시아 내에서 조립하는 굴지의 기업이다. 하지만 그 자회사인 에어아시아는 당시 운영 미숙으로 1100만 달러의 빚더미에 앉아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이 빚을 떠앉는 조건으로 보잉 737-300 여객기 두 대를 포함해 에어아시아를 단돈 1링깃(약 316원)에 사들였다. 페르난데스는 퇴직금을 포함해 자신이 저축한 돈과 집을 잡히고 대출받은 돈을 에어아시아에 추가로 투자했다. 그의 손에 들어온 에어아시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몇 년간 저가항공 사업만 구상했던 페르난데스는 이 회사를 매입한 지 1년 만에 부채를 모두 갚았다. 2004년에는 회사를 상장했다.
페르난데스는 2001년 9·11테러로 전 세계 항공업계가 얼어붙어 있을 당시를 역으로 활용해 초고속 성공을 거뒀다. 당시 그는 이전보다 40% 이상 떨어진 낮은 가격으로 항공기를 리스할 수 있었으며 항공산업 불황으로 넘쳐나던 유휴 인력을 낮은 임금으로 고용할 수 있었다. 그런 조건에서 그는 저가항공의 가격 이점을 최대한 살려 신규 고객을 대대적으로 확보했다. 바로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말레이시아 국민 중 비행기를 타본 사람은 전체 인구의 6%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에게 저가항공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면서 비용도 오히려 줄일 수 있는 여행 수단이었다. “이제 누구나 비행기를 탈 수 있어요(Now everyone can fly)”라는 이 회사의 구호는 잠재 고객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항공사업에서 성공을 거둔 그는 2007년 툰 호텔이라는 숙박업 체인사업도 시작했다. 이 역시 저가항공과 비슷한 생각으로 시작했다. 비용이 덜 드는 위치에 문을 열고 필수적이지 않은 서비스를 배제해 비용을 절약하는 대신 고객에게 값싼 가격을 제시하는 저가항공의 마케팅 기법은 호텔업계에도 통했다. 항공사와 호텔 체인 등은 그가 한때 근무했던 버진그룹의 창업자 리처드 브랜슨의 포트폴리오와 비슷하다. 브랜슨은 소득이 늘고 생활이 나아지면서 사람들은 음악을 듣고,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가서 호텔에 묵으며 먹고 마시며 레저에 돈을 더 많이 쓰게 될 것이리고 예상해 여기에 맞는 음반, 항공, 숙박, 식음료 등에 투자를 했으며 최근에는 잽싸게 텔레콤에 투자해 거액을 벌었다. 하지만 불모지 아시아에서 저가항공을 최초로 시작했다는 점에서 페르난데스의 저돌성이 더욱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다.
페르난데스는 사실 자신의 비즈니스에 지극히 불리할 수 있는 말레이시아의 경제 환경을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활용하는 지혜를 보였다. 페르난데스의 얼굴을 보면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말레이시아인과 거리가 멀다. 피부가 어두운 인도 남부계다. 그는 다문화·다민족 국가인 말레이시아의 소수민족인 인도계, 그 중에서도 타밀계다. 식민지 시절인 19세기 영국은 같은 식민지였던 인도 남부에 살던 타밀족을 말레이시아에 노동인력으로 데려왔는데 의사인 페르난데스의 아버지는 그 후손이다.
이런 인종적인 배경을 가진 그가 말레이시아에서 아시아 최초의 저가항공 사업에 뛰어든 배경에는 페르난데스 회장 특유의 창의성과 추진력, 그리고 끈기와 함께 말레이시아 특유의 정치·경제적 환경이 자리 잡고 있다. 민족에 따라 서로 다른 대우를 하는 ‘부미푸테라’ 우대정책이 그것이다. 3119만 명의 말레이시아 인구 중 67.4%는 무슬림(이슬람 신자)인 말레이족을 포함해 부미푸테라(대지의 아들이라는 뜻)로 불리는 원주민이다. 부미푸테라는 말레이시아에서 법적으로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말레이족의 문화를 보존하며 이슬람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이 1951년부터 집권연정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인종정치인 셈이다.
