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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큰 사외이사, 좋은 기업 만든다

목소리 큰 사외이사, 좋은 기업 만든다

이사회의 독립성이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효과적인 해결책으로 떠오르면서 사외이사 중심의 이사회를 운영하고 있는 KT.국민은행.KT&G 가 주목받고 있다
지난 2일 열린 KT(옛 한국통신)의 이사회에서는 안건 하나를 두고 전에 없던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 주제는 KT가 지난해부터 추진해 오던 프로농구단 인수가 과연 회사와 주주에게 이익이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안건은 원래 4월24일 이사회에서 다뤄질 예정이었으나 두 명의 이사가 불참하는 바람에 상정되지 못했다. 15명의 이사 중 12명의 이사가 참석한 이 날의 이사회에서 주요 안건으로 제출된 프로농구단 인수는 한 회사 관계자의 말처럼 “다 된 밥이어서 떠먹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수년 전부터 농구단 인수를 추진해 왔던 자회사 KTF로부터 농구단 인수계획을 넘겨받았던 KT는 올 초 스포츠마케팅 관계자까지 영입, 인수작업을 거의 끝내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50억원대의 인수 비용 또한 준비돼 있었다. 하지만 ‘프로농구단 인수 건’은 이 날 이사회에서 ‘없었던 일’로 끝났다. 농구단 인수의 득과 실에 대해 뜨거운 논쟁이 오갔으나, 몇 명의 사외이사가 ‘농구단 인수가 회사와 주주들에게 별 이득이 안 된다’며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려면 차라리 녹화사업을 하는 게 낫다’는 등의 논리를 굽히지 않았던 것. 상황이 진전을 보이지 않자 끈기있게 설득을 하던 이용경 사장은 “그렇게 문제가 많은 일이라면 없었던 일로 하자”고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인수가 무산된 데 대해 KT의 한 관계자는 “사외이사의 입김이 이렇게 크게 작용할 줄 몰랐다”며 “전 직원들이 아쉬워했다”고 불만을 표시했으나, 외국계 증권사들은 KT의 포기 결정을 환영했다. 자사주 매입과 농구단 인수 포기 등이 기업지배구조의 우수성을 다시 한 번 알려준 것이라는 평가였다. 이 날 외국계 증권사들은 대부분 KT에 대해 ‘매수 유지’를 권고했다.

사외이사 위상이 회사의 위상 사외이사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와 함께 사외이사들이 높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회사들에 대한 평가도 높아지고 있다. 지난 6일 프랑스계 국제투자은행 크레디리요네(CLSA)와 아시아 기업지배구조협회(ACGA)가 발표한 ‘2003년 아시아 기업지배구조 감시보고서’에서 지배구조 개선 실적이 좋은 기업 톱10에 든 4개 한국 기업들 또한 수백 가지의 항목 중 이사회의 독립된 운영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시아 10개국 3백80개 기업 중 톱10에 든 KT(옛 한국통신)·KT&G(옛 담배인삼공사)·국민은행·삼성화재 중 삼성화재를 제외한 3개사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무엇보다 공기업 태생으로 지배구조상 현재는 ‘주인 없는 회사’가 된 점과 사외이사가 이사회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며 사외이사 중심의 경영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KT는 15명의 이사 중 사외이사가 9명(60%)이고, 국민은행은 16명 중 12명(75%), KT&G는 13명 중 10명(76.9%)이 사외이사다. 이에 대해 정광선 기업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 원장(중앙대 교수)은 “여러가지 지배구조 개선 방법이 있지만 사실 이사회만 잘 운영된다면 현재 한국 기업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많은 문제점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사회의 독립성이 좋은 기업 만들기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조사에서 1백점 만점에 92.9점으로 가장 좋은 점수를 받은 KT는 지난해 완전 민영화되면서 선진국형 지배구조를 정착시켜 가고 있다. 특히 여타 기업에 비해 3∼4배나 많은 횟수의 이사회(2002년 41회)를 여는 등 사외이사 중심의 경영을 활발하게 해나가고 있다. 내부평가도 긍정적이다. “민영화 과정에서 지분 분산이 중요한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사외이사 중심의 경영체제가 시장의 신뢰를 받는 데 더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는 것이 KT 관계자의 말이다. 지난 3월 주총에서 사외이사로 선임된 김도환 세종대 교수는 “회사의 중요 의사결정이 상당히 투명하게 이뤄지고 있어 개인적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며 “솔직히 선진국 기업들보다 이사회 운영을 더 잘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사외이사 두 달을 평가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한 사외이사도 “중요 사안에 대해 열띤 토론이 벌어지는 날들이 많아 사외이사끼리 열심히 해보자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며 “농구단 인수 포기 건은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라고 덧붙였다.

