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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도 엔터도 ‘백기’…기업 떨게 하는 ‘그 이름’

[보폭 넓히는 행동주의펀드]①
한진그룹·은행지주·SM엔터 바꾼 행동주의펀드
KCGI·얼라인·트러스톤·안다·플래시라이트 등
‘기업사냥꾼’에서 ‘주주 변호인’ 인식 전환

한때 ‘기업 사냥꾼’으로 통하던 행동주의 펀드가 적극적인 주주 제안을 통해 주주들의 ‘변호인’으로 변모하고 있다. 사진은 뉴욕 월스트리트 일대 [게티이미지]
[이코노미스트 마켓in 허지은 기자] 3월 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행동주의 펀드(Activism Fund)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행동주의 펀드는 수익률에만 주력하던 기존 펀드의 관행에서 벗어나 기업 경영에 적극 개입한다. 자금력을 동원해 회사의 지분을 확보하고 회사의 해묵은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거나, 때로는 무능한 경영진을 몰아낸다. 한진그룹, SM엔터테인먼트, 7대 금융지주, KT&G 등 수많은 기업들이 행동주의 펀드의 압력에 환골탈태하고 있다. 

한때 ‘기업 사냥꾼’으로 통하던 행동주의 펀드의 이미지도 이제는 소액 주주를 대표하는 ‘변호인’으로 탈바꿈한 모습이다. 최대주주나 오너 일가에 밀려 발언권을 내기 어려운 소액 주주를 대신해 목소리를 내면서다. 행동주의 펀드가 개입한 기업의 주가가 급등하면서 소액 주주들 사이에선 행동주의 펀드의 ‘강림’을 기다리는 분위기도 커지고 있다. 일각에선 수익률을 최우선으로 삼는 펀드에게 주주 대변이란 그저 명분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외국계 헤지펀드 놀이터 된 2000년대 

행동주의 펀드는 2000년대 미국에서 본격화됐다. 엘리엇, 소버린, 헤르메스, 칼 아이칸 등 2000년대 국내에서 이름을 알린 행동주의 펀드도 외국계 헤지펀드였다. 이들은 초반엔 자본력이 약한 회사를 상대로 경영권 개입에 나섰으나 자본이 모이면서 대기업으로 눈을 돌렸다. 해외에선 제너럴일렉트릴(GE), 포드자동차, P&G, 유니레버(Unilever), 셸(Shell) 등이 표적이 됐고, 국내에서도 SK, 삼성, 현대차 등 대기업이 주된 목표물이 됐다. 

당시만 해도 행동주의 펀드는 ‘기업 사냥꾼’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국내에선 주주 행동주의가 익숙하지 않았던데다, 외국계 헤지펀드들이 지나치게 단기 시세 차익에만 집착했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경영에 참여하며 기업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이 아닌, 주가가 오르자마자 팔고 떠나는 ‘먹튀’ 성격이 강했다. 

2003년 SK를 공격한 영국계 헤지펀드 소버린자산운용은 SK 주식 14.49%를 확보하고 경영진을 압박했다. 이들은 SK가 출자전환을 통해 부실 계열사를 지원하고 있다며 최태원 회장과 손길승 회장, 김창근 사장 등 경영진 퇴진을 요구했다. 당시 SK는 백기사(우호세력)는 물론 고등학교·대학교 동문까지 총 동원해 경영권 방어에 1조원 가량을 쏟아부었다. 그 사이 소버린은 주가가 오르자 주식 전량을 매각해 9000억원의 차익을 남기고 떠났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반대한 엘리엇도 사정은 비슷했다. 당시 엘리엇은 주식 매집 과정에서 5% 공시의무를 회피할 목적으로 총수익스왑(TRS)이라는 파생금융상품을 활용했는데, 5% 이상 지분을 확보해 공시를 해야했음에도 이를 위반한 혐의로 금융당국에 의해 검찰에 고발되기도 했다. 1999년 SK텔레콤을 공격한 미국계 헤지펀드 타이거펀드를 비롯해 2004년 삼성물산(헤르메스), 2005년 KT&G(칼 아이칸), 2015년 삼성물산·2016년 삼성전자·2018년 현대차(엘리엇) 등도 사실상 투기 자본의 단기 시세차익 추구로 일단락됐다. 