그런데 UMNO는 말레이계를 우대하는 정책을 노골적으로 펼쳐왔다. 대표적인 것이 경제다. 1969년 5월 13일 말레이계가 경제를 장악하던 중국인에 대해 인종 폭동을 일으키자 말레이시아 정부는 1971년부터 신경제정책을 내놨다. 경제권을 장악한 중국계의 횡포에 맞서 말레이계의 경제 형편을 개선한다는 명분으로 기업 경영이나 대학 입학에서 말레이족 우대정책을 편 것이다. 이는 1981년부터 2003년까지 22년간 집권한 마하티르 총리의 재임 기간 중 더욱 노골화했다.
그런 마하티르는 집권 말기에 새로운 고민에 부딪히게 됐다. 제3의 종족인 타밀계였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저가항공이라는 새로운 사업을 해보겠다고 허가를 내달라고 조르는 타밀계 청년 페르난데스에게 국영기업의 자회사로 빚이 좀 있는 에어아시아를 맡긴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일종의 타밀계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된 셈이다. 빚더미에 있는 항공사를 불하받아 되살렸다고 하지만 이는 그의 열정을 알아본 마하티르가 펼친 고도의 국가운용 전략일 수 있다. 게다가 같은 조건이라도 오랫동안 저가항공 사업을 꿈꾸고 준비했던 청년 페르난데스만이 에어아시아를 살릴 수 있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페르난데스를 아시아의 도전적인 경영인으로 꼽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 채인택은…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국제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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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만 비공개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신부에 대한 정보도 지극히 제한적이다. 결혼식 초대장에 ‘토니와 클로에’라고 적어 이 여성을 클로에로 부른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뿐이다. 말레이시아 스트레이트 타임스를 비롯한 현지 언론에서는 페르난데스의 신부가 30대 초반 여배우라고만 보도했다. 에어아시아 승무원 출신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페르난데스가 이 여성과 2년여 정도 연애를 거쳐 결혼했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이다. 사진도 한 장만 공개됐다. 결혼식에는 신랑과 신부의 가족, 친지와 에어아시아 그룹의 고위 임원, 페르난데스 회장이 설립자 겸 이사회장인 튠 그룹의 고위 간부, 말레이시아 정치계 인사 등 150여 명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무사 히탐 전 말레이시아 부총리와 라피다 아지즈 전 통상산업부 장관 등이 참석자에 포함됐다. 피로연에선 미국과 영국, 한국 출신의 유명 가수들이 축하공연을 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누구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페르난데스는 딸 하나를 두고 있으며 이번 결혼은 재혼으로 알려졌다.
베일에 쌓인 한국인 여성 ‘클로에’
아시아에서 최초로 저가항공 사업을 시작해 이를 궤도에 올린 그는 현재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힘 있는 기업인의 한 사람으로 통한다. 에어아시아는 현재 아시아 최대의 저가항공사로 군림하고 있다. 1993년 창업해 1996년 11월 말레이시아 국영항공사의 하나로 영업을 시작한 이 기업은 2001년 페르난데스가 인수하면서 저가항공사가 됐다. 말레이시아는 물론 아시아 최초의 저가항공사다.
에어아시아는 2017년 12월 현재 자회사를 포함해 에어버스사의 180인승 A320-200 73대, 186인승 A320네오 14대 등 모두 87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다. 이 여객기로 자회사를 포함해 25개국 165개 노선에 취항하고 있다. 이 규모는 조만간 5배 이상인 444대로 늘어날 예정이다. 에어아시아가 에어버스사에 186인승 A320네오 257대와 236인승 A321 100대 등 모두 357대를 주문해둔 상태이기 때문이다. 에어아시아는 창업 초기 보잉사의 보잉 737-300을 운용했지만 지금은 모두 에어버스사의 여객기 일색이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하면 페르난데스 회장의 경영 스타일이 나온다. 항공기를 구매할 때 하나의 업체를 잡고 필요한 모든 항공기를 한꺼번에 주문해 상당한 할인을 받아 구매 비용을 줄이는 방식이다.
