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 미얀마에 도대체 무슨 일이] 군사 쿠데타의 굴레에 빠진 미얀마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 미얀마에 도대체 무슨 일이] 군사 쿠데타의 굴레에 빠진 미얀마
과거 독립운동 선구자에서 현재 국민억압 파시스트가 된 군부 독재 민주주의를 가꿔가던 동남아 국가 미얀마가 2월 1일 민아웅 흘라잉 군 최고 사령관이 주도한 군사쿠데타로 군부독재의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군부는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 겸 외교부 장관과 윈 민 대통령이 이끌던 민간정부를 무너뜨리고 1년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동남아의 서쪽 끝에 자리 잡은 이 나라는 1997년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의 회원국이 됐다.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태국 5개국이 1967년 아세안을 창설한 지 30년 만이다. 국토는 63만6578㎥로 한반도의 3배며, 아세안에선 인도네시아에 이어 둘째로 넓다. 인구는 2020년 5350만명(추정)으로 아세안에서 5위 규모다.
문제는 넓은 국토, 많은 인구, 쌀을 3~4모작 하는 자연환경, 석유·가스 천연자원, 황금 파고다를 비롯한 수많은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가난하다는 사실이다. 국제통화기금(IMF) 2020년 명목금액 기준 추정치로 국내총생산(GDP)는 717억 달러로 아세안에서 7위다. 이를 인구로 나눈 1인당 GDP는 1333달러로 아세안에서 가장 적다. 전 세계적으로도 최빈국이다. IMF가 통계를 낸 187개국 중 153위다. 노동력 분포는 농업 70%, 제조업 8%, 서비스업 22%다. 한마디로 가난한 농업국가 수준이다.
2018년 공식 수출액은 148억 달러로 천연가스·목재·석유제품·수산물에 쌀·콩 등 농산물, 옥·루비·사파이어 등 보석류가 대부분이다. 2017년 미얀마 상무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수출 상대국은 중국(42.1%)·태국(18.3%)·인도(7.9%)·일본(6.5%)·싱가포르(3.9%) 등이다. 하지만 보따리상인들이 국경을 맞댄 중국·태국·인도·방글라데시 등에 비공식적 개인무역으로 넘기는 목재·쌀·보석 등의 물량도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미얀마의 빈곤 수준은 심각하다. 세계은행(WB)의 ‘글로벌 빈곤 워킹 그룹’ 조사에 따르면 미얀마에서 빈곤에 처한 국민의 비중이 2017년 24.8%에 이른다. 농촌지역 빈곤은 더욱 심해 전체 70%가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UNDP는 지적했다.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미얀마의 고용인구는 전체 인구의 61%(2474만명) 수준이다. 민주화 후 경제가 외국 투자 등으로 힘을 받아 2018년 6.8%, 2019년 6.3%를 기록했으나, 2020년 코로나19 등으로 1,5%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올해 성장률이 반등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군부 쿠데타로 경제가 다시 얼어붙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전문가들은 오랜 군부 통치를 주 원인으로 꼽는다. 1962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가 2015년 민주 정부가 탄생할 때까지 53년에 걸쳐 권력을 장악하면서 보여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정책 실패, 무책임과 부패, 그리고 쇄국 정책에서 가난의 이유를 찾는다.
군부 통치의 시작은 1962년 쿠데타로 집권해 1988년까지 통치했던 독재자 네 윈(1910~2002년)에서 비롯한다. 네윈은 1930년에 결성된 미얀마의 반영조직인 ‘우리 버마 협회(도바마 아시아요네·주인이라는 의미의 타킨스라고도 부름)’의 회원이 됐다. 버마로 불렸던 미얀마는 1752년 이후 콘바웅 왕조에 의해 통일국가를 유지했으나 1824년 제1차 영국-버마 전쟁 후 일부가 영국 통치를 받기 시작했다. 미얀마는 그 뒤 60년 동안 영국과 2차례 더 전쟁을 벌였으나 모두 패배하고 영토를 조금씩 잃다가 1885년 왕조가 무너지고 전 국토가 영국 식민지가 됐다. 식민지 시대 미얀마는 영국 직할 식민지와 영국령 인도의 속령 사이를 오가며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타킨스에서 함께 활동한 인물이 미얀마 독립의 영웅이자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의 부친인 아웅산(1915~1947년), 미얀마 초대 총리를 지낸 우 누(1907~1995년) 등이 있다. 이 단체의 청년 회원 30명은 1941년 중국 남부 하이난(海南)섬에서 일본군으로부터 군사 훈련을 받으면서 ‘버마 독립군’을 결성했다. 오늘날 미얀마군의 전신이다. 이 청년들은 ’30인의 동지‘로 불리며 미얀마 독립 전후 핵심 세력이 됐다. 이들의 지도자가 바로 아웅산이었다. 아웅산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인 1946년 1월 ‘30인의 동지’가 주축이 된 ‘파시스트 인민자유 연맹(AFPFL)’을 창당하고 대표를 맡았으며 영국령 미얀마(당시는 버마)의 총리를 맡아 영국과 독립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독립 직전인 1947년 7월 의문의 폭탄 테러로 숨졌다.
