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삼구 금호그룹 부회장 인물탐구…평사원엔 '아버지', 간부에겐 '시어머니'
박삼구 금호그룹 부회장 인물탐구…평사원엔 '아버지', 간부에겐 '시어머니'
| 박삼구 금호그룹 부회장 | 박삼구(57) 금호그룹 부회장은 차기 그룹회장으로 유력하다. 바로 윗형인 고 박정구 그룹회장이 최근 별세한데다가, 그 자신이 사실상 2001년 9월부터 그룹의 얼굴로서, 그룹의 대표로서 일을 해왔기 때문이다. 직원들에게 박삼구 부회장은 ‘두얼굴’의 경영자다. 어떤 때는 아버지처럼 자애로운 측면이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엄한 시어머니가 된다. 전자는 평사원들이 느끼는 이미지고, 후자는 간부사원들이 느끼는 이미지다. 우선 평사원들이 보는 시각부터 살펴보자. 박삼구 부회장은 내일 모레면 60세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젊게 산다. 이름이 나타내듯 그는 영원한 ‘39(삼구)세’라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구내식당에서 임직원 구분 없이 줄 서서 점심식사를 할 때는 그의 소탈함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전용 엘리베이터라든지, 전용 수행비서라든지 그런 게 그에겐 아예 없다. 비서실 직원도 남자 1명, 여자 1명이 전부다. 대외모임이나 행사가 있으면, 행사 성격에 따라서 담당임원들이 각각 박삼구 부회장을 모시고 갈 뿐이다. 임원들이 바쁘면 혼자서 모임에 나가는 경우도 많다. 매년 명절 연휴 때가 되면 연휴 첫날 그는 반드시 새벽 6시에 출근해서 약 6시간 동안 온 공항을 돌며 예약·발권·정비·조종 등에서 근무하는 평사원들을 등을 두드려주며 격려한다. 마치 따뜻한 아버지처럼. “고향에 가지 못하고 일하는 여러분들 때문에 고객들이 안전하게 고향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박삼구 부회장은 오너 5형제 중에서 가장 활달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간부사원들에게 그는 무척 엄하다. 특히 업무처리가 허술한 간부사원들을 엄청 깬다. 그에게 보고를 하다 빈틈을 보여 혼쭐이 난 아시아나항공 영업팀 간부가 한둘이 아니다. 보고하는 수치가 정확하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노선별 영업실적·매출·순이익·분기별 매출·분기별 이익·영업이익률·1인당 원가 등 모든 경영지표를 훤하게 꿰차고 있어야 한다.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있다간 경을 치기 십상이다. 박부회장의 지론은 이렇다. 담당간부들이 경영지표를 꿰뚫고 있어야 제대로 된 영업전략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얼마를 들여서 얼마를 벌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어디로 가서 어떻게 상품을 팔 수 있는지 등의 전략 수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돈되는 수치’에 밝지 않으면 항공사 영업팀장이나 지점장을 할 생각은 아예 버려야 한다. 그는 애매한 표현을 싫어한다. 구체적으로 개념을 정립해서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자는 주의다. 철두철미한 사전 분석 절차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아시아나항공이 손님들에게 서비스를 잘 하자’는 말은 하나마나다. 그는 그래서 서비스도 참신한 서비스·정성어린 서비스·상냥한 서비스·고급스런 서비스로 각각 구분한 다음, 각각의 서비스 개념을 구체화시켰고, 이를 다시 매뉴얼로 만들어서 직원들에게 이 매뉴얼대로 따르게 하도록 지시했다. 아시아나항공 국제IR(투자설명회)을 할 때도 직접 투자자들에게 설명할 때가 많다. 완벽주의자의 색깔이 묻어나오는 대목이다. 그의 식견·신뢰성 때문에 외국투자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기도 한다. 그는 수치경영 신봉자다. 무엇이든지 수치로 표현할 수 없다면 존재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지난 5월께 박삼구 부회장은 금호그룹 역사상 최초로 임원·부장급 전계열사 간부들을 그룹연수원에 소집해 회계 중심의 수치경영 기법을 가르치는, 강도 높은 합숙훈련을 실시하기도 했었다. 그는 재계의 어떤 총수보다도 기업문화를 중시한다. 총수의 경영철학이 담긴 기업문화가 직원들 사이에 전파되어야만 이 회사도 반듯하게 커 나갈 수 있다는 신념에서다. 그는 아시아나항공 사장 시절 아예 자신의 경영철학과 경영이념을 담은 기업문화 책자를 만들어 전직원이 수시로 읽도록 했다. 이 책자에 담긴 내용대로 실천하는 직원들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경영철학이 담긴 ‘21세기 최고 항공사 실현을 위한 아시아나의 기업문화’와 ‘아시아나 경영이념과 기업문화’는 직원들의 필독서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아시아나항공 초창기인 1991년 사장으로 부임한 그는 조화라는 말을 무척 좋아한다. 