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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눌린 트라우마 기억의 반란

억눌린 트라우마 기억의 반란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성 없는 것은 뇌가 정신적 외상과 관련된 기억 처리하는 방식 때문인 듯
PTSD는 정신적 외상을 입은 뇌가 무엇을 기억하고 잊어야 하는지 구분할 수 없어 ‘기억 장애’를 일으킨다.
내 환자의 이름은 마리아다.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밝은 산호색 매니큐어, 명품 핸드백, 매끈한 마스카라와 아이라이너가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얼굴은 굳어 있었고 표정이 거의 없었다.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마리아는 불면증과 불안증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나는 마리아가 어렸을 때 삼촌에게 성추행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의 기억이 거의 없다. 성인이 돼서는 삼촌을 멀리했다. 그녀는 20대 들어서도 불안증이 심했다. 하지만 상담 치료가 큰 도움이 됐다. 그 후로 수십 년 동안 모든 불안과 걱정이 사라진 듯했다. 새 직장을 얻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약 1년 전 힘든 이혼을 했다. 이어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했던 삼촌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오로지 숙모를 위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장례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려고 차의 운전석에 앉았을 때 아주 기이한 경험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몸이 계속 떨리고 심장이 마구 뛰었어요. 숨쉬기가 힘들어 질식당하는 느낌이었죠. 진짜 이상한 일이었어요. 약 15분 동안 꼼짝 못 하고 앉아 있다가 겨우 시동을 걸고 집으로 갈 수 있었어요. 나의 이런 불안증이 삼촌의 성추행과 관련 있을까요?”

일주일 뒤 마리아가 다시 상담실로 찾아왔을 때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얼룩 묻은 티셔츠 차림에 머리는 아무렇게나 뒤로 질끈 묶고 있었다. 말이 부자연스럽고 일관성이 없었다. 성적 학대의 끔찍한 기억 속에 매몰돼 있었다. 마리아는 삼촌의 성추행으로 다 망쳐버린 상황들을 계속 떠올렸다. 어린 시절의 공원 소풍, 가족 생일 파티, 추수감사절 만찬, 밤샘 파티 등. “기억을 억누를 수 없어요. 계속 떠올라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나는 마리아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녀에겐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정신이 너무 산만해 아주 쉬운 질문에도 잘 대답하지 못했다. 상상 속의 공격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 연신 손으로 몸을 가렸다. “제발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마리아는 겁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버럭 화를 내며 울부짖었다. “싫어, 싫어, 그러지 말란 말이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전형적인 증상인 ‘플래시백(flashback)’이었다. 과거의 충격적인 경험이 예상치 않게 문득 떠오르는 현상을 말한다. 아주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과거가 너무 강렬해 현재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등 성적 공격은 우리 사회에 만연하지만 대부분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근년 들어 자신이 당한 성적 공격을 폭로하는 ‘미투’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져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HBO 다큐멘터리 ‘네버랜드를 떠나며(Leaving Neverland)’에서 웨이드 롭슨과 제임스 세이프척은 어린 시절에 ‘팝의 황제’ 고(故) 마이클 잭슨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폭로했고, 미국 팰로앨토대학 심리학과 교수 크리스틴 포드는 고등학생 시절 브렛 캐버노 미국 연방 대법관에게 성적으로 당했다고 공개 증언했으며, 가톨릭 성직자들이 많은 미성년자를 성추행했다는 폭로가 이어져도 그 외 숱한 사건은 여전히 어둠 속에 머문다.

그럴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이유는 성범죄 피해자가 받는 사회적 수치와 오명이다. 그러나 충격적인 경험으로 정신적 외상을 입은 뇌가 작동하는 방식도 또 다른 이유가 된다. PTSD는 어둠 속에서 위력을 떨친다. 충격이 너무 커 정신적인 외상을 일으킨 기억은 그대로 억눌러 묻어버릴 경우 심하게 왜곡될 수 있다. 그래서 성적 학대를 당한 사람이 그 기억을 돌이킬 때는 앞뒤가 맞지 않고 군데군데 빠진 부분이 있으며, 심지어 상충하기도 한다. 그처럼 피해자의 진술에서 신빙성에 의문이 생길 수 있어 성희롱과 성적 학대, 성추행, 성폭행이 지속할 수 있다. PTSD는 정신적 외상을 입은 뇌가 혼란에 빠져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어야 하는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를 유발해 전문가들은 그것을 ‘기억 장애(disorder of memory)’라고 부른다.