1948년 1월 4일 ‘버마 연방’으로 독립한 미얀마는 아웅산의 동료인 우 누가 총리를 맡아 이끌었으며 AFPFL은 집권당이 됐다. 문제는 우 누가 지나치게 장기 집권하면서 집권당 내에서 분열과 권력투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AFPFL은 독립 직전인 1947년과 독립 뒤인 1951~52년, 1956년 선거에서 승리해 안정적으로 정권을 운영했다. 하지만 1958년 1월 내부 분란으로 AFPFL은 우 누의 ‘청렴 AFPFL’과 반대파의 ‘안정 AFPFL’로 분당했다. 하원에서 숫자는 반대파가 더 많았지만 우 누는 야당의 지원으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군이 개입했다. 군부가 1958년 선거관리 내각을 구성해 1960년 선거까지 18개월간 국정을 맡기로 했으며 네 윈이 총리를 맡았다. 이 선거에선 아웅산의 형인 아웅탄이 만든 야당인 국민통합전선(NUF)이 37% 득표를 하면서 우 누에 맞섰다.
하지만 네 윈이 이끄는 군부는 1962년 쿠데타로 집권했으며 1964년 일당 독재를 시작하면서 집권당이던 연방당과 야당인 국민통합전선도 모두 사라졌다. 군부는 쿠데타 당시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명분으로 내걸었으며 범죄율이 오르는 상황에서 버마 사회의 법과 질서 회복을 위해 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군부는 국호인 ‘버마 연방’을 ‘버마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꿔 1988년까지 유지했다. 연방이란 용어가 소수민족에 지나치게 양보한 용어로 인식해 싫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소수민족의 무장투쟁 진압은 미얀마 군이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미얀마에서 군은 과거 식민지와 독립 운동 시절은 물론 건국 뒤에도 계속 상당한 힘과 국민 지지를 얻고 있었다. 가장 큰 이유가 독립 직후부터 벌어진 소수민족의 무장투쟁과 내전이다.
미얀마는 복잡한 나라다. 5300만 인구의 미얀마는 버마인(68%)·샨인(9%)·카렌인(7%)·라카인인(4%)·몬인(2%)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135개 민족·종족으로 이뤄진 다민족 국가다. 버마인과 카렌인은 중국티베트계 언어를 사용하고, 샨인은 타이계 언어를 몬인은 몬-크메르 계열의 언어를 사용한다. 특히 국경지대에 사는 집단은 별도 독립을 주장해왔다. 이 때문에 독립 직후부터 미얀마 내부에서 갈등과 분규, 그리고 무장 투쟁이 벌어져왔다.
중국과 접경한 북부 카친 주에서는 기독교도인 카친인들이 불교도가 대부분인 버마인과 종교 분쟁을 벌여왔다. 카치인들은 카친 독립군을 결성해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다. 카친 주 남쪽의 샨 주에서는 샨족이, 샨 주 남쪽으로 태국과 접경한 카에 주에서는 카레니인들이, 그 남쪽인 카인 주에서는 카렌인(카레니인과 다름)들이 각각 독립을 주장한다.
방글라데시·인도와 접경한 서부 라카인 주의 북부와 친주에서는 친인들이 중앙 정부에 대항한다. 1948년 독립 후 미얀마에서 내전으로 인한 사망자는 13만~25만명으로 추정한다. 주민 60만~100만명(추산)이 집을 잃고 떠돌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학살과 인권유린, 소년병, 인신매매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해왔다. 100만 명 난민을 양산한 미얀마 군과 정부의 무슬림 로힝야인에 대한 박해와 추방은 별도다.
