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화려한 바로크 패션 프랑스 루이 14세…네덜란드 시민복 영향 스페인 펠리페 4세

[라의숙의 그림으로 읽는 역사 속 패션②]
영·스페인 해전 이후 프랑스가 패션의 중심지
루이 14세 권위 잘 나타낸 이야생트 리고 초상화
시민계급의 성장 이후 네덜란드 복식 서민풍 강해져
스페인 귀족 복식은 네덜란드 시민복 영향 많이 받아

〈그림 1〉 프랑스화파(ecole des francais), 카테리나 데 메디치, 루브르 박물관
‘탁, 탁, 탁’. 박자를 맞추며 무대 위로 한 남자가 올라온다. 날렵한 몸과 맵시 있는 자태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마치 꿈속에서 헤매듯 영혼을 불사르는 듯한 몸짓. 영화 ‘Le Roi Dance'의 주인공. 4살 때 아기왕으로 등극해 무려 72년 3개월 동안 태양왕이란 별칭을 얻은 루이 14세이다. ’짐은 곧 국가다‘라며 부르봉 왕조시대 절대 왕정의 전성기를 누렸던 그의 시대로 잠시 돌아가 보자. 
 
우리가 흔히 부르봉왕조를 언급할 때 메디치가를 빼놓을 수 없다. 14세기 말에 시작된 메디치 가문은 잘 알다시피 엄청난 부와 명예를 축적하고 르네상스 시대를 꽃피운 어지간한 예술가들을 죄다 후원했다(우피치 미술관만 봐도 알 수 있다). 
 
메디치 가문의 숨은 일화 중 하나. 못생긴 외모로 항상 검은 옷을 입는 바람에 검은 왕비로 소문난 카타리나 드 메디치(그림 1)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부모를 잃고 작은 할아버지 교황 레오 10세가 그녀의 보호자가 된다. 그러나 레오 10세도 몇 년 안 되어 죽자 친척인 클레멘스 7세가 교황 자리에 올라간다. 메디치 가문 출신으론 두 번째 교황이다.
 
새 교황이 된 클레멘스 7세는 지참금을 준다는 달콤한 조건을 앞세워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차남 앙리 2세(그림2)와 카타리나를  정략결혼 시킨다. 정략적인 돈거래로 결혼식을 올린 1년 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죽자 교황청은 안색을 바꿔 결혼 지참금 지급을 거절했다. 못생긴 이탈리아 여자 카타리나는 프랑스인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는다. 남편인 앙리 2세는 더했다. 그에게는 무려 19세나 연상인 정부 디안 드 푸아티에(그림 3)가 있었다.
 
〈그림 2〉 프랑수아 클루에, 앙리2세, 프랑스 왕, 루브르 박물관
카타리나는 결혼 후 주변 모두로부터 굴욕적인 대우를 받았다. 왕실 행사 때마다 남편 정부 디안의 뒤를 시녀처럼 따라다녀야만 했다. 앙리 2세의 국왕 취임 때도 남편 옆자리는 왕비 카타리나가 아니라 연상의 애인 디안이 서 있었다.
 

군주론 읽으며 모멸감을 씹다

 
카타리나가 누군가. 메디치가의 여인이다. 지독한 모멸감과 외로움을 꿋꿋이 견디어 냈다.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그녀를 지켜준 것은 한권의 책.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었다. 1559년 축제. 대표적인 축제 볼거리였던 마상 창 시합이 열렸다. 앙리 2세 역시 의기양양하게 말 타고 참가하였으나 그만 긴 창에 눈을 찔려 사망하게 된다.
〈그림 3〉 프랑수아 클루에, 목욕하는 여인(디안 드 푸아티에의 초상),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때는 왔다. 마침내 왕비 카타리나의 섭정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대놓고 무시당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복수’의 기회다. 그녀를 그토록 멸시하던 신하들과 남편의 여자 디안은 언제 닥칠지 모를 피의 숙청을 생각하며 극도의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막상 카타리나가 내민 것은 복수 대신 용서의 카드. 아무도 생각지 못한 반전이었다. 
 