2006년 최초의 토종 행동주의 펀드로 라자드자산운용의 한국지배구조개선펀드, 일명 ‘장하성 펀드’가 등장했지만 이같은 분위기를 바꾸진 못 했다. 장하성 펀드는 외국계 헤지펀드와 달리 소액 주주 권익 보호, 지배구조 개선 등에 힘썼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2012년 자금력 부족으로 보유 주식을 모두 유동화하고 결국 청산되고 말았다. 

토종 행동주의 펀드의 서막

부정적 이미지의 변화 기류가 포착된 건 2018년이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으로 행동주의 펀드의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다. 스튜어드십 코드란 연기금·보험사·자산운용사 등 기관 투자자가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에 적극적인 참여를 권고한 모범 규준이다. 그간 기관의 소극적인 의결권 행사가 국내 증시의 ‘코리아 디스카운트(저평가)’를 불러왔다는 지적을 컸고 이를 해결하고자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됐다. 이후 강성부 대표가 이끄는 KCGI 설립을 필두로 토종 행동주의 펀드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KCGI(Korea Corporate Governance Improvement)는 대우증권(현 미래에셋증권), 동양증권(현 유안타증권), 신한투자증권 등을 거친 강성부 대표가 만든 행동주의 사모펀드다. 문자 그대로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을 목표로 내걸었다. 2018년 11월 한진칼 지분을 매입한 후 한진그룹 지배구조 개선을 촉구하며 이름을 알렸다. 

당시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조현민 한진 사장의 ‘물컵 갑질’ 등 한진그룹 오너 일가의 부적절한 행동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던 만큼 KCGI의 행보는 더욱 주목받았다. 2018년 첫 지분 취득 이후 KCGI는 그레이스·엠마·헬레나·디니즈홀딩스 등 8개 특수목적법인(SPC)을 통해 2021년 말까지 한진칼 지분을 17.41%로 늘렸다. 

2020년 KCGI는 반도건설, 조 전 부사장과 ‘3자 연합’을 결성해 한진그룹을 압박했고, 2022년 2월까지 정관변경, 사외이사 후보 선임 등의 주주 제안을 한 뒤 같은해 3월 보유지분을 매각하며 엑시트에 성공했다. 당시 KCGI는 “한진그룹이 아시아나항공 인수 등 장기 성장을 위한 도약대에 올라섰다고 판단해 투자금 회수를 위한 여건이 성립됐다고 판단했다”며 “3년반동안 한진그룹의 지배구조 및 재무구조 개선을 통해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 힘써왔다”고 밝혔다. 

KCGI는 DL그룹의 지배구조 개선에도 목소리를 높였다. 2019년 9월 대림코퍼레이션 지분 32.6%를 확보하며 2대 주주로 올라선 KCGI는 DL에 대해 “낮은 배당 성향과 수익률로 주주 이익 환원에 소홀히 하고 있다”며 “그룹 내 잔존하는 경영 비효율성을 개선하고 투명한 기업문화를 정착시켜 지배구조 개선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후 KB자산운용, 얼라인파트너스, 트러스톤자산운용, 플래쉬라이트캐피탈파트너스(FCP), 안다자산운용 등 토종 행동주의 펀드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019년 KB자산운용이 SM엔터테인먼트에 요구했던 이수만 총괄 개인회사 라이크기획 관련 문제는 지난해 얼라인파트너스가 조기 계약 종료를 이끌어내며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었다. 트러스톤은 태광산업의 흥국생명 유상증자 참여 철회를 끌어냈고, FCP와 안다자산운용은 KT&G에 한국인삼공사의 분리 상장을 촉구하고 있다.

