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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권리’와 ‘잊힐 권리’

‘알 권리’와 ‘잊힐 권리’

인터넷 검색사이트에 계속 떠 있는 자신의 체포 관련 기사를 삭제하도록 해달라는 40대 남성의 가처분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였다. 몇 해 전 일본에서의 일이다. 사이타마(埼玉) 지방법원이 “범죄의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어느 정도의 기간이 지나면 과거의 범죄사실이 사회에서 ‘잊힐 권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정인에게 불리한 개인정보의 삭제 요구에 대해 ‘잊힐 권리’를 명시하고 삭제를 인정한 것은 일본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다. 이 남성은 아동 매춘과 포르노 금지법 위반 혐의로 벌금 50만 엔의 약식명령이 확정된 바 있다. 그의 이름과 주소를 검색하면 3년 전 체포 당시 기사가 계속 뜨고 있었다. 남성의 가처분 신청에 대해 사이타마 지방법원이 “갱생에 방해받지 않을 이익을 침해받고 있다”며 삭제를 명령했지만 검색사이트 구글(Google) 측은 법원에 결정 취소를 요구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구글의 이의 제기와 상관없이 현재 남성의 체포 기록은 검색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유럽사법재판소는 ‘온라인상에서의 잊힐 권리’를 인정하고 피해가 우려되는 개인정보의 삭제를 구글에 명령한 바 있다. 그러나 보도에 따르면 구글 측은 58%의 삭제 요청을 거부했다고 한다. 아동 성폭행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은 프랑스 사제도 구글에 자신의 유죄 판결 사실과 교회에서 추방된 내용의 기사를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와는 반대로 구글은 벨기에에서 5년 전 중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후 항소법원에서 자신의 유죄 판결이 각하된 사람이 관련 기사를 삭제해 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여 삭제했다고 밝혔다. 구글은 유럽사법재판소가 온라인상에서의 잊힐 권리를 인정하고 피해가 우려되는 개인정보를 삭제하라고 판결하자 이를 수용해 삭제 작업에 나선 것이다.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란 인터넷에서 생성되어 저장, 유통되는 개인의 사진이나 거래 정보에 대해 유통기한을 정하거나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발달하며 네트워크상에 개인의 사생활이 무분별하게 오르내리면서 잊힐 권리가 힘을 받는다. 그러나 그 권리의 법제화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어 아직은 사법적 제재가 서로 엇갈린다.

우선 법제화에 따른 부작용의 우려다. 인터넷의 재생산성이 높아진 오늘날 어떠한 정보가 올라와 인터넷상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 사이트에 순식간에 퍼진다. 국내는 물론 해외 여러 사이트까지 퍼진 정보를 삭제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력과 비용이 든다.

그뿐만 아니라 잊힐 권리를 악용하여 정치인이나 범죄자들이 과거 행적을 지우는 신분세탁에 이용할 수 있다는 것. 이는 때때로 선거에 역이용될 수도 있어 국민은 제한된 정보만을 얻는 셈이다. 사적인 개인정보가 아닌 국민에게 필요한 정보라도 잊힐 권리를 이용하여 삭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한다는 지적이다.

잊힐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법률이 이미 존재한다는 주장도 있다. 국내에서는 개인정보보호법 등을 통해 국민에게 잊힐 권리가 이미 반영되어 있다는 지적이다. 인격권 침해 구제를 위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통신심의를 통해 게시물과 댓글 등을 삭제하고 있으며, 당사자가 신고만 하면 게시물이 차단된다. 따라서 잊힐 권리까지 법제화한다면 표현의 자유는 물론 자유로운 소셜네트워크 활동에 지장을 줄 것이라는 주장이다.
 '잊힐 권리’가 표현의 자유 침해한다는 주장도
최근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서도 ‘한국의 잊힐 권리 법제화를 위한 정책제언 자료집’을 발간하면서 국회에 소위를 구성하자는 제안을 했다. ‘잊힐 권리’는 광범위한 인터넷 네트워크상에 기록되어있는 자신의 개인정보 등 기록을 삭제하고자 하는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의 보장 문제다. 유럽연합(EU)에서는 잊힐 권리가 포함된 개인정보보호 규정을 입법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유럽사법재판소가 이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려 귀추가 주목된다.

잊힐 권리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점도 논란거리다. 정보의 삭제 책임을 검색업체가 가지는 것이 일종의 검열형태로 작용할 수 있어 표현의 자유와 직결된다는 지적이다. 이미 사실로 판명된 정보의 경우에도 당사자가 요구하면 삭제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다. 유럽사법재판소의 경우 신문기사의 원본을 삭제하도록 판결하지는 않았다.

한국에서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에 관한 법률(정보통신망법)’ 제44조 2항(정보의 삭제요청 등)을 통해 잊힐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개인이 자신의 정보 삭제를 요청하면 검색서비스 사업자는 해당 정보에 대한 삭제 혹은 접근을 일시적으로 차단하는 ‘임시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해당 정보가 당사자의 권리를 침해하는지를 검색 서비스 사업자가 판단해야 한다는 점과 불확실할 경우에도 30일 동안 관련 게시글을 차단해야 한다는 점에서 ‘알 권리’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인터넷상에서의 정보 차단이 당사자의 신고만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임시 조치가 남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코로나 확진자의 동선 공개와 잊힐 권리가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코로나 확진자의 동선(動線)이 계속 공개되고, 그 정보가 온라인상에서 지워지지 않아 확진자가 다녀간 업체들까지 개점휴업상태다. 정부와 지자체는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감염병 환자의 이동 경로, 접촉자 현황 등 국민이 예방을 위해 알아야 하는 정보를 신속히 공개해야 할 의무가 있어 이에 대한 공개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감염예방법에서 보호하고 있는 정보의 대상은 확진자에 대한 정보에 한정되어 있다. 확진자가 다녀간 식당 등의 업소들은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어 피해를 보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새롭게 대두하고 있는 ‘잊힐 권리’에 근거해 정보에 대한 링크의 삭제 등을 요구할 수 있는지 관심을 끈다.

정부가 보조금을 횡령한 어린이집을 공개하자 이에 대하여 잊힐 권리를 주장하며 공개에 대한 취소를 주장한 사건에서 법원은 우리나라에서 아직은 망각할 권리가 헌법상 확립된 기본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면서 공개취소청구를 기각하기도 했다. 아직은 다소 생소한 권리이나 여러 분야에서 잊힐 권리가 거론되고 있어 어느 수준까지 보호받을 수 있는지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 권리주장이 만만찮아 범위가 차츰 확대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 정영수 칼럼니스트(전 중앙일보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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