미얀마는 소수민족의 저항에 대응하고 내란 평정과 치안 유지를 위해 독립 직후부터 많은 군사비를 지출하며 군을 키워왔다. 군에는 예산과 인재가 몰렸다. 이는 1962년 쿠데타의 한 원인을 제공했으며, 2015년까지 계속된 군부 통치의 물적 토대가 됐다. 이런 군을 등에 업고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네 윈은 1962~1974년 혁명위원회 의장을 지낸 뒤 1974~1981년 대통령을 맡았으며 1962~1988년 일당독재 정당인 버마 사회주의계획당 대표를 지내며 미얀마를 철권 통치했다. 네 윈은 버마족과 불교를 우선하는 ‘버마식 사회주의’ ‘불교 사회주의’를 국정철학으로 내세웠다. 그의 정책에는 일당독재, 외국인 추방, 해외관광객 사절, 대외교역 단절, 엄격한 고립과 쇄국주의, 산업 국유화, 소수민족 억압 등이 포함됐다. 이러한 정책은 민주주의·인권 억압과 경제파탄을 불렀다. 개인 소유 토지를 몰수한 것도 모자라 작은 가게까지 모두 국영으로 운영하고 가게 이름에는 번호를 달았다.
불교사회주의를 내세운 네 윈은 무슬림 로힝야인에 대한 탄압의 원조이기도 하다. 대다수 미얀마인과 달리 인도유럽계 무슬림(이슬람 신자)으로 서부 라카인 주에 거주하는 로힝야인은 미얀마의 135개 공식 소수민족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1982년 군부통치 시절 군부가 만든 국적법에서 국민 기준을 ‘영국 통치 이전부터 거주한 민족’으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군부는 이들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19세기 인도 동부 벵갈 지역에서 건너 온 이민자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이들을 국민에서 제외되고 추방해야 할 ‘식민 잔재’로 분류됐다.
하지만 로힝야족은 자신들이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의 토착민족이라고 주장한다. 군사정권 이전엔 선거에도 참가했음을 강조한다. 국경 넘어 방글라데시의 동남부 치타공과 콕스바자르 지역 주민과 언어가 70~80% 통한다. 방글라데시의 표준어인 벵갈어로는 의사소통이 어렵다. 군사정권은 1978년 ‘외국인’이라며 로힝야인 20만 명을 강제로 국경 너머 방글라데시로 밀어냈다. 1991~92년엔 25만 명 이상을 다시 쫓아냈다. 아웅산 수치가 실질적인 지도자가 된 2015년 다시 탄압과 추방을 재개해 인도주의 재앙이 벌어졌다. 군부 대신 민주화 주도 세력이 배타적인 민족주의 세력으로 변해 로힝야인 탄압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사회주의 아래에서 신음하던 미얀마 민중은 1988년 8월 8일 당시 수도 랑군(양곤) 등지에서 대학생·승려·시민이 100만 명 이상 참가해 군부 독재와 버마식 사회주의 실패, 부패, 경찰 폭력 등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군부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8888사건이 벌어졌다. 사망자는 300명에서 1만명까지로 추산된다.
미얀마 국부 아웅산의 딸 아웅산 수지는 2015년 총선에서 자신이 이끄는 국민민주동맹(NLD)이 승리하면서 외교부 장관을 맡았으며 국가고문이라는 자리를 만들어 사실상 최고 지도자 역할을 해왔다. 가족이 외국인이면 대통령을 할 수 없다는 헌법 규정(민족주의를 앞세운 군부가 만들었다) 때문에 만든 편법 권력이다. 이를 통해 1962년 네 윈의 군사쿠데타 후 53년 간 이어졌던 군부 지배는 끝났지만 군은 여전히 세력을 유지했다. 군사 정권 당시 제정한 헌법에 따라 군부는 선거와 무관하게 상·하원 의석의 25%를 할당받는 것은 물론 내무·국방·국경경비 등 3개 안보·치안 부처의 수장도 맡는다.
주목할 점은 쿠데타 직전 수지의 권력이 절정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NLD는 지난해 11월 8일 치른 총선에서 83%를 득표해 하원 의석 440석 가운데 315석, 상원에선 224석 중 161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다. 군부와의 권력 균형을 깨고 민간 정부가 이를 누를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자 군은 선거 직후부터 유권자 수 3700만 명을 기재한 유권자 명부가 실제와 860만 명이 차이가 난다며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다 급기야 쿠데타를 일으켰다. 미국은 미얀마 군부에 외교적 압박을 가하지만, 미얀마로 국경을 맞댄 중국의 방해로 쉽지 않다. 중국은 인도양 항구에서 시작해 미얀마를 관통해 서남부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으로 이어지는 석유·가스관을 건설 중이다.