아예 이를 기업문화로 정착시키려고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는 “아시아나를 싱가포르항공 같은 세계적인 항공사로 키우기 위해서는 조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예약·발권·정비사·조종사·승무원·케이터링(기내식사) 등 8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직종으로 이루어진 항공운송업은 조화를 첫번째 기업문화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가 내세운 ‘음악경영’도 같은 맥락이다. 96년 당시 박삼구 아시아나 사장은 모차르트 25번 교향곡이 담긴 CD와 음악해설서를 자비로 사서, 임원과 부장들에게 나눠주면서 “이 음악을 1백번을 들으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유로운 정밀하게 조화를 이룬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그의 메시지가 담긴 행동이다. 그는 늘 언로를 터놓고 지낸다. 부하들과의 대화도 즐긴다. 대표적인 사례가 실명으로 운영되다가 실명으로 한 6개월간 운영되던 금호그룹 인트라넷인 ‘텔레피아’의 자유게시판을 다시 비실명으로 복구한 것이다. 비실명으로 만들어서 회사정책에 대한 비판이나, 경영진에 대한 불만을 마음껏 표출하게 하려는 조치였다. 실명으로 인해 상하간 의견이 막히는 것보다는 비실명으로 대화통로가 트이게 하자는 뜻에서였다. 고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자의 3남인 박삼구 부회장의 약력은 의외로 단출하다. 22살부터 금호와 함께 살았고, 금호 울타리를 나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광주서중·광주일고를 거쳐 67년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그해에 삼양타이어(금호타이어의 전신)에 들어가 경영자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당시 유학도 꿈꾸었지만, 당시 금호의 경우 광주여객(현재 금호고속)이 서울-광주간 노선을 신설하는 등 급속한 확장기에 있었기에 선친으로서는 똑똑한 아들이 유학 대신에 빨리 회사에 들어와서 일을 하길 바랐다. 박삼구 부회장은 이후 79년 금호실업 부사장, 80년 금호실업 사장, 84년 ㈜금호 부사장, 90년 ㈜금호 사장 겸 그룹 회장부속실장, 91 아시아나항공 사장, 2001년 그룹 부회장이란 순탄한 승진과정을 밟아왔다. 그의 경영방식은 부친의 것을 빼닮았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이와 관련된 일화 하나. 금호그룹의 첫 사업다각화는 54년 5월1일 전남제사를 인수한 것이다. 전남제사는 금호그룹이 버스사업 이외에 제일 먼저 손을 댄 사업부문이다. 전남제사 인수는 당시 기업경영적 관점보다는 지역사회 기여라는 측면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 전남제사는 경영이 어려워 적자만 쌓이고 있었던 부실기업이었다. 부친이 전남제사 인수를 권유받았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동생 동복이 “형님이 너무 욕심내는 거 아니요?”라고 적극 말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회사 형편도 어렵고, 제사공장을 제대로 경영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저대로 놔 둬서 될 일이냐? 저 공장에 매달린 입이 얼만디. 공장직공들 있제, 누에고치 기르는 수많은 농가가 있제…. 누가 나서서 살려도 살려야 되지 않겄냐?” 박삼구 부회장은 IMF시절 기왕에 뽑은 신입사원들을 해고하지 않고 1년 동안 무급휴직시킨 다음 모두 다시 채용했다. 이들이 모두 재입사하던 날 그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무인 고용에 한몫을 했다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그는 IMF 때 임직원들에게 “우리들 선배들이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 무급휴직 중인 후배사원들이 지금 회사를 다니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 더욱 열심히 해서 우리 후배들이 빨리 재입사할 수 있게 하자”고 독려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무나 고용하고 끝까지 고용을 책임질 것이란 생각을 하는 건 어리석다. 그는 기업경영을 할 때 온정주의나 적당주의는 철저히 배격한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은 싫어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는 엄청난 워크홀릭이다. 보통 아침 7시께면 서울 종로 신문로 본사에 도착해서 일하기 시작한다. 이메일도 직접 체크한다. 그룹총수지만 남을 시키는 법이 없다. 간혹 사무실이 있는 김포공항 아시아나타운 지하 수영장에서 새벽수영을 하거나, 새벽에 근무 나가는 승무원·조종사를 만나서 격려를 하면서 하루를 열기도 한다. 박삼구 부회장은 금호그룹에서만 35년간 근무한 그룹의 산 증인이다. 한데 그의 경영능력이 검증된 건 아무래도 아시아나항공 시절일 것이다. 88년 무에서 시작한 아시아나항공을 불과 10년 만에 한국의 대표적인 항공사로 키운 것은 분명히 그의 공이라는 게 그룹측 설명이다. 특히 93년 아시아나항공의 목포사고 이후에는 그는 안전에 치중하는 경영을 하면서 경쟁사와 차별화시키는 경영전략을 구사했다. 당시 그는 회사의 ‘안전’광고에 그 자신이 출연하는 한편 직원들에게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라는 전화 응대 인사말을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광고 내용과 실제 현실에서의 실천사항은 반드시 일치되어야 한다는 그의 소신 때문이었다. 그는 사실 아시아나항공 창업 당시 실질적인 항공사업 산파역을 맡은 뒤 91년에는 아예 아시아나항공 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까지 아시아나를 자식처럼 키워온 인물이다. 그렇다고 아시아나가 순탄하게 커온 건 아니다. 