그토록 미웠던 남편을 저주하기는커녕 애도하는 의미로 평생 실크로 만든 옷은 입지 않았다. 대신 검은 색 옷만을 줄곧 입었다. 그때부터 검은 왕비라 불렸다. 그 뒤 아들 셋을 차례로 왕으로 등극시킨다. 남편 앙리 2세의 뒤를 이어 14세의 장남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한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프랑수아 2세는 즉위 1년 만에 요절한다. 곧바로 차남 샤를 9세가 10살에 즉위하고 카타리나의 본격적인 섭정이 시작된다.
 
당시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위그노) 간의 격한 대립이 되풀이됐다. 골치 아픈 시절이었다. 카타리나는 딸 마르그리트(일명 마고)와 개신교의 지도자인 나바라의 앙리(후일 앙리 4세)와 결혼시켜 화해의 무드를 만들고자 애썼다.
 
그러나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나. 결혼식 날인 성 바로톨로메오 축일에 개신교도들의 대량 학살 사건이 일어난다(성 바로톨로메오 축일 학살). 평소에도 폐가 좋지 않아 비실거렸던 샤를 9세는 이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다가 결국 결핵으로 죽는다. 이어 셋째인 앙리 3세가 즉위하나 이번엔 1589년 어머니 카타리나가 죽는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해 8월 무더위 속에서 암살당한다.
 
원래 앙리 3세는 아들이 없었다. 그 바람에 법의 절차에 따라 사위인 나바라의 앙리가 앙리 4세가 되면서 부르봉 왕조가 시작된다. 새 부르봉 왕조 시대는 사위가 연 셈이다. 낭트칙령을 발표해 국민에게 신앙의 자유를 부여하기도 했던 앙리 4세는 잘 나가다가 광신적인 가톨릭교도의 칼에 찔려 어이없게 죽게 된다.
 
예상치 못하게 상황은 꼬인다. 그 당시 왕비는 마리 드 메디치. 왕비 마리의 섭정 아래 열살짜리였던  루이 13세가 즉위하게 된다. 루이 13세는 합스부르크가의 앤 도트리시와 결혼했다. 사이가 나빴는지 스트레스 때문인지 20여년간 후사가 없다가 늦둥이로 힘들게 얻은 왕세자가 바로 루이 14세이다. 내 아들 맞나 의심도 돌았다는 후문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삼총사’의 시대적 배경이 바로 이때다.
 

베르사이유 궁전엔 악취왕이 살았는데

 
늦둥이를 본 아버지는 엄격한 예의 교육에 매달렸다. 사랑은 주지도 못하고 엄하게만 키우다 갑자기 죽었다. 또다시 4살짜리 아기왕. 어머니 앤의 섭정은 당연하다. 그 와중에 9세가 되던 1648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소위 ‘프롱드의 난’이다. 그 탓인가. 루이 14세는 커가면서 막강 군대를 만들었다. 귀족들이 대들지 못하도록 절대 군주제도를 지켰다. 군대 키우고 무기 사고 전쟁하고. 그 바람에 국고는 늘 텅텅 비었고 거리엔 거지들이 들끓었다. 당시 프랑스의 평균 수명이 25살 이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프랑스인들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상상이 간다.
 
국민은 거지로 사는데 루이 14세는 폼 잡는 일만 했다. 무려 24년에 걸쳐 베르사이유 궁전이 지어졌다. 돈으로 처바른 궁 안에다 모든 귀족 일가를 불러 살게 했다. 왜 그랬을까? 루이 14세는 9살 어린 시절 프롱드의 난을 겪으며 귀족들의 반항과 오만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 경험 탓인지 귀족들을 입궁시켜 딴짓 못 하도록 자신의 손아귀에서 좌지우지하기 위해서였다는 풀이다.
 
몽땅 모여 산 베르사이유 궁전의 일상은 어땠을까. 왕의 일과는 아침 8시에 시작된다. ‘누가 왕에게 옷을 입혔는가’ ‘변기는 누가 대령했는가’ 같은 소소한 일들로 아침부터 귀족 간 아첨 경쟁이 치열했다. 
 