미국은 2012년 11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론 처음으로 미얀마를 방문해 정치 개혁 중이던 군부에 민주선거를 통해 민간 정부에 권력을 이양하도록 설득했다. 2017년 11월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얀마를 방문해 미사를 집전하고 지도자들을 만났다.
미얀마는 1948년 독립 후 독립이나 자치 확대, 연방제 등을 주장하는 소수민족의 무장 투쟁이 지금까지 계속돼 왔다. 종교 갈등 등도 존재한다.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영국과는 영연방에도 가입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영국 잔재 씻기 운동으로 멀리해왔다. 미얀마에 영향을 끼칠 외부 세력이 별로 없다. 냉전 중에도 미국도 소련도 편들지 않았다. 군부 통치 시절엔 오랫동안 쇄국 정책을 폈다. 그 결과 의학·과학·기술·산업 등 분야에서 1960년대 이후 새로운 지식이 유입되지 못했다. 갈 길이 먼 나라에 쿠데타까지 난 것이다. 미얀마를 민주와 군부 통치라는 두 가지 프리즘으로만 보면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를 범하기 쉽다.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도 골치를 앓을 수밖에 없다. 이건 중국도 마찬가지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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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의 서쪽 끝에 자리 잡은 이 나라는 1997년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의 회원국이 됐다.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태국 5개국이 1967년 아세안을 창설한 지 30년 만이다. 국토는 63만6578㎥로 한반도의 3배며, 아세안에선 인도네시아에 이어 둘째로 넓다. 인구는 2020년 5350만명(추정)으로 아세안에서 5위 규모다.
문제는 넓은 국토, 많은 인구, 쌀을 3~4모작 하는 자연환경, 석유·가스 천연자원, 황금 파고다를 비롯한 수많은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가난하다는 사실이다. 국제통화기금(IMF) 2020년 명목금액 기준 추정치로 국내총생산(GDP)는 717억 달러로 아세안에서 7위다. 이를 인구로 나눈 1인당 GDP는 1333달러로 아세안에서 가장 적다. 전 세계적으로도 최빈국이다. IMF가 통계를 낸 187개국 중 153위다. 노동력 분포는 농업 70%, 제조업 8%, 서비스업 22%다. 한마디로 가난한 농업국가 수준이다.
2018년 공식 수출액은 148억 달러로 천연가스·목재·석유제품·수산물에 쌀·콩 등 농산물, 옥·루비·사파이어 등 보석류가 대부분이다. 2017년 미얀마 상무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수출 상대국은 중국(42.1%)·태국(18.3%)·인도(7.9%)·일본(6.5%)·싱가포르(3.9%) 등이다. 하지만 보따리상인들이 국경을 맞댄 중국·태국·인도·방글라데시 등에 비공식적 개인무역으로 넘기는 목재·쌀·보석 등의 물량도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오랜 식민지배·군부통치 암투로 얼룩진 미얀마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전문가들은 오랜 군부 통치를 주 원인으로 꼽는다. 1962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가 2015년 민주 정부가 탄생할 때까지 53년에 걸쳐 권력을 장악하면서 보여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정책 실패, 무책임과 부패, 그리고 쇄국 정책에서 가난의 이유를 찾는다.