페르난데스 회장은 2011년 6월 파리에어쇼에서 에어버스사의 A320네오를 200대나 한꺼번에 주문했다. 당시 시제품만 나온 상태였으며 생산 공급은 2015년에야 가능해질 전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페르난데스 회장은 에어버스사에 단일 주문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의 거래를 제안했다. 정상가로는 180억 달러에 이르는 규모였다. 하지만 에어아시아는 페르난데스 회장의 과감한 배팅으로 상당한 할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통해 에어아시아는 단일 항공사로는 에어버스사의 최대 고객이 됐다.
2012년 12월 에어아시아는 64대의 A320네오와 36대의 A320ceo 등 모두 100대를 추가 주문했다. 2016년 영국에서 열린 판버러에어쇼에서는 A320네오 100대를 추가 구매하기로 했다. 정상가로 126억 달러에 이르는 거래다. 에어아시아는 이렇게 주문한 A320네오를 2016년 9월부터 순차적으로 공급받고 있다.
에어아시아는 현재까지의 주문도 부족해 조만간 추가 주문을 또 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이런 집중 거래를 통해 에어아시아는 머지않은 장래에 에어버스사의 A320계열의 여객기를 모두 575대 보유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되면 에어아시아는 에어버스사의 단일 생산라인 여객기의 최대 단일 구매사가 된다. 에어버스사가 에어아시아를 극진하게 모시며 최상의 가격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지난 10월의 결혼식이 프랑스에서 이뤄진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페르난데스의 에어아시아 창업 과정을 살펴보면 ‘청년 도전기’ 그 자체다. 그는 말레이시아 수도인 쿠알라룸푸르 출신의 말레이시아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말레이시아의 소수민족인 타밀족이다. 그는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영국 런던 남부에 있는 엡섬 칼리지에서 중·고교 과정을 마치고 런던정경대(LSE)를 다녔다. 대학 졸업 뒤 영국의 유명 기업으로 리처드 브랜슨이 창업한 항공사인 버진 애틀랜틱에서 회계사로 일했다. 1987~89년에는 버진 레코드에서 자금 담당을 맡았다.
1989년 귀국한 그는 말레이시아 워너뮤직에서 근무하다 1992년 동남아 담당 간부로 승진해 2001년까지 자리를 지켰다. 워너뮤직의 모기업인 타임워너가 아메리칸온라인에 합병되면서 상당액의 퇴직금을 받게 되자 그는 안락한 생활을 하는 대신 새로운 꿈에 도전했다. 퇴직금을 밑천 삼아 말레이시아 최초의 저가항공사를 창업하겠다는 꿈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저가항공에 대한 그의 꿈은 버진 애틀랜틱에 다닐 때부터 꿈틀거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영국 엡섬 칼리지에 유학하던 10대 때 당시 친구들은 주말에 집으로 가는데 자신은 항공료가 너무도 비싸 방학 때도 가기가 힘들었던 경험을 가끔 털어놓는다. 이 때문에 저가항공 사업에 뛰어들게 됐다는 설명이다.
단일 항공사로 에어버스사의 최대 고객
우여곡절 끝에 페르난데스는 개인 인맥을 이용해 2001년 10월 마하티르 총리를 만나게 됐다. 마하티르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페르난데스는 인허가를 받아 새 항공사를 창업해 저가항공사를 만들지 말고 기존의 항공사를 구입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마하티르가 말한 ‘기존 회사’가 바로 에어아시아였다.
당시 에어아시아는 말레이시아의 국영 대형기업으로 자동차, 중공업, 부동산, 서비스업 등을 운영하던 DRBHICOM의 자회사였다. DRB-HICOM은 현재 일본의 혼다·스즈키, 독일의 메르세데스벤츠·폴크스바겐, 인도의 타타 등 자동차 업체의 완성차를 말레이시아 내에서 조립하는 굴지의 기업이다. 하지만 그 자회사인 에어아시아는 당시 운영 미숙으로 1100만 달러의 빚더미에 앉아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이 빚을 떠앉는 조건으로 보잉 737-300 여객기 두 대를 포함해 에어아시아를 단돈 1링깃(약 316원)에 사들였다. 페르난데스는 퇴직금을 포함해 자신이 저축한 돈과 집을 잡히고 대출받은 돈을 에어아시아에 추가로 투자했다. 그의 손에 들어온 에어아시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몇 년간 저가항공 사업만 구상했던 페르난데스는 이 회사를 매입한 지 1년 만에 부채를 모두 갚았다. 2004년에는 회사를 상장했다.
