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회장도 설레게 한 ‘봄’…메모리 기지개에 삼성·SK ‘방긋’
[한국 제조업계에 봄바람 분다]①
이재용 회장 귀국길에 “봄이 왔다”…반도체 업황 개선 짚은 듯
감산 효과와 맞물린 AI 수요 확대…적자 탈출한 韓 반도체
[이코노미스트 정두용 기자] “봄이 왔네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장기 유럽 출장을 마치고 귀국한 지난 5월 3일 김포공항에서 만난 취재진에 건넨 인사말이다. 그는 다만 출장의 성과를 묻는 말엔 답변하지 않고 “아침부터 나와서 고생 많으셨습니다”라며 현장을 떠났다.
재계에선 이를 두고 “반도체 업황 개선을 짚은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단순히 계절적 의미를 담은 인사말이라기보다 반도체 시장 개선에 따라 실적 반등을 이룬 삼성전자 상황을 압축적으로 전달했다는 견해다.
실제로 시장에선 연초부터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봄이 찾아왔다”라는 말이 자주 나오기도 했다. 최근 1년 넘게 이어진 역대급 반도체 시장 불황이 바닥을 찍고 반등할 조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국내외 언론들도 반도체 산업이 드디어 기지개를 켜는 상황을 생명이 다시 움트는 ‘봄’에 빗대 표현하곤 했다.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디바이스솔루션(Device Solutions·DS) 부문은 올해 1분기에 오랜 기간 이어진 적자를 끊어내는 데 성공했다. SK하이닉스 역시 올해 1분기에 ‘역대급 실적’을 달성했다.
韓 경제 대들보 ‘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쌀’이라고도 불리는 메모리 반도체는 크게 D램(Dynamic Random Access Memory·전원이 꺼지면 기억된 정보가 사라지는 반도체 기억소자)과 낸드플래시(Nand Flash·전원이 없는 상태에서도 정보가 계속 저장되는 비휘발성 기억장치)로 나뉜다. PC·모바일과 같은 개인 정보통신기술(ICT) 기기부터 대형 인터넷데이터센터(IDC)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널리 사용되는 제품이다. 특히 인공지능(AI)·빅데이터·클라우드 등 첨단 기술 고도화에 필수적이라 중요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런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는 기업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23년 4분기 기준 삼성전자의 세계 D램 시장 점유율은 45.5%로 집계됐다. 이 기간 SK하이닉스는 31.8%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D램 시장의 77.3%를 한국 기업이 담당하는 구조다.
낸드플래시 시장 역시 이 기간 양사의 합산 점유율은 58.2%를 기록했다. 삼성전자의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 점유율은 36.6%로 나타났고, SK하이닉스는 21.6%로 조사됐다. 메모리 반도체 산업이 국내 경제 대들보로 불리는 이유다.
삼성전자는 메모리·비메모리(연산·논리·추론·정보처리 등의 기능을 담당하는 시스템 반도체)·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등 반도체 산업 분야에 모두 진출한 종합반도체기업(IDM)이다. 그러나 메모리 영역에서 나오는 매출이 비메모리·파운드리와 비교해 압도적으로 높다. SK하이닉스는 메모리 영역에 집중하는 사업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메모리 반도체 호·불황에 양사의 실적 추이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2022년 4분기부터 뚜렷한 위축 기조를 보였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 DS부문은 2023년 내내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연간 매출은 전년 대비 32.4% 감소한 66조5945억원을 써냈고, 14조8795억원에 달하는 연간 적자를 냈다.
SK하이닉스 역시 2022년 4분기부터 2023년 3분기까지 적자 행보를 보였다. 2022년 4분기에 매출은 7조6720억원, 영업손실은 1조8984억원을 기록했다. 2023년 연간 기준으론 매출 32조7657억원, 영업손실 7조7303억원을 각각 써낸 바 있다.
양사의 지난해 실적이 곤두박질친 주된 원인으론 주요 제품 가격 하락이 꼽힌다. 국내 경기를 뒷받침하는 반도체 산업이 하락 국면에 접어들자, 시장에선 끊임없이 ‘위기론’이 제기됐다. 메모리 시장 개선 기미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으면서 이런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리기도 했다.
