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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잔 들고 스페인 반 바퀴

와인 잔 들고 스페인 반 바퀴

마드리드부터 빌바오까지 눈과 입이 즐거운 스페인 와인 산지 투어스페인의 와인 산지는 미국 와인 애호가들 덕분에 세상에 알려졌다. 요즘 스페인의 와인 트렌드를 체험하려면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나와 함께 마드리드부터 빌바오까지 와인 투어를 떠나보자. 여행가방을 쌀 때 이왕이면 배가 편안한 스판 바지도 챙겨가는 게 좋겠다.

(왼쪽부터 시곗바늘 방향으로) 알프레도 마에스트로는 2016년 ‘엘 티오 산토스’라고 불리는 오래된 라가를 재건하는 사업에 동참했다. 하로에서 보데가스 아쿠타인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욘 페냐가리카노. 북쪽 해안에서 가까운 바스크 지방의 포도원들은 비가 많이 내려 촉촉한 초록색 초원을 이룬다. / 사진:JOSIE ZEIGER
모라디요 데 로아는 언덕 위의 포도원과 돌로 된 가옥들로 유명한 강가 마을이다 (왼쪽 사진). 부르고스의 와인업자 고요 가르시아는 기원 4세기에 지어진 지하 저장고에서 와인을 숙성시킨다. / 사진:JOSIE ZEIGER
마드리드의 셰리 와인 바 ‘라 베넨시아’ 앞에 선 필자. / 사진:JOSIE ZEIGER
이 여행은 마드리드에서 출발한다. 마드리드의 셰리 와인 바 ‘라 베넨시아(La Venencia)’는 이런 여행을 시작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이 바는 마드리드 도심의 골목길 깊숙이 숨어 있다. 만자니야와 아몬티야도, 올로로소 등의 셰리 와인이 가득 든 커다란 통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텐더는 앤초비를 얹은 토스트와 소금에 절인 참치, 마르코나 아몬드 등 간단한 안주를 만들고 있다.

마드리드의 사색가들이 어두운 구석에 앉아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이 시대의 중요한 문제를 논한다. 한 켠에선 셰리 와인에 열광하는 일본인 여행객을 대상으로 시음회가 열린다. 여행객들은 강사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메모하며 귀 기울인다. 이번 여행은 아주 좋은 여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마드리드에서 서쪽으로 자동차를 달려 그레도스 산맥으로 향했다. 최근 스페인의 와인 명산지로 다시 주목받는 지역이다. 메마른 고원을 지나 고도가 차츰 높아지면서 오래된 숲이 나타났다. 삼나무와 오크나무, 소나무가 우거진 숲과 큰 바위들을 지나니 오래된 돌벽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4월이라 들꽃이 막 피어나기 시작했지만 공기는 여전히 축축하고 차가웠다. 산 마르틴 데 발데이글레시아스에 있는 오래된 포도원에 들렀다. 알비요 품종의 포도를 재배하는 곳인데 포도나무 사이사이 꽃이 핀 허브들을 뽑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알비요 포도에 이롭기 때문이란다.그레도스 산맥의 해발 735m 지점에 있는 쿠에마도(Quemado) 포도원에서는 와인업자 하비에 가르시아가 75년 된 가르나차 포도 나무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북쪽을 향한 포도밭에서 동업자 로라 로블레스, 데이비드 벨라스코, 데이비드 모레노와 함께 이 와이너리의 새 프로젝트 ‘4 모노스(4 Monos)’ 와인을 만들 포도를 찾고 있었다. 이곳은 그레도스 산맥의 다른 지역보다 더 건조하고 바람이 많아서 와인 맛이 순한 편이다. 어두운 보라색이 감돌고 블랙 체리와 산딸기 등 과일 향이 짙게 나며 뒷맛은 짭짤하다.

하이킹 할 시간이 있다면 발렌시아에서 포르투갈까지 이어지는 GR10 트레일의 일부 구간을 걸어보자. 그레도스 산맥에는 그 밖에도 멋진 산책 코스가 많다. 와이너리를 방문해 다양한 빈티지의 와인을 시음하고, 복잡하고 기술적인 설명을 듣고, 지역의 특색 있는 요리를 잔뜩 먹고 나면 이런 산책이 절실히 필요하다(왜 스판 바지를 챙겨 가라고 했는지 이제 이해가 가는가?).