군부 통치의 시작은 1962년 쿠데타로 집권해 1988년까지 통치했던 독재자 네 윈(1910~2002년)에서 비롯한다. 네윈은 1930년에 결성된 미얀마의 반영조직인 ‘우리 버마 협회(도바마 아시아요네·주인이라는 의미의 타킨스라고도 부름)’의 회원이 됐다. 버마로 불렸던 미얀마는 1752년 이후 콘바웅 왕조에 의해 통일국가를 유지했으나 1824년 제1차 영국-버마 전쟁 후 일부가 영국 통치를 받기 시작했다. 미얀마는 그 뒤 60년 동안 영국과 2차례 더 전쟁을 벌였으나 모두 패배하고 영토를 조금씩 잃다가 1885년 왕조가 무너지고 전 국토가 영국 식민지가 됐다. 식민지 시대 미얀마는 영국 직할 식민지와 영국령 인도의 속령 사이를 오가며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타킨스에서 함께 활동한 인물이 미얀마 독립의 영웅이자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의 부친인 아웅산(1915~1947년), 미얀마 초대 총리를 지낸 우 누(1907~1995년) 등이 있다. 이 단체의 청년 회원 30명은 1941년 중국 남부 하이난(海南)섬에서 일본군으로부터 군사 훈련을 받으면서 ‘버마 독립군’을 결성했다. 오늘날 미얀마군의 전신이다. 이 청년들은 ’30인의 동지‘로 불리며 미얀마 독립 전후 핵심 세력이 됐다. 이들의 지도자가 바로 아웅산이었다. 아웅산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인 1946년 1월 ‘30인의 동지’가 주축이 된 ‘파시스트 인민자유 연맹(AFPFL)’을 창당하고 대표를 맡았으며 영국령 미얀마(당시는 버마)의 총리를 맡아 영국과 독립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독립 직전인 1947년 7월 의문의 폭탄 테러로 숨졌다.
1948년 1월 4일 ‘버마 연방’으로 독립한 미얀마는 아웅산의 동료인 우 누가 총리를 맡아 이끌었으며 AFPFL은 집권당이 됐다.
독립운동·내전진압 명분이 군부에 힘 실어줘
하지만 네 윈이 이끄는 군부는 1962년 쿠데타로 집권했으며 1964년 일당 독재를 시작하면서 집권당이던 연방당과 야당인 국민통합전선도 모두 사라졌다. 군부는 쿠데타 당시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명분으로 내걸었으며 범죄율이 오르는 상황에서 버마 사회의 법과 질서 회복을 위해 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군부는 국호인 ‘버마 연방’을 ‘버마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꿔 1988년까지 유지했다. 연방이란 용어가 소수민족에 지나치게 양보한 용어로 인식해 싫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소수민족의 무장투쟁 진압은 미얀마 군이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미얀마에서 군은 과거 식민지와 독립 운동 시절은 물론 건국 뒤에도 계속 상당한 힘과 국민 지지를 얻고 있었다. 가장 큰 이유가 독립 직후부터 벌어진 소수민족의 무장투쟁과 내전이다.
미얀마는 복잡한 나라다. 5300만 인구의 미얀마는 버마인(68%)·샨인(9%)·카렌인(7%)·라카인인(4%)·몬인(2%)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135개 민족·종족으로 이뤄진 다민족 국가다. 버마인과 카렌인은 중국티베트계 언어를 사용하고, 샨인은 타이계 언어를 몬인은 몬-크메르 계열의 언어를 사용한다. 특히 국경지대에 사는 집단은 별도 독립을 주장해왔다. 이 때문에 독립 직후부터 미얀마 내부에서 갈등과 분규, 그리고 무장 투쟁이 벌어져왔다.
중국과 접경한 북부 카친 주에서는 기독교도인 카친인들이 불교도가 대부분인 버마인과 종교 분쟁을 벌여왔다. 카치인들은 카친 독립군을 결성해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다. 카친 주 남쪽의 샨 주에서는 샨족이, 샨 주 남쪽으로 태국과 접경한 카에 주에서는 카레니인들이, 그 남쪽인 카인 주에서는 카렌인(카레니인과 다름)들이 각각 독립을 주장한다.
방글라데시·인도와 접경한 서부 라카인 주의 북부와 친주에서는 친인들이 중앙 정부에 대항한다. 1948년 독립 후 미얀마에서 내전으로 인한 사망자는 13만~25만명으로 추정한다. 주민 60만~100만명(추산)이 집을 잃고 떠돌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학살과 인권유린, 소년병, 인신매매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해왔다. 100만 명 난민을 양산한 미얀마 군과 정부의 무슬림 로힝야인에 대한 박해와 추방은 별도다.
미얀마는 소수민족의 저항에 대응하고 내란 평정과 치안 유지를 위해 독립 직후부터 많은 군사비를 지출하며 군을 키워왔다. 군에는 예산과 인재가 몰렸다. 이는 1962년 쿠데타의 한 원인을 제공했으며, 2015년까지 계속된 군부 통치의 물적 토대가 됐다.