루이 14세는 대식가로도 유명했다. 특히 저녁 만찬은 파티에 참석하는 인원 외에도 몇백 명의 구경꾼들이 식사 장면을 지켜보며 수군거렸다. 왕의 식사를 보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었다. 매일 저녁엔 파티와 가장무도회가 열렸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체력이 없으면 얼마나 버티겠나. 루이 14세는 저질 체력이 된 귀족들에게 딴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림 4〉 이야생트 리고, 루이 14세, 루브르 박물관
〈그림4〉는 이야생트리고가 그린 루이 14세의 초상화이다. 이 초상화는 루이 14세의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먼저 그림에 전체적으로 부르봉 왕조 문양인 황금 백합 무늬가 보인다. 담비 털로 된 파란색 대관식 망토를 입은 위로는 성령 기사단의 훈장이 달린 금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다. 머리에는 검은 가발(풀 버텀 위그)을 착용하고 큰 가발의 영향으로 칼라는 이전의 거추장스러운 러플 대신 레이스로 된 크라바트를 착용하고 있다. 안에 입은 블라우스와 바지는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형태인 리본 장식이 보인다. 발에는 빨간 굽이 달린 힐을 신고 있다. 왕의 오른손에는 백합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왕 홀을 쥐고 있고 허리춤엔 대관식용 검을 차고 있다. 백합 무늬의 방석 위에는 왕관과 정의의 손이 올려져 있다. 이 초상화는 루이 14세의 권위를 잘 나타낸 대표적인 초상화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루이 14세에게는 또 하나의 별명이 있었다. 바로 ‘악취왕’이다. 당시 아름다운 베르사이유 궁전에 수많은 사람이 살면서 배출한 오물로 악취가 진동했다. 하긴 궁 밖도 오물투성이. 마차가 지나가면 집 담벼락은 말똥과 사람똥이 뒤섞여 튀었다.
 
멋진 궁 안에서는 오물을 밟지 않으려 하이힐을 신었다. 또한 몸에 물이 닿으면 병이 생긴다는 이상한 미신이 돌아 몸을 씻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귀족들은 악취를 가릴 수 있는 향수를 진하게 뿌리고 다녔다.
 
루이 14세에게는 3명의 주치의가 있었다. 그중 소르본 의대 출신 주치의 ‘다캉’은 치아가 위험한 질병의 근원이라 믿었다. 물론 그 시절은 지금처럼 양치하지 않아 이가 썩는 고통을 당했고 그러다 보니 충치로 인해 마취도 없이 이를 뽑는 게 다반사였다.
 
주치의 다캉은 왕의 건강을 위해 이를 몽땅 뽑도록 건의했다. 지금도 프랑스 디저트는 마카롱처럼 달기로 유명한데 루이 14세 역시 단 걸 무척 좋아했다. 어차피 충치로 뽑을 거 미리 뽑아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 처방이었는데 왕은 오케이 했다.
 
마취도 없이 왕의 아랫니를 모두 뽑다 턱은 금이 갔다. 윗니를 뽑다가는 그만 입천장엔 큰 구멍이 뚫렸다. 뚫린 입천장은 쇠막대로 여러 번 지져 지혈을 시켜야 했다. 다행히 죽지 않고 금 간 아래턱은 완치되었으나 입천장은 그대로 뚫려 음식물을 먹을 때마다 코를 향해 뚫려 있는 구멍으로 음식물 건더기가 나왔다. 심한 악취가 나는 건 당연했다. 또한 치아가 없으므로 10~12시간 끓인 음식을 섭취했는데 씹지 않고 넘긴 음식물은 항상 소화불량을 일으켜 자주 변기에 앉아 일을 봐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속을 비워 두는 것이 좋다 하여 설사약 처방까지. 다캉은 현대 의학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방만 일삼았다. 계속되는 설사로 인해 항문에 생긴 커다란 종기는 마취 없이 잘라내는 수술을 반복해야 했으며 항상 두통과 통풍에 시달리는 등 평생을 신체적 고통 속에서 살았다. 의사가 개인 원한이라도 있었던 걸까. 생고생의 연속이었다. 
 