행동주의 펀드의 개입은 곧 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KCGI의 경영권 개입 선언 이후 한진칼 주가는 2020년 한 해동안 3만9950원에서 6만3100원으로 57.95% 뛰었다. 얼라인의 타깃이 된 SM엔터테인먼트(15.29%), JB금융지주(21.73%), 우리금융지주(13.78%), DGB금융지주(15.41%), KB금융지주(20.59%), 신한지주(23.76%), 하나금융지주(20.59%), BNK금융지주(12.78%) 등도 올해 들어 10~20%대 상승률을 보였다.

“이익 추구할 뿐vs기업·주주 모두 윈윈”

국내 자본시장에서 행동주의 펀드의 성공 사례가 늘고 있지만 평가는 아직까지 엇갈린다. 단기 이익만 추구하는 기업 사냥꾼에서 주주 가치 변호인으로 이미지가 개선된 건 사실이지만, 수익성을 최대 가치로 삼는 사모펀드의 본질을 고려하면 사실상 명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행동주의 펀드들이 소수 지분으로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지적도 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헤지펀드 행동주의가 주주와 경영진 간의 대리비용을 줄여주고 주주가치를 높인다는 견해가 많이 있지만, 일단 헤지펀드들의 단기 실적주의는 세계 공통적인 현상”이라며 “단기간의 투자 자본 회수를 원하는 헤지펀드의 공격으로 기업들이 연구개발(R&D) 분야 비용지출을 줄이고, 배당과 자사주 매입을 늘린 반면 시설 투자와 고용마저 줄이는 사례도 있다”고 짚었다. 

최 교수는 “행동주의 펀드의 개입은 단기적 주가 상승을 부르지만 이러한 이익은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회사의 성장과 가치창조를 희생한 대가”라며 “진정한 기업가치의 상승이 아니라 회사 매각, 추가 배당, 자회사 매각, 고용 감소, 자본 지출과 연구개발 투자의 감축 등을 통해 결국 회사는 장기적 실적 감소와 직원의 사기 저하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선구자 격인 미국·유럽에선 행동주의 펀드의 실패 사례도 늘어나는 추세다. 맥도날드, 해즈브로(Hasbro), 셰브론, 엑손모빌이 대표적이다. 맥도날드는 지난해 칼 아이칸으로부터 동물 복지를 이유로 이사진 교체를 요구받았지만 기존 이사진 12명을 재선임하는 데 성공했다. 장난감 기업 해스브로는 지분 2.5%를 보유한 행동주의 펀드 알타 폭스(Alta Fox)의 회사 분할 요구, 이사진 교체 등을 요구 받았지만 주총 대결에서 승기를 잡았다. 셰브론과 엑손모빌 주주들도 행동주의 펀드의 제안을 부결시켰다. 국내 금융지주 계열 자산운용사들의 경우 모회사의 입김에 적극적인 주주 제안에 나서기 어려울 거란 한계도 제기된다. 

이에 대해 행동주의 펀드들은 적극적인 주주 개입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이끌어올 수 있다고 설명한다. 질적인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주주 이익을 제고하면 기업의 자금 조달이 쉬워지면서 결국 기업과 주주 모두 ‘윈윈(win-win)’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창환 얼라인파트너스 대표는 “우리나라는 구조적으로 주가가 저평가된 기업이 많다. 주주제안은 주주와 국가, 사회가 모두 좋은 윈윈 정책”이라고 설명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면서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펀드평가사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ESG 우수 기업에 투자하는 사회책임투자(SRI) 펀드엔 올해 들어 지난 19일까지 3200억원이 넘는 뭉칫돈이 유입됐다. 작년 인기를 끌었던 금펀드에 같은 기간 164억원이 유입된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 규모다. 주주 행동주의와 ESG 경영이 화두가 되면서 유입 자금이 늘어나고 있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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