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공간 스며드는 ‘과거 악령’…美·中·日·유럽 사이에 낀 韓 ‘어쩌나’
[디지털 장벽 쌓는 세계]①
기술 발전으로 모호해진 현실-디지털 경계…자유 공간에 패권 논리 침범
中 때리는 美, 韓 견제한 日, 美 배척한 유럽…핵심은 ‘자국 우선주의’
구글로 검색해 장소를 찾고, 인스타그램으로 친구와 약속을 잡는다. 우버를 타고 이동하면서 틱톡을 보며 지루함을 달랜다. 해당 정보를 주고받는 데엔 화웨이의 통신 장비가 사용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데이터를 저장하는 센터는 물론 사용자가 만지는 기기에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반도체가 들어가 있다.
국경을 초월한 기술 기업이 만들어 낸 제품·서비스는 일상을 지배한다. 이에 따라 돈도 움직이기에 시장 종속 우려는 자연스럽다. 이를 경계하는 정책은 그간 ‘만지고 보는’ 영역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그러나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등장은 디지털 기술이 스마트 기기만큼이나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됐다. 국가 장벽이 디지털 공간으로 확산하는 이유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세계인들과 달리 네이버로 검색하고 카카오톡으로 소통한다. 빅테크의 국내 시장 침투도 속도가 붙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자유의 상징이던 디지털 공간에 장벽이 세워지면서 변화하는 지점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편집자 주]
[이코노미스트 정두용 기자] 인터넷으로 연결된 디지털 공간은 자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관세·규제 등으로 대변되는 ‘국가 장벽’이 작동하지 않아서다. 온라인에서만큼은 국적과 상관없이 의견을 주고받고 정보를 공유하곤 했다. 정보통신기술(ICT)의 고도화로 ‘실시간성’까지 갖춘 뒤론 이런 특성이 더욱 두드러졌다. 게임·콘텐츠·플랫폼은 물론 이커머스까지 디지털 기술과 밀접한 산업군에서 ‘크로스보더’(Cross-border·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일) 전략을 활발하게 도입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디지털 공간의 최대 장점으로 꼽힌 ‘자유’가 점차 퇴색되고 있는 양상이다. 자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타국 빅테크를 대상으로 규제가 점차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은 중국 기업(화웨이·틱톡 등)을, 유럽은 미국 기업(오픈AI·메타·구글·마이크로소프트 등)을 배척하는 법을 최근 제정했다. 일본 역시 최근 이른바 ‘라인야후 사태’를 통해 한국 최대 플랫폼 기업 네이버를 정조준했다.
각국 정부는 저마다 ▲개인정보 보호 ▲친환경·탄소 저감 ▲유해 콘텐츠 확산 방지 ▲안보 등 다양한 ‘명분’을 앞세워 빅테크를 배척하는 방향으로 규제를 강화했다. 그러나 업계에선 규제 확산의 이유가 사안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기저에 깔린 요인은 ‘시장 종속 우려’로 같다고 본다.
IT업계 관계자는 “해당 분야에서 경쟁이 가능한 자국 기업이 없는 경우, 글로벌 빅테크에 특정 산업군을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세계 각국이 규제를 강화하고 나선 건 이런 상황을 피하겠단 ‘궁여지책’ 성격을 지닌다”고 분석했다. 이어 “인공지능(AI) 기술 고도화로 빅테크가 지닌 영향력이 커지자, 시장 종속 우려가 더욱 확산했고 이는 ‘보다 강력한 규제’란 현상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규제 대상에 오른 빅테크 대다수는 최근 일상에 미치는 영향이 더 커진 디지털 분야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이 때문에 현실 세계에서 작용하던 ‘국가 장벽’이 디지털 공간으로 옮겨가고 있단 평가도 나온다.
윤석빈 서강대 정보통신대학원 특임교수는 “AI·빅데이터·클라우드 등 다양한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별도로 구분되던 ‘물리적 공간’과 ‘디지털 세계’가 연결·융합되고 있다”며 “이에 따라 물리적 세계에서 작동하던 패권주의와 같은 기존 논리가 디지털 분야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현실과 디지털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연결성 강화’ 추세가 빅테크를 겨냥한 규제 강화의 본질적 원인”이라고 말했다.
높아지는 장벽…쌓여가는 불확실성
글로벌 빅테크 규제 강화는 미국과 중국 사이 기술 패권 다툼과 무관치 않다. 2017년 1월부터 2021년 1월까지 재임한 45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자국 우선주의’에 기반해 중국을 견제하고 나섰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이 과정에서 기업에 대한 강도 높은 제재를 중국 견제 정책의 주요 수단 중 하나로 활용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특히 재임 기간 내내 ‘중국의 IT 굴기’ 상징으로 여겨졌던 화웨이를 압박했다. 2019년 5월 화웨이를 거래제한 명단인 ‘블랙리스트’에 공식 지정했고, 2020년 9월에는 ‘미국 장비·기술이 사용된 반도체 공급 불가’란 제재를 시행했다. 당시 업계에선 반도체 제재를 두고 사실상 화웨이에 ‘사형선고’가 내려졌다고 봤고, 실제로도 대다수 사업이 주저앉았다. 통신 장비 영역에선 ‘확산이 어려운 정도’의 타격으로 그쳤지만, 스마트 기기는 얘기가 달랐다. 미국 반도체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선 ‘스마트폰의 두뇌’로 불리는 AP칩 경쟁력 확보가 불가능해서다.
