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과 금주령[전형일의 세상만사]
조선시대부터 통치 행위 핵심이던 ‘술’
국가 지도자 과한 음주, 도움 될까
[전형일 칼럼니스트] 조선시대 정치는 술(酒)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임금은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하고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술자리를 가졌다. 또 술은 임금의 일등 하사품이기도 했다. 심지어 죄수들에게도 술을 내렸다. 술은 통치행위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조선 임금으로 83세까지 장수하면서 최장기 집권한 영조는 호주가(好酒家)였다. 어릴 때부터 권력투쟁의 불안감 속에서 성장했던 그는 자기관리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하지만 술을 무척 좋아했다.
영조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절대왕권의 왕이었음에도 신하들의 눈치를 봐야했다. 그는 그럴 때마다 핑계를 대거나 거짓말로 둘러댔다.
검토관(檢討官) 조명겸이 “성상께서 술을 끊을 수 없다고들 한다는데, 신은 그 허실을 알지 못하겠지만 오직 바라건대, 조심하고 염려하며 경계함을 보존토록 하소서”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목이 마를 때에 간혹 오미자차를 마시는데, 남들이 간혹 소주(燒酒)인 줄 의심한다”라고 했다.(조선왕조실록)
영조와 더불어 태종과 세조, 정조 역시 술을 좋아했으며 주량 또한 셌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힘든 과정을 거쳐 즉위했고 재위 기간 내내 정통성에 시달렸다. 따라서 이들은 신하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방편으로 잦은 술자리를 활용했다. 특히 세조는 14년의 재위 동안 공식적으로만 총 467회의 술자리를 가지며 여타 왕들의 회식 기록을 압도했다.
반면 순탄한 계승과 재위 기간을 보낸 세종, 성종 등은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주량 또한 약했다.
생활화된 음주, 왕들도 걱정
조선시대에 술은 음식이고 약이었다.
전통적으로 술은 ‘먹는’ 음식이지 ‘마시는’ 음료가 아니었다. 또 술은 오곡(五穀)의 정기가 들어있으므로 적당히 마시면 보약으로 생각했다.
주식(酒食)과 약주(藥酒)란 말도 이를 나타낸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문종이 승하한 후 상주였던 단종이 허약해지자 신하들이 술을 약으로 권했다.
이 같은 인식과 풍습은 오히려 음주를 장려하고 대중화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중기에 이르러서는 술을 숭상하는 숭음(崇飮) 풍조가 만연해져 신분과 지역을 막론하고 음주가 생활화됐다.
하지만 과음은 결국 국가적인 문제가 됐다. 음주로 업무에 태만한 관리들이 늘면서 조정에 큰 부담이 됐다.
술에 취한 양반들의 횡포도 심했다. 백성들 또한 술로 인한 각종 사건 사고를 일으키면서 사회적인 부담을 줬다. 또 곡식으로 술을 담그면서 경제적인 손실도 발생했다.
결국 세종은 술의 폐해와 훈계를 담은 글을 발표한다. “술은 몸과 마음을 해친다. 술 때문에 부모의 봉양을 버리고,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한다. 나라를 잃고 집을 패망하게 만들며, 성품을 파괴시키고 생명을 잃게 한다….”
세종은 이 교서를 한양을 비롯한 전국의 관청에 걸어두게 했다.
술의 역기능은 조선 초에도 심했다. 우선 태조 이성계의 맏아들 이방우가 술병으로 죽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태조 4년부터 금주령(禁酒令)을 시행했다.
역사상 가장 길고 세게 금주령을 내린 왕은 오히려 애주가인 영조로 10년간 이어진 적도 있었다. 그는 금주령에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호남 지역 군사를 통솔하던 남병사(南兵使) 윤구연을 숭례문에서 참수하는데 직접 참형을 지켜봤다.(조선 왕들 금주령을 내리다)
하지만 왕의 강한 의지도 큰 소용이 없었다. 본능을 이기는 제도도 없거니와 예외가 많았기 때문이다.
먼저 국가 제사와 임금이 베푸는 연회, 외국 사신 접대 등은 적용에서 제외됐다. 또 약으로 먹는 경우나 친지를 영접하고 환송하는 경우, 과거 합격자의 축하연 등은 술이 허용됐다. 게다가 제사, 환갑, 혼인, 장례 등의 행사에도 술이 가능했다. 활쏘기 장소에서 활을 쏘는 사람들도 술이 허락됐다.
대책들이 만들어졌지만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기 십상이었다. 세종도 법령 등으로 술을 금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임금이 금한다고 무슨 소용이겠느냐. 막지 못할 것이다.”(雖堅禁 不可之也)
국가 지도자의 금주, 기대난망이네
이중적이었던 영조의 금주령은 손자인 정조에 들어와서 폐지됐다. 정책의 실효성과 더불어 그 스스로도 술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신하들과 술자리에서 ‘불취무귀’(不醉無歸), 즉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고 말하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현재까지 술과 관련된 끊임없는 잡음이 나오고 있다. 후보 때 지지율이 폭락했던 지난 2022년 1월엔 ‘술을 끊겠다’는 선언까지 나왔다. 대통령으로 2023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그룹 총수들과의 술자리가 문제 되기도 했다.
또 지난해 3월 일본 기시다 총리는 “윤 대통령이 건배를 하면서 술을 다 마셔 깜짝 놀랐다”고 말해 화제가 됐다. 급기야 최근 조국 대표가 기자회견을 통해 윤 대통령에게 ‘음주 자제’를 공식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과하고 잦은 음주가 국가지도자로서 필요한 건강한 몸과 맑은 정신에 도움이 될까. 지지율이 20%대면 금주로 결기를 보이겠건만 이 또한 기대난망(期待難望)으로 보인다.