진땀 흘린 김정태 국민은행장 지난 3월21일 열린 주총에서 사외이사 12명 중 8명을 새로 선임한 국민은행도 사외이사 중심의 모범적인 이사회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국민은행은 지난 3월 주총에서 선임된 사외이사를 외부 자문단에 의해 추천받아 주목받았다. CEO나 대주주들이 사외이사 후보를 추천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장하성(고려대)·정광선 교수 등 5명의 기업지배구조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단으로부터 24명의 사외이사 후보를 추천받은 것이다. 사외이사 3명과 김정태 행장으로 구성된 사외이사 추천위원회는 이 24명의 후보를 두고 난상토론을 벌인 끝에 12명을 선임했는데, 정문술 미래사업 상담역 등 4명이 연임된 반면 다른 8명이 교체되기도 했다. 교체된 이유는 사외이사들끼리의 평가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출석과 활동 등 서로에 대해 매긴 성적이 당락을 결정지었던 것이다. 덕분에 남승우 풀무원 사장·안철수 사장이 새로 입성하는 기회를 얻었다. 이렇게 이사회가 구성되다 보니 이전에 없던 일들이 생겨나고 있다. 국민은행의 한 고위 임원은 “얼마 전 정부에서 카드채를 인수해 달라는 요청을 해왔을 때 이사회에서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 경영진이 진땀을 흘렸던 것으로 들었다”며 “결국 경영진의 간곡한 요청으로 정부 권고안을 따르기로 했지만 앞으로는 정부의 과도한 요청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외이사들 또한 다음에 탈락하는 불명예를 감수하지 않기 위해 제 목소리를 내야 할 형편이어서 국민은행 이사회는 점점 열기를 더해갈 것이라는 게 내부 전언이다. KT&G 또한 사외이사 중심으로 이사회를 운영하고 있다. 사외이사 중심의 이사회에 대한 평가가 좋게 나오자 정부도 정책적으로 지원할 의향을 보이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조학국 부위원장은 “기업지배구조 개선은 의사결정 과정의 개선과 경영 감시 시스템 개선의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공정위의 생각은 두 번째에 가깝다”며 “사외이사 중심의 이사회가 투명성을 높이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박상용 연세대 교수는 “외환위기 후 1백50여조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것도 결국 기업의 이사회가 경영진을 견제하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사외이사 중심의 이사회 운영이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외이사 중심의 이사회 운영에 대한 우려도 만만찮다. 양세영 전경련 기업경영팀장은 “현재 국내에는 전문경영자 시장이 발달하지 못해 사외이사로서 경영진에게 조언을 할 수 있을 만한 인적 자원이 많지 않다”며 “특히 한국 기업들은 과감한 투자를 통해 규모를 키워온 경우가 대부분인데, 책임에 연연하는 사외이사들의 힘이 과도해질 경우 이런 투자를 못하게 돼 결국은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회의록까지 공개되는 마당에 책임 부담을 느낀 사외이사들이 투자나 정책 프로젝트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ACGA 보고서에서 10위 안에 든 삼성화재의 경우는 사외이사 중심의 이사회 운영보다는 잘 분산된 지분구조(외국인 52%)와 경영의 투명성이 좋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외이사 중심의 이사회 운영이 만능 해결책은 아니라는 사례이다.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목소리 높은 사외이사’의 등장을 반기는 분위기다. 시민단체는 물론 증권가에서도 “이사회가 독립적이라고 판단되면 좋은 평가를 받는”(현투증증권 윤성혜 애널리스트) 것이 좋은 예이다. 정광선 원장 또한 “이제 싹이 났을 뿐”이라며 “정착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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