디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D램 범용제품(DDR4 8Gb) 고정 거래가격(반도체 회사가 대형 고객사에 제품을 공급할 때 가격)은 2021년 7월 4.1달러에서 내내 하락해 2023년 9월에는 1.3달러를 기록했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낸드플래시 메모리카드·USB용 범용제품(128Gb 16Gx8 MLC) 고정 거래가격은 2022년 1월 4.81달러에서 지속 하락해 2023년 9월에는 3.82달러까지 떨어진 바 있다.
이 조사는 고부가가치 제품 가격 변동을 반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업계에선 반도체 업황을 살피는 대표적인 지표로 활용하고 있다. 범용제품의 가격 추이가 전반적인 반도체 시황과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범용제품 가격이 하락하던 시기부터 삼성전자·SK하이닉스 실적 악화가 시작되기도 했다.
바닥 찍고 드디어 ‘반등’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던 제품 가격이 반등하기 시작한 건 2023년 4분기부터다. 가격 상승이 관측되던 시기부터 ‘메모리 봄’을 전망하는 분석도 시장에서 점차 확산했다.
2023년 10월 D램 범용제품 고정 거래가격은 1.5달러로 전월 대비 15.38% 올랐다. 2년 3개월 만에 나온 반등 소식이다. 2024년 4월에는 2.1달러까지 상승했다. 낸드플래시 메모리카드·USB용 범용제품 고정 거래가격 역시 2023년 9월 바닥을 찍고 순차 상승해 2024년 4월에는 4.9달러를 기록했다.
삼성전자 DS부문과 SK하이닉스가 올해 1분기 적자를 끊어낸 배경이다. 삼성전자 DS부문은 이 기간 매출 23조1400억원, 영업이익 1조91000억원을 기록했다. SK하이닉스 역시 매출 12조4296억원, 영업이익 2조8860억원을 써냈다. 이 회장이 ‘봄’을 언급한 이유가 어디서 기인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메모리 반도체 시황이 개선된 배경으론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감산과 AI 서비스 확산이 꼽힌다. SK하이닉스는 2022년 10월 감산을 발표한 바 있다. 삼성전자도 지난해 4월 “인위적 감산은 없다”라는 원칙을 깨고 생산량 조절을 공식화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2분기부터 생산량의 약 15% 안팎 줄였고, 하반기엔 감산량을 30% 내외로 늘린 것으로 전해진다. 업계에선 양사가 최근까지도 D램은 25%, 낸드는 45% 수준의 감산을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공급량은 줄었지만, 수요는 최근 AI 서비스 확산에 따라 증가하고 있다는 게 양사의 공통된 관측이다. 특히 D램 제품 일종인 고대역폭메모리(HBM)가 AI 시장 성장에 따라 수요가 증가하며 실적을 이끌고 있단 분석을 내놨다.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사장)는 지난 5월 2일 경기도 이천 본사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HBM 생산 측면에서 저희 제품은 올해 이미 ‘솔드아웃’(sold out·완판), 내년에도 대부분 솔드아웃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트렌드포스 역시 D램 전체 용량(비트)에서 HBM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난해 2%에서 올해 5%를 거쳐 내년에는 10%를 넘어설 것이란 내용의 보고서를 최근 내놓은 바 있다. 삼성전자 측은 이 같은 수요에 대응해 “HBM3E 8단 양산을 4월에 시작했고 12단 제품도 2분기 내 양산할 계획”이라며 “1b나노 32Gb DDR5 기반 128GB 제품의 2분기 양산 및 고객 출하를 통해 서버 시장 내 리더십을 강화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SK하이닉스 역시 “AI 메모리 수요 확대에 맞춰 지난 3월 세계 최초로 양산을 시작한 HBM3E 공급을 늘리고 고객층을 확대할 것”이라며 “10나노 5세대(1b) 기반 32Gb DDR5 제품을 연내 출시해 회사가 강세를 이어온 고용량 서버 D램 시장 주도권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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