효종은 세자로 책봉된 때부터 금주를 시작해 그 후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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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은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하고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술자리를 가졌다. 또 술은 임금의 일등 하사품이기도 했다. 심지어 죄수들에게도 술을 내렸다. 술은 통치행위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조선 임금으로 83세까지 장수하면서 최장기 집권한 영조는 호주가(好酒家)였다. 어릴 때부터 권력투쟁의 불안감 속에서 성장했던 그는 자기관리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하지만 술을 무척 좋아했다.
영조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절대왕권의 왕이었음에도 신하들의 눈치를 봐야했다. 그는 그럴 때마다 핑계를 대거나 거짓말로 둘러댔다.
검토관(檢討官) 조명겸이 “성상께서 술을 끊을 수 없다고들 한다는데, 신은 그 허실을 알지 못하겠지만 오직 바라건대, 조심하고 염려하며 경계함을 보존토록 하소서”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목이 마를 때에 간혹 오미자차를 마시는데, 남들이 간혹 소주(燒酒)인 줄 의심한다”라고 했다.(조선왕조실록)
영조와 더불어 태종과 세조, 정조 역시 술을 좋아했으며 주량 또한 셌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힘든 과정을 거쳐 즉위했고 재위 기간 내내 정통성에 시달렸다. 따라서 이들은 신하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방편으로 잦은 술자리를 활용했다. 특히 세조는 14년의 재위 동안 공식적으로만 총 467회의 술자리를 가지며 여타 왕들의 회식 기록을 압도했다.
반면 순탄한 계승과 재위 기간을 보낸 세종, 성종 등은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주량 또한 약했다.
생활화된 음주, 왕들도 걱정
조선시대에 술은 음식이고 약이었다.
전통적으로 술은 ‘먹는’ 음식이지 ‘마시는’ 음료가 아니었다. 또 술은 오곡(五穀)의 정기가 들어있으므로 적당히 마시면 보약으로 생각했다.
주식(酒食)과 약주(藥酒)란 말도 이를 나타낸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문종이 승하한 후 상주였던 단종이 허약해지자 신하들이 술을 약으로 권했다.
이 같은 인식과 풍습은 오히려 음주를 장려하고 대중화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중기에 이르러서는 술을 숭상하는 숭음(崇飮) 풍조가 만연해져 신분과 지역을 막론하고 음주가 생활화됐다.
하지만 과음은 결국 국가적인 문제가 됐다. 음주로 업무에 태만한 관리들이 늘면서 조정에 큰 부담이 됐다.
술에 취한 양반들의 횡포도 심했다. 백성들 또한 술로 인한 각종 사건 사고를 일으키면서 사회적인 부담을 줬다. 또 곡식으로 술을 담그면서 경제적인 손실도 발생했다.
결국 세종은 술의 폐해와 훈계를 담은 글을 발표한다. “술은 몸과 마음을 해친다. 술 때문에 부모의 봉양을 버리고,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한다. 나라를 잃고 집을 패망하게 만들며, 성품을 파괴시키고 생명을 잃게 한다….”
세종은 이 교서를 한양을 비롯한 전국의 관청에 걸어두게 했다.
술의 역기능은 조선 초에도 심했다. 우선 태조 이성계의 맏아들 이방우가 술병으로 죽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태조 4년부터 금주령(禁酒令)을 시행했다.
역사상 가장 길고 세게 금주령을 내린 왕은 오히려 애주가인 영조로 10년간 이어진 적도 있었다. 그는 금주령에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호남 지역 군사를 통솔하던 남병사(南兵使) 윤구연을 숭례문에서 참수하는데 직접 참형을 지켜봤다.(조선 왕들 금주령을 내리다)
하지만 왕의 강한 의지도 큰 소용이 없었다. 본능을 이기는 제도도 없거니와 예외가 많았기 때문이다.
먼저 국가 제사와 임금이 베푸는 연회, 외국 사신 접대 등은 적용에서 제외됐다. 또 약으로 먹는 경우나 친지를 영접하고 환송하는 경우, 과거 합격자의 축하연 등은 술이 허용됐다. 게다가 제사, 환갑, 혼인, 장례 등의 행사에도 술이 가능했다. 활쏘기 장소에서 활을 쏘는 사람들도 술이 허락됐다.
대책들이 만들어졌지만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기 십상이었다. 세종도 법령 등으로 술을 금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임금이 금한다고 무슨 소용이겠느냐. 막지 못할 것이다.”(雖堅禁 不可之也)
국가 지도자의 금주, 기대난망이네
이중적이었던 영조의 금주령은 손자인 정조에 들어와서 폐지됐다. 정책의 실효성과 더불어 그 스스로도 술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신하들과 술자리에서 ‘불취무귀’(不醉無歸), 즉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고 말하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현재까지 술과 관련된 끊임없는 잡음이 나오고 있다. 후보 때 지지율이 폭락했던 지난 2022년 1월엔 ‘술을 끊겠다’는 선언까지 나왔다. 대통령으로 2023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그룹 총수들과의 술자리가 문제 되기도 했다.
또 지난해 3월 일본 기시다 총리는 “윤 대통령이 건배를 하면서 술을 다 마셔 깜짝 놀랐다”고 말해 화제가 됐다. 급기야 최근 조국 대표가 기자회견을 통해 윤 대통령에게 ‘음주 자제’를 공식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과하고 잦은 음주가 국가지도자로서 필요한 건강한 몸과 맑은 정신에 도움이 될까. 지지율이 20%대면 금주로 결기를 보이겠건만 이 또한 기대난망(期待難望)으로 보인다.
효종은 세자로 책봉된 때부터 금주를 시작해 그 후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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