페르난데스는 2001년 9·11테러로 전 세계 항공업계가 얼어붙어 있을 당시를 역으로 활용해 초고속 성공을 거뒀다. 당시 그는 이전보다 40% 이상 떨어진 낮은 가격으로 항공기를 리스할 수 있었으며 항공산업 불황으로 넘쳐나던 유휴 인력을 낮은 임금으로 고용할 수 있었다. 그런 조건에서 그는 저가항공의 가격 이점을 최대한 살려 신규 고객을 대대적으로 확보했다. 바로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말레이시아 국민 중 비행기를 타본 사람은 전체 인구의 6%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에게 저가항공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면서 비용도 오히려 줄일 수 있는 여행 수단이었다. “이제 누구나 비행기를 탈 수 있어요(Now everyone can fly)”라는 이 회사의 구호는 잠재 고객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항공사업 성공 발판 삼아 호텔업에 진출
페르난데스는 사실 자신의 비즈니스에 지극히 불리할 수 있는 말레이시아의 경제 환경을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활용하는 지혜를 보였다. 페르난데스의 얼굴을 보면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말레이시아인과 거리가 멀다. 피부가 어두운 인도 남부계다. 그는 다문화·다민족 국가인 말레이시아의 소수민족인 인도계, 그 중에서도 타밀계다. 식민지 시절인 19세기 영국은 같은 식민지였던 인도 남부에 살던 타밀족을 말레이시아에 노동인력으로 데려왔는데 의사인 페르난데스의 아버지는 그 후손이다.
이런 인종적인 배경을 가진 그가 말레이시아에서 아시아 최초의 저가항공 사업에 뛰어든 배경에는 페르난데스 회장 특유의 창의성과 추진력, 그리고 끈기와 함께 말레이시아 특유의 정치·경제적 환경이 자리 잡고 있다. 민족에 따라 서로 다른 대우를 하는 ‘부미푸테라’ 우대정책이 그것이다. 3119만 명의 말레이시아 인구 중 67.4%는 무슬림(이슬람 신자)인 말레이족을 포함해 부미푸테라(대지의 아들이라는 뜻)로 불리는 원주민이다. 부미푸테라는 말레이시아에서 법적으로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말레이족의 문화를 보존하며 이슬람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이 1951년부터 집권연정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인종정치인 셈이다.
그런데 UMNO는 말레이계를 우대하는 정책을 노골적으로 펼쳐왔다. 대표적인 것이 경제다. 1969년 5월 13일 말레이계가 경제를 장악하던 중국인에 대해 인종 폭동을 일으키자 말레이시아 정부는 1971년부터 신경제정책을 내놨다. 경제권을 장악한 중국계의 횡포에 맞서 말레이계의 경제 형편을 개선한다는 명분으로 기업 경영이나 대학 입학에서 말레이족 우대정책을 편 것이다. 이는 1981년부터 2003년까지 22년간 집권한 마하티르 총리의 재임 기간 중 더욱 노골화했다.
그런 마하티르는 집권 말기에 새로운 고민에 부딪히게 됐다. 제3의 종족인 타밀계였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저가항공이라는 새로운 사업을 해보겠다고 허가를 내달라고 조르는 타밀계 청년 페르난데스에게 국영기업의 자회사로 빚이 좀 있는 에어아시아를 맡긴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일종의 타밀계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된 셈이다. 빚더미에 있는 항공사를 불하받아 되살렸다고 하지만 이는 그의 열정을 알아본 마하티르가 펼친 고도의 국가운용 전략일 수 있다. 게다가 같은 조건이라도 오랫동안 저가항공 사업을 꿈꾸고 준비했던 청년 페르난데스만이 에어아시아를 살릴 수 있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페르난데스를 아시아의 도전적인 경영인으로 꼽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 채인택은…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국제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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