그레도스 산맥에서 북쪽으로 차를 달려 리베라 델두에로로 향했다. 모라디요 데 로아는 언덕 위의 포도원과 돌로 된 가옥들로 유명한 강가 마을이다. 언덕의 경사면을 파내고 지은 이 석조 구조물들은 한때 버려졌었지만 현재 지역 활성화 사업이 진행 중이다. 동네 주민들이 이 구조물들을 가옥으로 개조하고 있다. 리베라 델 두에로와 그레도스 산맥에서 와인을 제조하는 알프레도 마에스트로는 2016년 엘 티오 산토스(El Tio Santos)라고 불리는 오래된 라가(포도를 으깰 때 쓰는 큰 돌로 된 기구)를 재건하는 사업에 동참했다. 라가는 한때 스페인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이용됐었다. 마에스트로는 깊은 지하 동굴의 와인 저장고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곳에서 토종 포도인 알비요로 만드는 와인의 수익금은 모두 지역 활성화 사업을 위해 쓰인다.

거기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서 고원과 나지막한 산들을 지나 리베라 델 두에로의 또 다른 지역으로 향했다. 땅이 붉은색을 띄는 곳에 다다르면 리베라 델 두에로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부르고스에 당도한 것이다. 이곳의 토양은 점토와 석회석, 모래로 이뤄졌다. 지역 와인업자 고요 가르시아는 ‘와인은 (좋든 나쁘든) 놀라움이 생명이다’는 금언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는 열정적인 사람이다.그는 이 진리를 오래전에 깨달았다. 가르시아는 16세 때 가족이 운영하는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새로 심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그는 템프라뇨 품종을 심어야 할 땅에 그라시아노 품종을 심는 실수를 저질렀다. 일이 잘못된 걸 알았을 때는 작업이 너무 많이 진행돼 돌이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가르시아 가족은 그 포도나무를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런데 몇 년 후 그 포도로 만든 와인은 놀랍게도 맛이 기막히게 좋았다.

가르시아의 와인은 기원 4세기(제대로 읽은 게 맞다)에 지어진 지하 저장고에서 숙성된다. 그 위의 건물은 15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중세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돌로 된 문과 두꺼운 기둥들이 자리 잡은 실내엔 낡은 와인 통을 쪼개서 만든 땔감으로 불을 때는 벽난로가 있고, 그 앞엔 구운 고기가 산더미처럼 쌓인 연회용 식탁이 놓였다. 15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저장고에 핀 오래된 곰팡이는 살아 숨 쉬는 맛있는 와인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거기서 북동쪽으로 1시간을 더 달려 굽이치는 언덕 위의 밀밭과 고원, 풍력 발전용 터빈들을 지나면 구름에 싸인 산이 나타난다. 여기가 리오하 알타(에브로 강 상류 지역)다. 그곳의 작은 마을 하로에서 보데가스 아쿠타인(Bodegas Akutain) 와이너리의 소유주 욘 페냐가리카노를 만났다. 페냐가리카노의 아버지는 30년 전 하로 외곽에 있는 땅에 포도나무를 심었다. 리오하 알타 지역은 리오하의 다른 지역보다 고도가 높고 바람이 더 많이 불어 와인 맛이 깊고 풍부하다. 그날 와이너리에서 마련해준 점심 메뉴는 포도나무 가지로 불을 피워 구운 양갈비였다.거기서 정북쪽으로 자동차를 달려 바스크 지방으로 가는 길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바람 부는 메마른 고원은 사라지고 비가 내려 촉촉한 초록색 초원이 나타났다. 북쪽 해안에서 20㎞ 거리에 있는 올라 베리아의 포도원들은 매우 아름다웠다. 벤고엑스테(Bengoexte) 와이너리는 혼두라비 주리 품종과 그로스 만셍 품종의 포도를 재배한다.

바스크 지방 최초의 인증 받은 유기농 와인 업체인 이곳의 소유주 에냐키 에체베리아는 손님들에게 포도원을 굽어보는 자택의 투어를 제공한다. 15세기에 지어진 이 집의 나무 기둥들은 처음 건축 때부터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됐다. 실내 중앙의 나무를 때는 돌 난로에서 나오는 연기가 이 나무 기둥들의 보존에 도움이 됐다. 이 연기는 살구와 초록 바나나, 라놀린 향이 나는 이 와이너리의 차콜리나 와인에 훈연향을 더해준다. 이런 곳을 방문해 에체베리아가 직접 만드는 와인을 맛보니 테루아르(와인이 만들어지는 자연환경)와 사려 깊은 와인 제조에 쏟는 그의 열정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여행의 종착지인 빌바오에서는 이전에 매음굴이었던 호텔에 묵었다. 엘리베이터 내부 장식에서도 애욕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기막힌 여행을 기분 좋은 몽롱함으로 끝맺었다고 할까? 어쨌든 스페인은 보물 같은 나라다.

- 조지 자이거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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