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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들·워싱턴편(1)] 워싱턴 식품 도매상권 ‘내 손안에’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들·워싱턴편(1)] 워싱턴 식품 도매상권 ‘내 손안에’

최상오 삼왕프로듀스 대표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지난 20여년간 플로리다마켓의 한인 상권도 참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수도 한가운데서 ‘작지만 매운 조선고추’처럼 악착같이 일하는 모습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계 정치의 중심지인 미국 워싱턴D.C.의 북동부 지역에 자리잡은 플로리다마켓의 산증인, 최상오 삼왕프로듀스 대표. 지난 1974년 워싱턴D.C.의 유일한 대형 도매상권인 플로리다마켓에 한인으론 첫 진출, 동양 식품 도매업체를 연 최대표는 자타가 공인하는 이곳의 터줏대감이다. 워싱턴D.C.의 플로리다마켓은 미주 한인 동포들로서는 중요한 경제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뉴욕 등 한인 동포들이 소매상으로 자리를 잡은 곳은 많지만 유태계 등이 선점한 도매업계에 진출, 상권을 지배하는 곳은 플로리다마켓이 대표적이기 때문. 지금은 플로리다마켓이 워싱턴D.C.에서 가장 바쁘게 돌아가는 시장으로 자리잡았지만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 워싱턴 일원에서 이민생활하는 한인동포들의 상당수는 워싱턴D.C.의 우범지대이자 흑인 거주지역인 동부지역을 ‘검은 동네’라 부르며 꺼린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20여년 전 최대표가 식품점의 문을 연 것은 위험한 도전이었다. 최대표는 “당시 플로리다마켓은 상가건물이 작은 데다 상가 세 곳 중 한 곳이 폐업한 상태였다. 게다가 쓰레기가 널려 있어 시장 일대가 황무지를 연상케 했다”며 “남들은 우범지대라고 여기는 곳이었지만 ‘내 가게를 운영한다’는 설레임으로 위험을 감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남들은 폐업하고 떠나는 상황에서 가게를 구하기는 예상보다 쉬웠다. 일단 가게 문을 연 뒤 최대표는 형제들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에서 동양 식품점인 서울식품을 운영하던 부친 최명호옹(작고)으로부터 가훈처럼 물려받은 ‘성실보다 확실한 성공비결은 없다’는 원칙에 충실했다. 하루종일 일한 뒤 가게에서 새우잠 자기가 일쑤여서 일주일에 집으로 퇴근하는 날은 2∼3일에 불과했다. 플로리다마켓 진출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탈리아계·그리스계 등 기존 상인들의 직·간접적인 방해가 계속됐다. 특히 이곳에서 집안 대대로 도매업을 하던 유태계 상인들의 방해가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최대표는 “플로리다마켓에서 일했던 한인이라면 유대인 상인들의 악명을 잊지 못할 것”이라며 “한인 상인이 워싱턴D.C.에서 번 돈을 한국으로 빼돌린다고 비방하기 일쑤였다”고 회고했다. 최대표는 이들의 방해로 야채류 등 물건을 공급받기 어려웠다. 최대표는 미 동부뿐 아니라 캘리포니아·중남미 등으로 눈을 돌려 새로운 거래선을 뚫었다. 또 워싱턴D.C. 일원에 한인과 베트남계 등 아시아계가 증가하자 동양 야채의 물량 확보에 힘썼다. 대규모로 농사를 짓는 중국계 농민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계약을 맺기도 했다. 특히 배추는 당시 한인 동포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구하기 힘든 야채였다. 이 때문에 동포들은 양배추를 고춧가루 등 양념에 버무려 김치 대용으로 먹었다. 김치는 그야말로 ‘금치’였던 때가 70년대의 미국 이민사회였다. 워싱턴D.C. 일원뿐 아니라 북쪽으로는 뉴욕·뉴저지와 남쪽으로는 사우스캐롤라이나·조지아·플로리다 등에서도 고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최대표의 성공에 자극받은 한인 동포들이 플로리다마켓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워싱턴D.C. 일원의 한인 커뮤니티의 성장세도 동양 식품점 등 한인도매업체의 설립을 촉진했다. 플로리다마켓에는 식료품점·캐쉬&캐리(현금 거래만 하며 물건 배달을 하지 않는 가게) 등 대형 도매업체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침체됐던 플로리다마켓이 한인 동포 상인 등을 중심으로 활성화되자 워싱턴D.C. 시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의 손길을 보냈다. 황폐했던 플로리다마켓에 진출해 침체일로인 워싱턴D.C.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한인 상인들을 워싱턴D.C. 시 정부가 주목하기 시작했다. 84년 9월21일 플로리다마켓에서는 워싱턴D.C.의 메리온 베리 시장 등 시 정부 관계자들과 한인 동포 상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캐피털 씨티 마켓(Capital City Market) 선포식’이 거행됐다. 워싱턴D.C. 정부가 플로리다마켓에 새 이름을 지어주며 이 일대를 새로운 도매업체 단지로 재개발하겠다고 나선 것. ‘캐피털 씨티 마켓’이란 새 이름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이나 고객들은 아직도 ‘플로리다마켓’이란 옛이름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날 이후 플로리다마켓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널찍한 도로와 새로운 상가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 워싱턴D.C. 정부는 ‘한인 상인 1호’인 최상오 대표를 적극 지원했다. 최대표는 워싱턴D.C.로부터 6만평방피트 넓이의 대지를 임대받아 85년 ‘태양종합상가’를 출범시켰다. 기존의 삼왕프로듀스를 포함한 대형 도매단지를 형성하며 구멍가게에서 명실상부한 대형 도매업체로 탈바꿈한 것이다. 한인 업체의 수가 증가하면서 자연스럽게 한인 친목단체가 형성됐다. 88년 9월22일 최상오 대표를 비롯해 박재선·최정섭·조한용(현재 전북 익산시장)씨 등이 모여 ‘플로리다마켓 상조회’를 조직했다. 당시 창단 회원의 수는 29명. 최대표는 4대 회장을 맡았다. 90년대 초에는 한인업체가 60여개로 늘어나며 전성기를 누렸다. 업종도 식료품점 외에 캐쉬&캐리· 두부 전문점·우유 유통업체·잡화점 등으로 다양해졌다. 하지만 이때부터 중국계 상인들을 비롯해 최근에는 나이지리아계가 진출하는 등 플로리다마켓의 상권이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2000년대 들어 한인업체들은 40여개로 그 수가 줄어들었다. 은퇴 후 다른 주나 본국으로 이주하는 상인들이 늘어났기 때문. 박재선씨는 LA로, 조한용씨는 본국으로 가 전북 익산시장이 됐다. 최대표는 “경제적 안정도 찾았고 자녀들도 장성했으니 이젠 그만 은퇴하는 것이 어떠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럴 때마다 최대표는 “‘플로리다마켓은 내 고향이자 분신’이라고 버럭 화를 낸다”고 말했다. 플로리다마켓의 삼왕프로듀스 2층에 자리잡은 사무실에서 최대표와 몇 차례 마주 앉았지만 조용히 얘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다른 주에 있는 상인들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벨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1층 창고에서 올라온 직원들과 소매상들이 쉴새없이 노크를 했다. 삼왕프로듀스 창고를 나서는 기자에게 최대표가 쩌렁쩌렁 울리는 큰 소리로 주문했다. “플로리다마켓 상인에게는 정년이 없어. 힘닿는 한 이곳에 남아 있을 거라구. 그리고 나이는 밝히지 말아줘요. 그냥 플로리다마켓에 겁없이 뛰어든 ‘나이를 먹지 않는 청년’이라고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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