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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없고 ‘남’만 가득한 멋진 세상 [이근면의 시사라떼]

권위가 해체된 시대…전문가에 대한 존중과 격하
사회 갈등 조정하려면…정당한 권위 필수

한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이근면 사람들연구소 이사장] 어느 틈엔가 우리 사회에 님이 사라졌다. 요즘 모든 보도의 블랙홀이 되다시피 한 의사들은 어지간하면 늘 의사 선생님으로 불렸지만 요즘엔 그저 돈만 밝히는 ‘의새’로 격하되어 저잣거리로 나뒹굴고 있다. 우리 같은 범인들의 정신과 마음을 보듬어 주고 신과 소통하도록 중보해 주는 종교인들은 이미 오래전에 ‘님’자를 박탈당했다. 스님과 목사님조차도 희화화되어 불린다. 한때 그림자도 밟지 못했던 학교 선생님들의 경우엔 호칭은 ‘선생님’으로 유지되고 있지만 일부 몰지각한 학부모들에 의해 자행되는 밑도 끝도 없는 하대와 멸시를 감내하며 교편을 위태롭게 붙들고 있다. 존경받는 교육자를 노동자라 칭한 것도 그들의 사회적 지위에 영향을 미쳤다. 

모두가 모든 면에서 똑같은 사회는 건강할까? 

한때 권위주의 타파가 시대정신인 적이 있었다. 3김의 시대가 저물고 밀레니엄과 2002 월드컵, 노무현의 시대가 열렸을 때 우리 사회는 숨 막힐 듯 내리누르는 온갖 권위주의의 때를 벗겨내기 위해 부단히도 애썼다. 그 덕에 평범한 민초들도 국회의원 앞에서 굽신거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할 말 하는 주인의식을 갖추게 됐고 ‘네까짓 게 어딜 감히’, ‘너 내가 누군 줄 알아’나 ‘어린놈이 싸가지 없게’와 같은 문장을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을 보기 어려운 세상이 왔다. 되레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정당한 업무 지시를 내리기 전 ‘이걸요? 제가요? 왜요?’라는 당돌한 되물음에 답할 준비를 해야 할 만큼 평등(?)한 세상이 열렸다. 성형도 출생지가 같아지는 동형 복제가 세속이다. 

전문가의 권위와 권위주의

넘실대는 온갖 경멸하는 명칭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뭐든 빠르고 많이 바뀌는 한국 사회가 권위주의 타파라는 목적지를 향해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정류장을 지나도 한참 지나쳤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한 사회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합당한 권위가 모두 해체됐기 때문이다. 특히 각 분야 전문가에 대한 격하가 매우 심각하다. 어떠한 사회적 현안에 대한 전문가의 판단이 모두 정파적 이해관계로 재단됨에 따라 사회의 건강한 갈등 조정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하긴 침대도 과학이니 과학도 해석하는 대로 진실이 정해지는 경우도 보아왔지 않은가. 예전엔 아이들끼리의 다툼은 선생님의 훈계로 정리가 되었지만 이젠 경찰이 출동해도 타협이 안 되고 재판을 거쳐 판사의 판결을 받아야만 하는 혼돈의 시대가 열렸다. 판사의 결정에 대한 인정과 수긍도 없다. 내 마음에 안 드는 판결을 한 판사는 네 편 판사, 무능한 판사, 적폐 판사일 따름이다.

깎아내리는 사회공동체 

님이 사라진 사회는 남만 가득한 사회로 메말라 가고 있다. 내 손에 작은 티끌 하나 묻히지 않겠다며 형형한 눈빛을 쏘아대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건 유능한 변호사가 아닌 쓴소리해 줄 어른과 정확한 진단을 내려줄 전문가에 대한 존중이다. 가장 한 편에 서 있는 문학도, 소설가도, 음악가도 매도당하긴 도긴개긴이다. 내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도 나와 마찬가지로 내 아이가 잘되길 바라며 바람직한 방법으로 지식과 지혜를 전수하는 유능한 전문가라는 인정이 있다면 선생님들을 향한 학부모들의 갑질과 이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교사들의 안타까운 뉴스는 없을 것이다. 내 앞에서 나를 진단하는 의사가 10 년 넘게 한 우물을 판 진단과 치료의 달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네이버와 유튜브에서 찾은 얕은 지식으로 의사의 판단을 폄하하고 맘카페에 병원을 비난하는 리뷰를 쓰진 못할 것이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 [사진 연합뉴스]

‘국개의원’ 아닌 ‘국회의원님’

‘님’을 잃어버린 분 중 이분들을 빼면 섭섭하다. 어쩌다 똑똑한 분들이 ‘국개’ 소리까지 듣게 된 건지 탄식이 나온다. 22대 국회의원 선거판도 끝났다. 결과는 우리 4년의 미래 지표다. 정치 과잉이라는 세태가 해소되고 우리를 도와주는 정치를 볼 수 있을까? 의료대란에 국회가 손 놓고 유불리를 따져 방관하던 모습을 본 터라 기대가 생기지 않으니 큰일이다. 과연 새로 구성된 국회는 우리의 내일을 살갑게 살피고 기업을 등 두드려 세계 전쟁에서 이기고 오라고 힘을 보태줘 국개의 불명예를 벗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희망 사항은 많지만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내일을 그리게 해주는 것만은 꼭 바라고 싶다. 권위 있는 국회, 존경받던 국회의 본모습을 다시 보는 꿈을 갖고 싶다. ‘국개의원’이 아닌 ‘국회의원님’은 모두의 바람이다. 

사회적 어른의 존재와 역할

한 번 무너진 권위는 여간해선 다시 쌓아 올리기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담론을 나누고 갈등을 조정하고 미래를 위한 선택을 해나가기 위해선 합당하고 정당한 권위가 필요하다. 구루가 없는 사회, 부정당하는 사회, 사회적 어른의 우대는 말로 만든 자화상 아닐까. 남을 바라보는 시각이 더 따뜻해지는 세상을 꿈꾸는 건 사치와 낭비인 걸까. 이제부터라도 사회 각 분야의 무너진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각자가 절제하고 성찰할 때다. 내 마음에 안 드는 전문가를 무능한 사람, 정파적으로 편향된 사람으로 손가락질하기보단 그의 깊이 있는 지식이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은 소리를 하는 어른들을 꼰대로 치부하기보단 그의 폭넓은 경험이 섣부른 판단을 막을 수 있는 브레이크가 될 수 있다고 받아들여 보자. 여든 살 먹은 할머니가 등에 업힌 손자 눈을 빌려 바늘귀를 꿰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과유불급이라 했다. 불필요한 권위가 넘쳐흘러 권위주의가 판치는 세상도, 모든 권위가 해체되어 혼란한 세상도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겐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옳고 그름조차 기준이 흔들리는 독특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대한민국 민초의 오늘과 아이들의 내일은 어디쯤 가게 될지 상상해 본다.


이근면 사람들연구소 이사장

필자는 1976년 삼성그룹에 입사 후 40여 년 동안 인사업무를 맡은 전문가다. 2014년 초대인사혁신처장으로 국가의 인사혁신을 주도했다. 현재 성균관대 특임교수와 사람들연구소 이사장으로 미래세대를 위한 정책제언 및 연구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국가인재경영연구원 자문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일자리연대·연금연구회 등에서 고문으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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