죽음에 가까운 여러 번의 수술에도 루이 14세는 직무에는 소홀함이 없었다. 절대 왕정을 지키며 수많은 전쟁터에 직접 참전해 프랑스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그럴수록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재정도 위기를 맞았다. 절대 왕정. 재정의 파탄. 민생고의 연속. 때는 17세기에서 18세기 초로 넘어가고 있었다. 바로크 시대였다.
 

금수저 꽃미남 화가 루벤스

 
바로크란 불규칙하고 일그러진 형태의 진주를 의미한다. 이 시기는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표현하고 정형화된 것에서 탈피하고자 했다. 감정 분출을 두려워하지 않고 감각적이고 적극적인 표현은 생동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림 5〉 루벤스, 인동덩굴 밑에 앉아 있는 화가와 그의 아내,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바로크 미술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역동적이고 활력이 넘쳤다.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루벤스(그림 5)가 손꼽힌다. 루벤스는 돈 많은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화가가 살아있는 동안 가난을 면치 못한 반면루벤스는 부와 명예를 온몸 가득 안고 살아가던 몇  안 되는 금수저 화가였다. 루벤스의 그림은 풍부한 색상과 역동적인 선으로 인체를 실물보다 풍만하고 강렬하게 표현해 ‘Rubensian’이란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귀족적 분위기에 외모까지 잘생겨 주위의 부러움과 시선을 받으며 외교관과 화가로 인기를 끌었다.
 
궁정 매너까지 갖춘 금수저 꽃미남 루벤스는 경영마인드도 대단했던 것 같다. 당시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은 너도나도 루벤스에게 의뢰해 자신들의 모습을 그려 달라고 매달렸다. 그림 주문이 쇄도하자 그는 화가들이 분업해 그림을 그리도록 하는 제작시스템을 활용했다. 그림 공장이라고나 할까.
 
〈그림 6〉 루벤스, 마르세이유에 도착하는 마리 드 메르시스, 루브르 박물관
앙리 4세의 왕비 마리 드 메디치 역시 루벤스에게 자신의 일생을 그려 줄 것을 주문해 21점의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라는 연작을 남기기도 했다. 〈그림 6〉은 연작물 중 ‘마르세이유에 상륙하는 마리 드 메디치’라는 작품이다. 먼저 왼쪽 상단에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 보인다. 주인공인 왕비의 양옆에는 숙모와 언니가 시중을 들고 있고 그 오른쪽엔 신화적 내용을 첨가해 소문의 여신 파마가 쌍나팔을 불면서 마리를 맞이하고 있다. 하단 왼쪽으론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그의 아들 트리톤, 3명의 딸이 배를 끌고 온 것처럼 표현했다. 루벤스는 마리를 신격화하지 않고 오히려 여러 신의 보호를 받는 모습으로 표현해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대단한 존재로 느끼도록 부각시켰다. 그저 결혼하러 마르세이유에 온 장면을 이리 신격화했으니 마리 드 메디치가 얼마나 흡족해했을지 상상하고도 남는다. 
 

그림을 보면 패션을 안다

 
바로크 미술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생동감이 넘치는데 바로크 패션은 어땠을까? 17세기 이전에는 스페인 모드가 유행했지만 1588년 영국과의 해상전에서 스페인이 대패한 후 프랑스가 패션의 중심이 됐다. 또한 인쇄술의 발달과 ‘판도라’라 불리는 패션인형의 인기로 프랑스는 패션의 중심지로서 화려함을 나타냈다. 
 
복식은 그 시대의 문화집합체이다. 바로크의 의미인 불규칙에 자유로움과 율동적인 면을 강조하고자 복식에 리본 등으로 과도한 장식을 했다. 그러다 보니 르네상스 시대와는 다른 형태로 실루엣이 확장됐다. 그러나 유럽의 모든 나라가 화려한 것은 아니었다.
 
네덜란드도 이 시기에 상공업 국가로 발전하며 전성기를 누렸으나 시민 계급의 성장으로 복식은 시민풍을 띄게 되었고, 이는 복식사상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영국은 1640년에서 1660년 사이에 일어난 청교도 혁명으로 인한 금욕 정치, 1665년 흑사병, 1666년 런던 대화재 등으로 검소한 모습을 띠게 된다. 
 