화웨이는 미국의 반도체 제재 시행 직전인 2020년 2분기 세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20.2%(카운터포인트리서치 조사)로 삼성전자를 0.2%포인트(p) 앞지르고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그러나 2021년 1분기 세계 점유율은 4%대로 급락하더니, 시장에서 순차 퇴출하는 모습을 보였다. 태블릿·웨어러블 기기·노트북 등도 비슷한 양상으로 시장 점유율이 지속 하락했다.
화웨이는 미국의 제재에도 지난해 8월 자체 AP칩을 탑재한 신규 5G 스마트폰을 3년 만에 내놓긴 했다. 자국 시장을 중심으로 다시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지만, 아직 ‘과거의 영광’을 모두 되찾진 못한 상태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화웨이를 주저앉혔다면, 조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 온라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틱톡을 정조준하고 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 틱톡의 강제 매각 법안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세계 10억명의 틱톡 사용자 중 1억5000만명이 미국인이다.
법안은 틱톡이 미국 내 사업권을 최대 360일 내 팔아야 하는 강제성을 지닌다. 세계 반도체 공급망 재편으로 전임 정부에서 시작한 제조업 중심의 ‘자국 우선주의’를 이어간 바이든 행정부는 이로써 미·중 패권 전선을 디지털 영역으로도 넓혔다.
이런 ‘타국 빅테크 배제’ 기조는 유럽에서도 뚜렷하게 관측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지난해 9월 디지털서비스법(DSA)을, 올해 3월부턴 디지털시장법(DMA)을 시행하고 있다. 해당 법안은 국가를 가리지 않고 유럽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모든 디지털 기업에 적용된다. 그러나 업계에선 적용 대상 기준을 충족하는 기업 대다수가 미국 소속이라 목적성을 지닌 규제라고 해석한다. 실제로 EU 집행위원회는 DMA 시행에 앞서 일정 규모 이상의 플랫폼 사업자 6곳을 ‘게이트키퍼’로 지정해 특별 규제를 예고한 바 있는데, 이 중 5곳이 미국 기업이다. 구체적으로 알파벳(구글 모회사)·아마존·애플·메타·마이크로소프트·바이트댄스(틱톡 모회사)가 이름을 올렸다.
EU는 여기에 더해 세계 최초로 포괄적 성격의 AI 규제법을 최근 최종 승인했다. AI를 활용 위험도 별로 분류해 규제 수위를 달리 적용하는 특징을 지닌다. 위반 기업에 3500만 유로(약 518억원)와 세계 매출의 7% 중 더 높은 금액을 벌금으로 부과할 수 있다.
EU가 이처럼 강도 높은 규제에 나설 수 있는 배경으론 유럽 내 이렇다 할 플랫폼·AI 기업이 없다는 점이 꼽힌다. 일단 규제로 글로벌 빅테크의 유럽 진출을 틀어막아 시간을 번 뒤, 시장에 대응할 수 있는 기업을 육성하겠단 취지라는 분석도 나온다.
윤지웅 한국정책학회장(경희대 행정학과 교수)는 “빅테크 규제는 자국 이익 극대화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 국가 사정에 맞춰 시행되고 있는 것”이라며 “유럽의 경우 세계 시장과 경쟁할 수 있는 디지털 경쟁력을 보유하지 못한 데다, 따라갈 수 있는 요인도 적어 ‘규제 일변도’ 방향으로 정책이 마련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윤석빈 특임교수도 “유럽은 자체 빅테크를 보유하지 못해 글로벌 기업 서비스를 ‘소비’하는 입장이라 사용자 보호 측면에 방점을 두고 정책을 마련하는 것”이라며 분석했다.
한국 산업 대응법은?
문제는 이런 변화의 여파가 한국으로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요 선진국이 디지털 규제 강화와 패권 다툼에 나서면서 높아진 시장 불확실성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미국 정부의 화웨이 제재에 직접 영향을 받기도 했다. 제재 시행 당시 화웨이는 삼성전자 전체 매출의 3.2%를, SK하이닉스의 11.4%를 담당하는 ‘주요 고객사’였기 때문이다. 디지털 공간으로 규제가 확산하는 기조가 국내 기업에 직·간접 타격으로 언제든 이어질 수 있단 분석이다. 일본 정부가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수출 규제에 이어 최근 ‘라인야후 사태’로 국내 산업계에 견제구를 날렸다는 점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이주연 아주대 과학기술정책융합연구센터장(산업공학과 교수)는 “수출 위주로 성장한 한국 기업은 주요 선진국 규제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미·중 패권 다툼 향방이나 규제 법안 내용을 명확히 파악해 ‘틈새 전략’을 노리는 방향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윤석빈 특임교수는 “네이버·카카오와 같은 국내 플랫폼 기업은 글로벌 확장 측면에서 타국 규제를 분석해야 하고, 반대로 중소기업 위주의 사업군은 타국과 같이 ‘종속 우려’를 덜어낼 수 있는 방향으로 정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며 “진흥과 규제가 적절한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윤지웅 학회장은 “디지털 장벽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역시 자국의 이익을 고민해야 할 때”라며 “국내 상황과 유럽은 분명히 환경이 다르다. 유럽 선진국이 디지털 규제를 강화한다고 해서 이를 따라가는 식으로 정책이 마련되는 일은 피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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