사회주의 쇄국정책이 인권억압·경제파탄 초래
불교사회주의를 내세운 네 윈은 무슬림 로힝야인에 대한 탄압의 원조이기도 하다. 대다수 미얀마인과 달리 인도유럽계 무슬림(이슬람 신자)으로 서부 라카인 주에 거주하는 로힝야인은 미얀마의 135개 공식 소수민족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1982년 군부통치 시절 군부가 만든 국적법에서 국민 기준을 ‘영국 통치 이전부터 거주한 민족’으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군부는 이들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19세기 인도 동부 벵갈 지역에서 건너 온 이민자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이들을 국민에서 제외되고 추방해야 할 ‘식민 잔재’로 분류됐다.
하지만 로힝야족은 자신들이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의 토착민족이라고 주장한다. 군사정권 이전엔 선거에도 참가했음을 강조한다. 국경 넘어 방글라데시의 동남부 치타공과 콕스바자르 지역 주민과 언어가 70~80% 통한다. 방글라데시의 표준어인 벵갈어로는 의사소통이 어렵다. 군사정권은 1978년 ‘외국인’이라며 로힝야인 20만 명을 강제로 국경 너머 방글라데시로 밀어냈다. 1991~92년엔 25만 명 이상을 다시 쫓아냈다. 아웅산 수치가 실질적인 지도자가 된 2015년 다시 탄압과 추방을 재개해 인도주의 재앙이 벌어졌다. 군부 대신 민주화 주도 세력이 배타적인 민족주의 세력으로 변해 로힝야인 탄압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사회주의 아래에서 신음하던 미얀마 민중은 1988년 8월 8일 당시 수도 랑군(양곤) 등지에서 대학생·승려·시민이 100만 명 이상 참가해 군부 독재와 버마식 사회주의 실패, 부패, 경찰 폭력 등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군부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8888사건이 벌어졌다. 사망자는 300명에서 1만명까지로 추산된다.
미얀마 국부 아웅산의 딸 아웅산 수지는 2015년 총선에서 자신이 이끄는 국민민주동맹(NLD)이 승리하면서 외교부 장관을 맡았으며 국가고문이라는 자리를 만들어 사실상 최고 지도자 역할을 해왔다. 가족이 외국인이면 대통령을 할 수 없다는 헌법 규정(민족주의를 앞세운 군부가 만들었다) 때문에 만든 편법 권력이다. 이를 통해 1962년 네 윈의 군사쿠데타 후 53년 간 이어졌던 군부 지배는 끝났지만 군은 여전히 세력을 유지했다. 군사 정권 당시 제정한 헌법에 따라 군부는 선거와 무관하게 상·하원 의석의 25%를 할당받는 것은 물론 내무·국방·국경경비 등 3개 안보·치안 부처의 수장도 맡는다.
주목할 점은 쿠데타 직전 수지의 권력이 절정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NLD는 지난해 11월 8일 치른 총선에서 83%를 득표해 하원 의석 440석 가운데 315석, 상원에선 224석 중 161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다. 군부와의 권력 균형을 깨고 민간 정부가 이를 누를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자 군은 선거 직후부터 유권자 수 3700만 명을 기재한 유권자 명부가 실제와 860만 명이 차이가 난다며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다 급기야 쿠데타를 일으켰다.
민선 정부 세력 커지자 정권 수탈에 나선 군부
미국은 2012년 11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론 처음으로 미얀마를 방문해 정치 개혁 중이던 군부에 민주선거를 통해 민간 정부에 권력을 이양하도록 설득했다. 2017년 11월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얀마를 방문해 미사를 집전하고 지도자들을 만났다.
미얀마는 1948년 독립 후 독립이나 자치 확대, 연방제 등을 주장하는 소수민족의 무장 투쟁이 지금까지 계속돼 왔다. 종교 갈등 등도 존재한다.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영국과는 영연방에도 가입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영국 잔재 씻기 운동으로 멀리해왔다. 미얀마에 영향을 끼칠 외부 세력이 별로 없다. 냉전 중에도 미국도 소련도 편들지 않았다. 군부 통치 시절엔 오랫동안 쇄국 정책을 폈다. 그 결과 의학·과학·기술·산업 등 분야에서 1960년대 이후 새로운 지식이 유입되지 못했다. 갈 길이 먼 나라에 쿠데타까지 난 것이다. 미얀마를 민주와 군부 통치라는 두 가지 프리즘으로만 보면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를 범하기 쉽다.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도 골치를 앓을 수밖에 없다. 이건 중국도 마찬가지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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