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공간에 우리를 넣으려는 애플 비전, 지킬 수 있는 약속일까? [한세희 테크&라이프]
‘생성 AI’만큼이나 뜨거웠지만…대중화 갈 길 먼 메타버스 공략
애플의 공간 컴퓨팅 기기 ‘비전 프로’…450만원 가치 전달 ‘관건’
[한세희 IT 칼럼니스트] 약 2년 전, 메타버스는 요즘의 생성 인공지능(Generative AI) 못지않은 업계 화두였다. 페이스북은 회사 이름을 ‘메타’로 바꾸었고, 마크 저커버그 최고경영자(CEO)는 “5년 후 페이스북은 소셜미디어가 아니라 메타버스 기업으로 간주될 것”이라는 말도 했다.
메타버스는 3차원(3D) 몰입형 가상현실(VR)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메타버스를 설명할 때는 보통 메타버스라는 용어가 처음 나온 닐 스티븐슨의 소설 ‘스노 크래시’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을 예로 들며 특수한 고글을 쓰고 3D 가상현실에 들어가는 경험을 제시하곤 했다.
VR의 아이폰 모멘트가 필요해
별도 헤드셋을 이용해 디지털 공간에 완전히 몰입되는 VR 또는 현실의 공간에 디지털 정보를 띄우는 증강현실(AR) 등은 2010년 전후로 꾸준히 성장했고, 메타버스 붐과 함께 다시 한번 도약의 계기를 맞았다. 진작부터 VR을 차세대 컴퓨팅 환경으로 주목하던 페이스북은 2014년 VR 기기 개발사 오큘러스를 인수했고, 이후 쌓아 온 VR 기기 기술과 VR 기반 소셜미디어 서비스, 다양한 인터페이스 조작 기술 등은 ‘메타버스 기업’ 선언의 기반이 됐다.
여기에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한 암호화폐와 대체불가토큰(NFT)을 게임과 경제 활동에 응용한 ‘돈 버는 게임’(P2E), 크리에이터 이코노미 등 테크 분야의 주요 테마들이 코로나19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메타버스에 결합했다.
이 모든 호재와 시장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메타버스 또는 VR 분야는 대중화를 위한 마지막 도약의 한 걸음을 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 업계에도 ‘아이폰 모멘트’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공공연히 나왔다. 개인용 디지털단말기(PDA)부터 블랙베리까지 수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시장을 만들어 내지 못하던 스마트폰 분야가 애플 아이폰의 등장과 함께 대폭발을 일으킨 것처럼 메타버스나 VR에서도 불꽃을 일으킬 제품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애플이 2015년부터 가상현실 기기를 개발 중이라는 소문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애플 비전 프로, 메타버스? 공간 컴퓨팅?
그리고 드디어 지난 5일(현지시간) 애플은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 본사에서 열린 자사 개발자 행사 WWDC에서 헤드셋 형태의 새로운 ‘공간 컴퓨팅’ 기기 ‘비전 프로’를 공개했다. 비전 프로 사용자는 더 생생하게 디지털 공간에서 업무를 하거나 페이스타임 영상통화를 하고, 디즈니플러스의 영화를 볼 수 있다. 현실과 디지털 공간의 노출 정도를 조정할 수도 있다.
업계에서 쓰는 용어를 빌리자면, VR이나 AR 등을 포괄하는 혼합현실(MR) 헤드셋 기기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날 제품 소개에 ‘메타버스’나 ‘VR’ 같은 말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증강현실을 위한 기기라는 언급은 있었다. 애플이 그간 메타버스에 거리를 두는 입장이었고, 팀 쿡 애플 CEO는 AR이 중요한 기술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간간이 인터뷰 등을 통해 드러낸 것과 부합한다.
대신 애플이 선택한 용어는 ‘공간 컴퓨팅’(Spatial Computing)이다. 애플이 새로 만든 용어는 아니고, 디지털 공간 속에 몰입된 상황에서 자연스러우면서도 풍성한 경험을 하게 하는 기술과 서비스를 가리키는 말로 최근 쓰임새가 늘어왔다. 현재의 디지털 기술이 디지털 세상이 표현된 스크린을 사용자가 바라보는 것이라면, 공간 컴퓨팅은 사용자가 스크린 안 디지털 공간에 들어가 있는 듯한 환경을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VR이나 AR, 몰입 환경 등 메타버스에 결부된 사용자 경험이나 기술·서비스 등을 포괄할 수 있다.
공간 컴퓨팅은 컴퓨팅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 쿡 CEO는 WWDC에서 “맥이 개인용 컴퓨터, 아이폰이 모바일 컴퓨팅의 시대를 열었던 것처럼 비전 프로는 우리에게 공간 컴퓨팅을 선보인다”라고 말했다. 책상 위에 놓인 개인용 컴퓨터는 사람들이 디지털 세계를 접할 수 있는 문을 열었고, 항상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은 디지털 세상과 현실 세계를 연결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공간 컴퓨팅을 통해 디지털 세상 ‘속’에 현실 세계를 옮겨 놓고 활동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애플의 비전, 지킬 수 있는 약속일까?
이렇게 보면 표현만 다를 뿐 기존 메타버스나 VR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이런 용어를 쓰지 않은 것은 애플이 시장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적인 생태계를 구축하고 싶거나, VR처럼 외부와 차단된 완전한 몰입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개발팀은 본래 완전한 몰입형 VR 기기를 만들고 싶었으나, 애플의 디자인 책임자였던 조니 아이브가 반대해 사용자가 주변 환경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바뀌었다는 외신 보도가 작년에 나왔다. 이번에 나온 비전 프로는 실제로 다른 사람이 근처에 오면 사용자가 보는 디스플레이에 그의 모습이 보이고, 외부를 향한 디스플레이의 밝기가 변하면서 사용자의 눈이 나타나 다른 사람과 마주칠 수 있게 하는 등 단절 문제를 줄이는데 많은 신경을 썼다.
메타버스와 VR을 경계하는,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가장 ‘쿨’해 보이는 비전 프로가 VR의 아이폰 모멘트를 만들 수 있을까? 컨트롤러 없이 눈동자 움직임만으로 조작할 수 있고, 눈 깜빡이는 속도보다 8배 빠른 12밀리초의 속도로 영상을 처리해 멀미 현상을 방지하며, 4K 디스플레이보다 많은 2300만 픽셀의 마이크로OLED 패널을 갖춘 비전 프로는 우리를 실제로 디지털 세상 안에 무리 없이 집어넣을 첫 기기가 될지도 모른다.
사실 블록버스터 게임 등 일부 엔터테인먼트를 제외하고, 완전한 3D 몰입이 디지털 세계와 현실을 잇는 경험의 궁극적 목적이 될 이유는 없다. 비전 프로가 맥과 아이폰, 앱스토어 등과의 연동을 통해 현실과 디지털 세상을 이은 증강된 현실에 발을 디딜 이유를 보여준다면, 이는 메타버스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애플의 생태계 주도권을 극복할 방법을 그때 찾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물론 그에 앞서 그 경험이 과연 3499달러, 우리 돈 450만원의 가치가 있는지가 관건일 것이다. 행사에서 제품은 공개됐지만, 실제 체험은 허용되지 않았다. 내년 초 판매에 들어갈 비전 프로가 오늘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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