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런 일이” 우연이 빚어낸 명품 술의 탄생[와인 인문학]
자연이 낳은 스카치 위스키부터 실수가 가져온 아마로네까지
다양한 우연과 시행착오 등 거치며 인류와 함께 완성된 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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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피하려다 탄생한 황금빛 보물
스카치 위스키는 대자연이 선물한 술이라고 한다. 스코틀랜드의 험준한 산악 지형과 혹독한 기후는 밀, 보리 같은 곡물 재배에 적합하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환경은 스카치 위스키 탄생의 중요한 배경이 됐다. 15세기부터 증류 기술이 스코틀랜드에 전해지면서 척박한 땅에서 자란 곡물들은 ‘생명의 물’이라 불리는 위스키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합병으로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이 탄생하자 영국 정부는 과도한 위스키 세금 정책을 세워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밀주꾼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세금 징수원의 눈을 피해 산속 깊은 곳이나 동굴에 숨어 몰래 위스키를 증류했다. 이 과정에서 밀주꾼들은 산속의 습지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탄(피트)을 태워 싹 튼 보리를 말리는 열원으로 사용했다. 이로 인해 스카치 위스키에 매캐한 피트향이 베게 됐다.
또한 산속에서 마땅한 위스키 저장 용기를 찾을 수 없었기에 당시 스페인에서 대량으로 수입하던 셰리(Sherry) 오크 빈 통을 도시에서 수거해 산속으로 옮겨와 위스키를 담아 보관했다. 원래는 무색의 투명한 위스키가 옅은 호박색이라는 환상적인 색상을 갖게 된 이유다.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산속에서 밀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스카치 위스키 특유의 스모키하고 깊은 풍미와 매혹적인 색상까지 얻게 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오늘날 스카치 위스키는 싱글 몰트, 블렌디드 등 다양한 종류로 출시된다. 각 지역의 독특한 토양과 기후, 증류 방식에 따라 개성 넘치는 맛과 향을 선사한다.
코냑은 두 번의 섬세함으로 탄생한 명품 브랜디라고 한다.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코냑 지방은 온화한 기후와 비옥한 토양 덕분에 예로부터 포도 재배가 활발했다. 16세기 와인 생산량이 급증하면서 저장 공간과 운송에 문제가 발생하자 와인을 증류해 부피를 줄이는 방법이 고안됐다. 하지만 한 번 증류한 브랜디는 와인의 섬세한 향을 잃어버리고 거칠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때 코냑 지방의 상인들은 ‘두 번 증류’라는 혁신적인 방법을 도입했다. 두 번 증류를 통해 불순물을 제거하고 섬세한 향을 농축한 결과 오늘날 우리가 아는 코냑이 탄생했다.
코냑은 오크 통에서 숙성되는 동안 바닐라·캐러멜·말린 과일 등의 풍부한 향을 머금게 된다. 등급에 따라 맛과 향의 복합미가 천차만별이다. 섬세한 꽃향과 과일향이 조화를 이루는 VSOP, 긴 숙성 기간을 거쳐 깊고 풍부한 풍미를 자랑하는 XO 등 코냑은 그 품격과 가치를 인정받아 ‘브랜디의 왕’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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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로네는 달콤한 와인이 실수로 완전 발효되면서 탄생한 기적과 같은 술이다. 이탈리아 북동부 베네토 지방의 발폴리첼라 지역은 아름다운 포도밭과 풍요로운 자연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아마로네는 달콤한 레치오토 와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연히 탄생했다.
레치오토는 포도를 건조해 당도를 높인 후 발효시켜 만드는 달콤한 와인이다. 1930년대 와인 저장고에 장기간 방치된 레치오토 와인이 발견됐다. 놀랍게도 이 와인은 당분이 모두 발효돼 드라이하면서도 농축된 풍미를 지녔다. 이 우연한 발견은 ‘아마로네’라는 새로운 와인 스타일을 탄생시켰다. 아마로네는 달콤하지 않고 ‘쓴맛’을 가진 와인을 의미한다.
아마로네는 짙은 루비색을 띤다. 말린 자두·무화과·초콜릿 등의 풍부한 향과 묵직한 타닌이 조화를 이루는 와인이다. 숙성될수록 복합적인 풍미가 더해져 긴 시간 즐길 수 있는 와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화이트 진판델은 캘리포니아의 햇살 아래 탄생한 분홍빛 로맨스라고 말한다. 미국 캘리포니아는 풍요로운 햇살과 다양한 품종의 포도로 유명한 와인 생산지다. 1970년대 셔터 홈(Sutter Home) 와이너리는 진판델 포도로 레드 와인을 만들다 발효 과정이 멈추며 낭패를 봤다. 거대한 발효조에 담긴 와인의 양은 워낙 많아 버릴 수도 없었다.
이 와인은 아름다운 핑크빛을 지녔다. 달콤한 딸기와 라즈베리 향, 그리고 가벼운 풍미를 보였다. ‘화이트 진판델’이라는 다소 엉뚱한 이름으로 판매된 이 와인은 당시 미국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렇게 새로운 스타일의 와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우연한 실수가 빚어낸 세런디피티라 할 수 있다.
슈페트레제는 뜻하지 않은 늦수확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독일어로 ‘늦은 수확’을 뜻하는 슈페트레제는 과숙한 포도로 만드는 스위트 와인이다. 포도가 나무에 오래 매달려 있으면 당도가 높아진다. 일부에는 ‘귀부 곰팡이’라고 불리는 보트리티스 시네리아가 피어 특유의 풍미를 더한다.
슐로스 요하니스베르그는 독일 와인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이 일어난 장소다. 독일 와인을 대표하는 달콤하면서도 향기가 좋은 슈페트레제(Spätlese) 등급의 리슬링 탄생지로 유명하다. 당시 풀다(Fulda) 교구에는 여러 개의 포도원이 있었고, 포도 수확을 하기 위해서는 익은 포도 샘플을 따서 교구장에게 보여주고 수확 허가서를 받아와야 했다.
매년 가을이 되면 교구에 속한 여러 수도원에서 교구장이 거주하는 중앙 수도원까지 전령들을 보내 포도 샘플을 전달했다. 1775년 가을 풀다 교구의 교구장이 사냥을 떠난 바람에 허가증 교부가 늦어져 수확이 2주 정도 지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마침 그 시기에 슐로스 요하니스베르그의 포도밭에 귀부 곰팡이가 급증해 포도가 농익고 높은 당도를 지니게 됐다. 그 결과 예년보다는 당도가 높고 복합적인 풍미를 지닌 와인이 만들어졌다.
이처럼 술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다양한 우연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발전해 왔다. 술에 담긴 역사와 이야기를 음미하며 술 한 잔의 여유를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김욱성 와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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