PTSD에는 두 가지 형태의 기억이 있다. 첫째는 원치 않는 침입을 일삼는 기억이다. 잊고 싶은데도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면서 그때의 충격적인 사건을 다시 겪는 것 같은 상태다. 정신적 외상을 주는 사건을 겪으면 기억을 통합하는 뇌의 자연적인 과정(안정화, 숙성화)이 과도하게 이뤄진다. 이런 과잉 통합 과정으로 충격적인 기억이 잊을 수 없도록 굳어지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삶 속으로 계속 침입한다. 내 환자 마리아의 경우처럼 언행과 태도에서 그런 상태가 아주 뚜렷이 드러난다.
크리스틴 포드 교수는 브렛 캐버노 미국 연방대법관이 고등학생 시절 자신을 성적으로 공격했다고 공개 증언했다. / 사진:UPI/YONHAP
이런 원치 않는 기억의 침입은 너무 강렬해 ‘지울 수 없는 이미지’로 굳어진다. 포드 교수는 36년 전 성적 공격 당시의 세부사항을 돌이키면서 ‘지울 수 없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자신이 어떤 옷을 입었고(겉옷 속에 수영복 차림), 무엇을 마셨으며(맥주 한 잔), 어떤 음악이 들렸는지 생생하게 기억했다.

PTSD 기억의 두 번째 형태는 정신적 외상을 준 충격적인 사건을 자발적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이런 기억은 감정적으로 강렬하지 않으며 또 체계적이지도 않은 경향이 있다. 해당 사건의 가장 감정적인 부분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 부분은 몇 초부터 몇 시간까지 짧거나 길 수 있다. 마리아가 어려서 성적으로 학대당했다는 사실을 알지만, 당시의 기억 중 자발적으로 돌이킬 수 있는 부분이 얼마 되지 않는 이유다. 또 그것은 포드가 성적 공격을 당했다고 주장한 그날 밤의 세부사항을 그토록 많이 생생하게 기억하지만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는지는 기억할 수 없는 것도 설명해준다.

어린아이가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이나 친척에게 심하거나 오랜 기간 성적 학대를 당할 때는 그 상황을 현실과 분리하는 것이 즉각적인 보호 효과를 가져다준다. 이런 분리는 신체적인 탈출이 불가능할 때 심리적으로 탈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아이가 학대자에게 음식과 물, 옷, 거주지, 정서적 유대감을 의존할 때가 그렇다.

그러나 현실과의 분리는 뇌가 충격적인 기억을 처리하고 저장하고 불러내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기억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성적 학대를 당한 사람은 그 정신적 외상이 의식적인 인지에서 강제로 밀려나면서 기억 상실에 걸릴 수 있다. 그뿐이 아니라 현실과의 분리에 따른 보호 효과는 오래 가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피해자가 학대자에게 덜 의존하게 되고, 그와 멀리 떨어져 있고,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방식을 찾으면서 정신적 외상의 기억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럴 경우 이전보다 더 심한 외상 스트레스 증상에 시달릴 수 있다.

현실과의 분리는 어린 시절 정신적 외상을 입은 사람의 인식 변화를 설명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런 사람은 처음에는 학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학대자를 가해자로 보지 않지만, 나중에 가서 상황을 달리 판단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롭슨과 세이프척이 십대 시절엔 마이클 잭슨을 감싸줬다가 독립적인 성인이 된 뒤 잭슨의 성추행을 폭로하게 된 것도 그로써 설명할 수 있다.

