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출신 김만일, 군마 헌납으로 ‘사업보국’ 실천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⑨]
위기 때마다 조정에 자발적 군마 헌납
대대로 ‘산마감목관 세습’ 이권도 확보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 가면 김만일(金萬鎰, 1550~1632)이라는 인물의 묘가 있다. 그의 묘비에는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숭정대부는 종1품 품계이고, 동지중추부사는 종2품, 오위도총부 도총관은 정2품이다. 실제로 직무 활동은 하지 않은 명예직이었지만 요즘으로 말하면 장관급에 해당한다. 그야말로 최고위직에 올랐던 것이다.
개국공신 김인찬의 후손…위기 때마다 군마 기부
김만일은 대규모 말 목장을 경영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는데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명나라의 영락제가 조선에서 진상한 제주마를 ‘천마(天馬)’라고 불렀을 정도로 제주마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조정에서 말을 징수해 가는 양이 막대했다. 숙종 때 제주목사 이형상이 올린 장계를 보면, 국영 목장의 경우 말 사육자 한 사람당 연 10필의 말을 거둬갔다(민영 목장에서도 말을 세금으로 받았다).
말이 죽으면 그 값에 해당하는 책임을 물었으니 이를 충당하기 위해 가족을 노비로 파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또한, 관리와 아전들이 말을 빼앗아 착복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육지로 가져가면 매우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으니 한 몫 단단히 챙기자는 속셈이었다.
상황이 이와 같으니 김만일 역시 말 목장을 운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나 애로가 되었던 것은 말을 수탈하다 못해 종마로 쓸 암말까지 빼앗아 가는 것이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이건이 제주도 유배시절에 지은 [제주풍토기]를 보면, 김만일은 우수한 종마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그 눈에 상처를 내어 앞을 못 보게 만들거나, 가죽과 귀에 상처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의 사업을 지키기 위한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이에 김만일은 승부수를 던진다. 조정에 말을 자발적으로 헌납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만일이 처음 말을 바친 것은 1594년(선조 27) 임진왜란의 와중이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군마가 절실하게 필요했는데, 제주도의 사영(私營) 말 목장 주인들이 말을 모아 바쳤고, 김만일도 말 2백 필을 내놓았다. 다만, 이때는 국가적 위기 상황으로, 조정에서 직간접적으로 요청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한데, 김만일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말 헌납을 계속했다. 1600년, 전후 복구 및 구휼사업 진행에 쓰라며 말 5백 필을 자진하여 내놓았다. 1620년(광해군 12) 조정에서 명나라에 조공할 말 2백 필을 요청했을 때도 오히려 3백 필을 더해 5백 필을 헌납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1627년 정묘호란 직후 김만일은 다시 말 5백 필을 바쳤다.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나라에서 꼭 필요로 하는 말을 자발적으로 기부해주니, 조정으로서도 김만일에게 부채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김만일에게 계속 벼슬을 내려주었는데 종국에는 명예직이기는 하나 재상의 지위인 종1품 숭정대부에까지 오르게 된다(지중추부사에 임명됐을 때는 짧지만 실제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의 아들은 고을 수령에, 손자는 변장(邊將)에 제수됐다. 자손 대대로 종 6품 산마감목관(山馬監牧官)의 벼슬을 맡는 특혜도 주어졌다. 제주도를 지배하는 제주목사가 정3품, 김만일의 거주지인 정의현(의귀리)의 현감이 종6품이니, 제주도에서는 김만일과 김만일 집안을 감히(?) 건드릴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됐다.
종마 보존에 필사적…조정 헌납으로 강력한 보호막
김만일은 말의 번식량을 늘리고 우수한 종마를 보존하기 위해 암말을 지키는 데 필사적이었다. 앞서 일부러 말의 눈을 멀게 만들기도 했다고 소개한 바 있다. 조정에서도 이러한 김만일의 취지를 이해하고 암말의 제주도 밖 유출을 금지하였는데, 이때 양시헌이 암말의 징발을 요구하고 김만일이 이에 따르지 않자 형벌을 가한 것이다. 하급 관료인 양시헌이 조정의 명을 어긴 것도 문제지만 자기 마음대로 2품계의 김만일에게 형을 가했으니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묘호란이 끝난 뒤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전후 복구와 국방력 강화를 위해 말이 필요했던 조정은 김만일로부터 말 1천 필을 징발하고자 했다. 그러자 인조가 너무 많다며 절반을 줄이라고 지시한다. 비변사에서 “김만일의 말이 무려 1만 필이나 되는데, 이 나라에서 태어나 나라 땅에서 나는 풀을 먹으며 자라났으니 모두 국가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10분의 9를 가져다 사용해도 불가한 것이 없는데 하물며 만에서 천을 취하는 것이 문제이겠습니까?”라고 하였지만, 인조는 듣지 않았다. (김만일은 이때 말 5백 필을 무료로 헌납한다.)
생각해보라.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나라에서 필요한 물품을 자진해서 기부한 사람이 있다. 대가를 받고 판매할 때도 이윤을 남기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지만, 기꺼이 포기했다. 어디 그뿐인가? 손해를 감수하고 나라에서 요청한 양보다 항상 더 많은 양을 내놓았다. 조정으로서는 당연히 고마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최상의 예우를 다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는 것은 당연히 말도 안 된다.
기부자가 홀대받는 사회에선 더 이상의 기부를 찾아보기 힘들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김만일에게 손해이기만 했을까? 물론 김만일에게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숭고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동시에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관리들의 수탈에서 벗어나고, 핵심 사업을 보존하기 위해, 헌납을 통해 강력한 보호막을 얻은 것이다. 대대로 산마감목관을 세습하는 큰 이권까지 얻었으니, 단기적인 손해로 장기적인 이익을, 좋은 일로써 좋은 결과를 얻은 사례라 할 수 있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공인호 기자 kong.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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