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석영 가문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 (25)]
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 여섯 형제
서전서숙·신흥무관학교 설립해 인재 양성
조국 독립 위해 재산 탕진, 가문 희생해
‘명문가(名門家) [명사]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가 높고 학식과 덕망을 갖춘 훌륭한 집안.’ 명문가의 사전적 의미다. 조선은 수많은 명문가를 배출했다. 그런데 흔히 명문가의 기준을 사회적 지위에 두는 경우가 많다. 장원급제자를 몇 명 배출했다든지, 삼대가 정승을 지냈다든지, 대제학이 연이어 나왔다든지 하는 것으로써 명문가 여부를 판정한다.
학식과 덕망도 중요한 기준이어야 하지만 객관화가 힘든 탓인지 의례적인 수사에 그친다. 그러다 보니 명문가라 불리더라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한데 여기 사회적 지위, 학식과 덕망을 고루 갖춘 집안이 있다. 고결한 마음으로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일가가 있다. 명문가다운 명문가이자, 조선 부자의 품격을 보여준 이석영(李石榮, 1855~1934) 가문이다.
이석영이란 이름은 낯설게 들리겠지만 독립운동가 이회영(李會英, 1867~1932),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1868~1953)의 형이라고 하면, “아~!”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 여섯 형제가 막대한 재산을 정리해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불리는 이 여섯 형제는 가장 유명한 인물인 넷째를 따라 흔히 ‘우당 이회영 일가’라 불려왔다. 그 호칭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다 보니 다른 형제들은 묻혀버린 감이 없지 않았다. 특히, 가장 많은 재산을 독립운동에 희사했던 이석영의 이름을 아는 이는 드물다(예컨대 여섯 형제가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한 토지 267만 평 중 약 95%가 이석영의 소유였다). 이번 화에서는 바로 이석영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석영은 조선 선조 때의 명재상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다. 이항복의 현손 이태좌가 좌의정을 역임했고, 이태좌의 아들 이종성이 영의정을 지냈는데, 이종성의 현손이 이석영의 아버지 이유승이다. 이유승도 형조판서와 우찬성 등 최고위급 관직을 거쳤으니 그야말로 조선에서 손꼽히는 가문이라 할 수 있다.
나라가 도탄에 빠지자 관직 버리고 교육기관 설립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데, 이석영이 이유원의 양자가 되면서 이를 상속받게 된 것이다. 이후 이석영은 문과에 급제하고, 종 2품 당상관에까지 올랐다. 사간원 정언과 홍문관 수찬 같은 청요직(淸要職)이나 과거시험의 시관(試官)을 맡은 것을 볼 때 학문도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라가 혼란에 빠지면서 이석영은 관직을 사임하고 더는 출사하지 않았다. 정3품 통정대부를 제수받은 친형 이건영, 대한제국 외부(外部)의 교섭국장을 지낸 친동생 이시영도 비슷한 시기에 벼슬에서 물러났다(막내 이호영은 아직 어렸고, 이회영과 이철영은 벼슬길 자체를 마다하고 있었다). 이들 여섯 형제는 이석영의 집에서 자주 회합하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는데, 주로 넷째 이회영이 논의를 주도했다고 한다.
이회영은 이동녕, 양기탁, 안창호 등과 조선 백성의 민족의식과 자립역량 강화를 제창한 ‘신민회’를 조직하였고, 이상설과 함께 만주 용정에 민족 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해 서간도를 직접 답사하기도 했다. 이런 이회영을 지지하고 자금을 대준 것이 이석영이었다. 생부인 이유승도 가산이 넉넉한 편이었지만, 조선의 대표적인 거부로 꼽혔던 양부 이유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여섯 형제의 활동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한 것은 사실상 이석원이 도맡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던 1910년 8월,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이 강제로 병탄되자, 이회영의 권유에 따라 여섯 형제는 50여 명의 일가권속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이때 급히 가산을 정리하여 40여만 원의 자금을 모았는데, 이석영의 재산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40만 원은 오늘날로 환산하면 약 600억 원에 이르는 돈이라고 한다. 환산 기준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2조 원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가세 기울어도 사재 털어 조국 독립 활동에 헌신
특히 이석영은 신흥무관학교의 설립 비용뿐 아니라 운영경비까지 모두 감당했다. 수익이라고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 곳에서 계속 자금을 투입해야 했으니, 이석영의 그 많던 재산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이 나고 만다. 이후 일제의 만주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신흥무관학교가 문을 닫고 여섯 형제는 뿔뿔이 흩어져 중국 각지를 떠돌아야 했는데, 1925년 셋째 이철영이 빈곤과 풍토병에 시달리다가 눈을 감았고, 1931년 막내 이호영이 실종되었으며, 1932년 넷째 이회영이 다롄 감옥에서 일제의 모진 고문 끝에 순국했다. 그리고 이석영은 1934년 빈민가에서 아사(餓死)하고 만다(첫째 이건영은 1940년 병으로 사망했고, 다섯째 이시영만이 살아서 해방을 맞았다).
1936년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한국국민당의 기관지 〈한민〉의 기사를 보자. 현대어로 바꿔 소개한다. “그는 매우 많던 재산 전부를 가져다가 이주 동포들이 살아갈 방도를 세워주고 신흥학교를 경영하는 데 전부 탕진하고 말았다. 〈중략〉 나중에는 지극히 곤궁한 생활을 하면서도 조금도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았으며 태연히 장자(長者)의 풍도를 보여주었다. 말년에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고생하다가 상해의 어느 모퉁이에서 굶어 돌아가신 이가 그처럼 공이 많은 이석영 씨인 줄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되는가?
또 올해 5월 11일 상해의 조카 집에서 역시 가련한 신세로 돌아가신 이가 그의 가장을 따라와 독립군의 밥을 지어 먹이고 옷을 지어 입히던 이석영씨의 부인인 것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되는가?” 안타깝게도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재산을 조국 독립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던 이석영이란 부자가 존재했다는 것을, 대의를 위해 가문을 희생했고 그로 인해 온 가족이 모진 고통을 겪으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던 명문가가 있었다는 것을, 지금 아는 이가 몇이나 되는가?
부자가 되는 법을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부자로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준 이석영을 소개하며, ‘조선의 부자들’ 연재를 마친다.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김준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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