PTSD 환자의 트라우마 기억은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면서도 동시에 화가 치밀 만큼 모호하다.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역설이 PTSD와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의 핵심이다. 사건의 기억이 모호하다면 성적 학대를 당했다는 사람의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 트라우마의 사실들은 일생을 지배할 수 있지만, 특정 트라우마 기억은 의식에서 배제될 수 있다. 왜 그럴까? 트라우마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지난 20년 동안 인간의 기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근본 원리를 이해함으로써 이 역설을 해결하려고 애썼다.
HBO 다큐멘터리 ‘네버랜드를 떠나며’에서 웨이드 롭슨이 마이클 잭슨과 악수하는 장면. 롭슨은 잭슨에게 성추행당했다고 폭로했다. / 사진:HBO-AP/YONHAP
기억에는 명시적인 기억과 암시적인 기억이 있다. 명시적인 기억은 전화번호처럼 의식적으로 불러낼 수 있는 자전적인 ‘팩트’들로 구성된다. 그와 대조적으로 암시적인 기억은 환경적이거나 내부적인 신호 때문에 작동하며 뇌가 자동으로 기능한다. 예를 들면 라디오를 들으면서 운전하는 것과 같다. 그때 우리는 의식적으로 기억을 불러내지 않고 암시적 기억에 의존해 정지 신호등에 반응하고 보행자를 피해간다.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정신적 외상을 준 충격적인 사건을 암시적인 기억으로 처리한다. 의도적으로 돌이키는 게 아니라 특정 신호가 자동으로 그 기억을 촉발한다는 뜻이다.

또 정신적 외상을 준 사건의 기억은 당시의 감각 정보와 함께 뇌에 저장된다. 공기 중에 밴 냄새, 라디오에서 틀어준 음악, 창에 부딪히는 빗방울의 소리 등이 그 예다. 이 모든 정보가 ‘공포 구조(fear structure)’로 불리는 상호연결된 신경 네트워크에 함께 저장된다.

‘공포 구조’ 속의 한 요소라도 특정 신호의 촉발로 되살아나면 모든 관련된 트라우마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올 수 있다. 마리아가 상담실에서 보인 것 같이 완전한 플래시백이 현실화되면 ‘공포 구조’의 모든 네트워크가 활성화됐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수십 년 전의 성적 학대 트라우마를 현시점에서 다시 겪게 됐다. 이런 ‘공포 구조’의 강도와 크기가 PTSD 환자에게서 삶의 질을 크게 떨어뜨린다. ‘공포 구조’에 저장된 감각 정보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어 부지불식간에 촉발제 역할을 한다. 마리아의 경우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한 삼촌을 닮은 점원을 가게에서 보거나 그 삼촌과 똑같은 스킨로션을 사용하는 사람 곁을 지나치는 것 같은 감각적 신호가 과거에 받은 성적 학대를 둘러싼 생각과 공포, 불안, 신체적 느낌을 촉발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점은 정신적 외상을 겪은 사람이 그런 촉발제와 거기서 비롯되는 스트레스를 자발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마리아는 식료품점 점원이 삼촌을 닮았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다가 가게를 나온 뒤 문득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다. 이런 임의적인 촉발로 트라우마 증상은 느닷없고 충격적으로 나타나기 쉽다.

이런 ‘공포 구조’를 하나씩 해체하는 것이 대화 치료의 성공에 필수적이다. 그 구조를 적절히 해체하려면 PTSD 환자는 숙련된 심리 상담사의 지도에 따라 자신의 트라우마 이야기를 되풀이해야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영구히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치료는 쉽지 않다. 특히 정신적 외상을 겪은 사람은 그 트라우마를 상기하는 일을 본능적으로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로서는 트라우마를 묻어버리고 직접적이지 않은 치료책을 찾으려는 본능이 너무 강해 케타민이나 엑스터시 같은 향정신성 약물이나 의료용 마리화나 같은 ‘마법의 탄환’에 이끌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접근법은 정신 상태에 영향을 미쳐 신속하게 증상을 완화해주지만, PTSD의 뿌리를 파헤치고 그 ‘공포 구조’를 해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피해자가 기억의 혼돈을 극복하고 조화를 되찾으며 새로운 상태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려면 기억을 정확하게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여야 한다.

- 샤일리 제인



※ [필자는 미국 스탠퍼드대학 정신과 임상교수로 PTSD 전문가다. 이 글은 필자의 저서 ‘트라우마와 치유 이야기(The Unspeakable Mind: Stories of Trauma and Healing From the Frontlines of PTSD Science)’에서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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