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부진에 악재 덮친 증권사…“상위권 장수 CEO들 떠난다”
[흔들리는 여의도]①
고금리 장기화 업황 악화에 따른 실적 부진
주가 조작, 부동산 투자 부실 등 사건·사고에 ‘쇄신’
[이코노미스트 마켓in 이승훈 기자] 여의도 증권가에 최고경영자(CEO) 세대교체 칼바람이 불고 있다. 이미 상위권 증권사를 중심으로 업계 최장수 CEO를 비롯해 대거 세대교체 바람이 불었다. 고금리 장기화로 인한 업황 악화뿐 아니라 주가조작, 부동산 투자 부실 등 올 한해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으면서 책임론이 부각된 것으로 보인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최근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대표이사 회장, 최희문 메리츠증권 대표이사 부회장, 정일문 한국투자증권 대표이사 사장, 황현순 키움증권 대표이사 사장 등이 대거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세대교체 신호탄을 쏘아 올린 곳은 미래에셋증권이다. 미래에셋증권의 창림 멤버이자 지난 2016년 말부터 대표이사직을 유지했던 최현만 회장이 자리에서 지난달 물러났다. 대신 김미섭 부회장이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업계 최초 전문 경영인 시대를 열었던 최 회장은 일선에서 물러나 경영 고문직을 맡는다고 밝혔다. 1997년 창업 후 26년 만의 세대교체다. 최 회장은 자본금 100억원의 벤처캐피탈로 출발한 미래에셋그룹을 26년만에 자기자본 11조원의 국내 1위 금융투자회사로 성장을 이끈 대표적인 창업 공신이다.
하지만 올해 미래에셋증권의 실적은 부진한 모습이다. 해외 부동산 투자 손실의 직겨탄을 맞아서다. 지난 2020년 국내 증권업계 최초로 영업이익 1조원에 올랐던 미래에셋증권은 올 3분기까지 영업이익이 6114억원으로 전년 대비 19% 줄었다.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26년 전 창업 이후 지금까지 가장 큰 고민이 세대교체다”며 “인간적 번민과 아쉬움을 뒤로하고 향후 10년 이상을 준비하는 전문 경영체제를 출발시키기로 했다”고 말했다.
메리츠금융그룹 이사회는 이달 20일 정기임원인사를 통해 최희문 부회장을 지주 그룹운용부문장으로 선임했다. 차기 대표이사로는 장원재 세일즈앤트레이딩(S&T) 부문장이 내정됐다.
최 부회장은 증권업계의 대표적인 장기 CEO다. 메리츠증권과 메리츠종금이 합병되던 해인 2010년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으며 지난해 4연임에 성공했다. 최 부회장은 지난해까지 6년 연속 사상 최대 실적으로 메리츠증권을 이끌어 왔다.
하지만 올해 메리츠증권과 관련한 사고가 잇따르자 책임론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메리츠증권은 이화전기 거래정지 직전 주식을 대거 매도하면서 내부정보를 활용해 손실을 피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기업금융(IB) 임직원들이 업무상 취득한 정보로 수십억의 사적 이득을 취했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지난해 유일하게 영업이익 1조원을 달성했던 메리츠증권의 올해 실적은 뒷걸음질 쳤다. 메리츠증권의 올해 3분기 누적 영업이익이 6048억원에 그쳐 26% 감소했다. 메리츠증권은 기업금융(IB)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비중이 높았지만 고금리 장기화와 부동산 시장 침체로 부진한 실적을 기록했다.
안정보다는 ‘변화’…젊은 전문 경영인 세대교체
한국투자증권도 최근 변화를 택했다. 5연임(임기 1년)에 성공한 정일문 사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게 됐다. 정일문 사장은 3분기까지 높은 실적으로 회사를 이끌었지만 부동산 PF 신용공여 규모가 크다는 점이 연임에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금융지주는 이달 23일 이사회를 열고 정 사장을 증권 부회장, 김성환 한국투자증권 개인고객그룹장(부사장)을 신임 사장으로 발탁했다. 한국투자증권은 경영성과의 안정성과 연속성을 이어가면서도 금융환경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성장전략의 변화를 모색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한국투자금융그룹 관계자는 “이번 인사는 내외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직면하고 있는 불확실성 보다는 변화의 장기적 흐름과 방향성에 주목하여 한 걸음 더 성장하는 데 역점을 뒀다”고 말했다.
‘라덕연 사태’와 영풍제지 등 두 차례 주가조작 사건에 휘말린 키움증권도 결국 수장을 교체한다. 키움증권은 이달 28일 임시 이사회를 열고 황현순 대표이사 사장의 사임을 결정했다. 이어 차기 대표이사 사장으로 엄주성 전략기획본부장 부사장을 내정했다. 황 사장은 올해 3월 정기주총에서 연임돼 임기가 2026년 3월까지 2년 이상 남았지만 채우지 못하게 됐다.
지난 2000년 키움증권 창립때 합류한 황 사장은 지난해 증권업황 부진에도 키움증권의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린 데 이어 실적 방어에도 성공하면서 연임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달 초 황 사장은 영풍제지 미수금 사태에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며 자진 사의를 표명했다.
키움증권이 영풍제지 미수금 사태로 떠안아야 할 손실은 4333억원으로, 상반기 지배주주 순이익(4248억원)을 뛰어넘는다. 키움증권은 이번 영풍제지 하한가 사태에 따른 손실액을 4분기 실적에 반영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키움증권은 4분기 적자 전환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앞서 키움증권은 지난 4월 차액결제거래(CFD)를 악용한 라덕연 사태에 연루되며 사회적 물의를 빚은 바 있다. 김익래 전 다우키움그룹 회장은 SG증권발 '무더기 하한가' 사태가 발생하기 직전인 지난 4월 20일 다우데이타 주식 140만주(3.56%)를 블록딜(시간외대량매매)로 팔아 주가조작 연루 의혹을 받았다. 이 사태로 키움증권은 초대형 IB로의 도약을 사실상 뒤로 미루게 됐다.
증권가에서는 이번 CEO 인사가 예년과 다르다는 분위기다. 유임이 가져오는 안정감보다 변화와 혁신을 택하는 세대교체를 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올드보이’들이 대거 물러나고 다변화되는 경영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전문가들로 새롭게 교체되고 있는 배경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최근 업계가 젊어지는 경향도 있다”며 “경기불확실성에 업계가 어려운 편이다보니 PF나 해외사업, 리스크 관리 등 각 분야에 전문가 분들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듯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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