최대 위기는 역시 IMF 때였다. 환율인상에다 고객수마저 급감하면서 아시아나는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이때 그는 항공기 숫자를 50대에서 42대로 줄이고 돈 안 되는 노선을 폐지하는 등 구조조종 작업을 진두진휘했다. 글로벌 항공사라고 한다면 누구나 취항하는 하와이노선을 과감히 없애버린 것도 이 무렵 일이다. 당시 하와이노선은 1백명 타는 비행기에 1백80명을 태우고 가도 적자라고 했던, 대표적인 덤핑노선 이었다. 관광지로 유명한 하와이 노선은 반드시 들어가야 글로벌 항공사라고 업계에선 쳐주었지만, 박삼구 사장은 과감히 이 노선을 잘라 버렸다. 이같은 구조조정 작업을 통해 그는 아시아나항공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시아나측은 미국의 유명한 항공잡지인 에어트랜드포트월드가 지난해 2월 올해의 고객서비스상(패신저 서비스 어워드)를 아시아나에게 수여한 것이나, 올해 아시아나가 전세계 최대 항공동맹체인 스타 얼라이언스에 가입한 것이나 모두, 박부회장의 역량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사례들이다. 박부회장은 화학분야에서도 탁월한 경영수완을 발휘했다. 금호그룹의 알짜사업으로 큰 석유화학사업을 하자고 주창한 이가 바로 그다. 금호석유화학은 현재 박부회장를 비롯해 박성용 명예회장·박찬구 금호석유화학 사장 등 이른바 ‘형제 오너들’이 간여하고 있는 그룹의 지주회사격이다. 금호그룹은 운수사업에서 출발한 다음타이어사업(금호타이어)을 시작했다. 하지만 60년대 말 타이어 생산에는 고무가 필수적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천연고무가 생산되지 않아서 원자재 구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당시 삼남인 삼구는 아버지에게 “타이어원료인 합성고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석유화학사업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제의했고, 금호는 삼구에게 설립 준비를 일임하게 된다. 68년 한국합성고무㈜ 전무를 겸임하면서 화학사업의 틀을 다졌는데, 그의 나이가 불과 23살이었다. 한국합성고무는 70년 삼양타이어와 미쓰이물산 50대 50으로 합작해서 설립한 한국합성고무공업주식회사로 흡수된다. 이 한국합성고무공업주식회사가 바로 오늘날 금호석유화학의 전신이다. 금호석유화학은 국내 최고의 합성고무·합성수지 생산업체로서, 국내 화학업계에서 선두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그는 친화력과 기억력이 뛰어나기로도 유명하다. 재계·업계·언론계 모임에 가도 그는 가만히 있질 않고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인사를 나눈다. 그런 자리는 보통 의례적이고 딱딱한 자리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그는 다르다. 오히려 사람 사귀는 자리로 활용한다. 또 한번 인사를 나누면 그 사람 이름은 거의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한다. 쌓이는 스트레스는 보통 주말에 골프로 푸는데, 거의 프로급 수준이다. 70대타의 싱글 수준인데, 보통 75·76타를 친다는 전언이다. 그룹 총수 자리를 눈앞에 둔 그의 발등에 떨어진 불은 그룹 구조조정 작업이다. IMF 이후 그룹 구조조정 작업에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다. 형제경영이라는 그룹 특성상 박삼구 부회장은 형인 박성용 명예회장·고 박정구 회장과 동생인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사장 등과 같이 그룹의 운명을 결정짓는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해 왔다. 특히 2001년 1월 그룹 부회장으로 올라서면서부터는 아예 주도적으로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그는 일단 9월까지 금호산업 타이어사업 부문 매각, 한국도심공항터미널 지분매각, 아시아나공항서비스 외자유치 등 ‘큰 작업들’을 마무리해서 금호그룹을 내실있는 재계 9위(자산 기준) 그룹으로 다진 다음에 제2도약을 꾀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구조조정을 통해 그룹 부채비율을 260%에서 150%로 떨어뜨리고 시중에 나돌고 있는 금호그룹 유동성 소문부터 빨리 불식시켜 버려야 하는 게 그의 급선무다. 박삼구 부회장은 ‘집념의 금호’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선친이 46세에 첫사업을 시작해서 이만한 굴지의 그룹을 일으킨 건 ‘집념의 금호’라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한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지금의 금호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는 ‘완벽 스타일’인데, 실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매우 논리적인 것으로 소문나 있다. 그가 문화인·체육인들을 우대하고 이들과 교류하는 것도 선친과 닮았다. 선친은 예향 광주의 예술인들을 위해 금호문화회관을 짓고 이들을 지원했는데, 박부회장도 93년부터 정트리오·장영주·김혜정·박찬호·김병현 등 음악·체육·예술계 인사들에게 무료항공권을 제공하면서 밀어주고 있다. 부인과 슬하에 세창(27·연세대 생물학과 졸업)과 세진(24·이화여대 가정학과 졸업) 등 남매를 두고 있는데, 세창씨는 외국인회사에 다니고, 세진씨는 유학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