〈그림 7〉 피에르 미냐르, 빌라세르프의 후작 에두아르 콜베르의 초상, 베르사이유와 트리아농궁
남성복은 일반적으로 바로크 초기에는 르네상스 시대에 사용했던 러프칼라를 그대로 사용했으나 이 시기에 남성들에게 거대한 가발이 유행하자 편리성을 위해 다양한 형태의 칼라가 사용됐다. 러플 대신 현대의 넥타이 초기 형태인 크라바트(그림 7)나 스카프 형태를 단추구멍에 끼워 넣는 형태인 스테인커크를 목에 두르기도 했다.
 
〈그림 8〉에서는 1659년 피레네 조약을 하는 루이 14세와 스페인왕 펠리페 4세, 그리고 루이 14세의 왕비가 되는 마리 테레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루이 14세를 기준으로 왼쪽의 프랑스 귀족들은 화려한 바로크 패션인 렝그라브(스커트 형태로 화려한 색의 리본 다발 장식이 붙은 바지)를 착용하고 소매와 어깨, 허리, 모자, 심지어 슈즈의 발등에까지 리본 다발을 부착하고 있다.
 
이와 달리 그림 오른쪽의 펠리페 4세가 입은 스페인의 귀족 복식은 네덜란드 시민복의 영향으로 간편해진 복식의 형태를 하고 망토를 착용하고 있다.
〈그림 8〉 자크 라우모스니에, 루이 14세와 펠리페 4세의 평화회담, 테세미술관
 
뒤쪽의 마리 테레즈 의상을 보자. 소매엔 심을 넣고 리본으로 묶어 퍼프 형태로 하고 상의는 콜셋으로 꽉 조여 갑옷처럼 볼륨감을 없앴지만 스커트는 양옆으로 팽창된 스페인 특유의 스타일을 하고 있다. 이런 복식을 입고 있는 마리 테레즈의 그림은 단골처럼 바로크 미술 전시회마다 벨라스케스의 대표적인 작품(그림 9) 속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림 9〉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프라도 미술관
수많은 전쟁을 치른 태양왕도 죽기 전 루이 15세에게 유언으로 이웃 나라와의 전쟁은 절대로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한다. 평생을 지독한 통증을 동반하고 살았던 루이 14세. 만일 그가 주치의 다캉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를 몽땅 다 뽑는 고통도, 그로 인해 걸렸던 만성 소화불량도 없었을 텐데. 육체의 고통이 없었다면 좀 더 현명하고 어진 왕이 됐을까. 아니면 더 많은 전쟁으로 백성들을 파탄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희대의 전쟁광이 됐을까. 역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라의숙 교수는 대원대학 교수와 경희대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패션 칼럼니스트이자 섬유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경희대에 출강 중이다.    

라의숙 교수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설립 두 달 만에 네이버 ‘픽’…스탠퍼드 출신 창업자의 AI 비전은?

2차바이오텍, 신주 발행 등 748억원 수혈…“재생의료·CDMO 투자”

3알바생이 ‘급구’로 직접 뽑는 ‘착한가게’

4“삼성이 하면 역시 다르네”…진출 1년 만에 OLED 모니터 시장 제패

5 ‘여자친구 살해’ 20대 의대생 구속영장 발부

6‘네이버 색채’ 지우는 라인야후…이사진서 한국인 빼고 ‘기술 독립’ 선언

7NCT드림이 이끈 SM 1Q 실적…멀티 프로덕션 구축에 수익성은 악화

8삼성메디슨, 프랑스 AI 스타트업 ‘소니오’ 품는다…“우수 인력 확보”

9데일리펀딩, SaaS 내재화해 지속 성장 거버넌스 구축…흑자 전환 시동

실시간 뉴스

1설립 두 달 만에 네이버 ‘픽’…스탠퍼드 출신 창업자의 AI 비전은?

2차바이오텍, 신주 발행 등 748억원 수혈…“재생의료·CDMO 투자”

3알바생이 ‘급구’로 직접 뽑는 ‘착한가게’

4“삼성이 하면 역시 다르네”…진출 1년 만에 OLED 모니터 시장 제패

5 ‘여자친구 살해’ 20대 의대생 구속영장 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