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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아시아 CEO 보수는 ‘프라이버시’?

유럽 ·아시아 CEO 보수는 ‘프라이버시’?

대다수 유럽 ·아시아 국가에서는 기업 투명성 제고를 향한 발걸음이 늦춰지고 있다.
독일 최대 재보험사로 시가총액이 190억 달러에 이르는 뮌헨재보험(Munich Re)은 재계 지도자, 투자자, 학자, 회계법인 등으로 이뤄진 한 위원회가 지난해 도입한 기업 지배구조 행동강령을 수용하기로 동의했으면서도 주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최고경영자(CEO)가 얼마나 벌든 무슨 상관인가.” 무엇보다 이번 행동강령은 CEO의 임금을 해당 기업 웹사이트와 공식 문서에 공시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그렇다고 뮌헨재보험의 CEO 한스 위르겐 쉰즐러(Hans-Jurgen Schinzler)가 임금을 공개하리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강령 가운데 많은 조항은 권고안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행동강령을 준수하든 말든 기업 재량에 달린 것이다.

독일의 기업 지배구조 행동강령은 지난해 2월 도입됐다. 뮤추얼펀드 DWS 인베스트먼트(DWS Investment)의 크리스티안 스트렝거(Christian Strenger) 이사는 이에 대해 “독일 기업들 생각을 바로잡는 획기적 조처”로 평가했다. 스트렝거는 독일 기업 지배구조 관행의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독일 재계에서는 상호 지분 보유와 낮은 공시 기준이 일반화돼 있다. 독일 기업이 경영진 보수를 공개한다 해도 대개 경영진 전체 보수의 총액만 밝힌다. 따라서 주주들은 임원 각자의 보수를 전혀 알 수 없다. 임금을 프라이버시로 간주하는 독일 기업인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UBS ·네슬레(Nestle) ·크레디 스위스(Credit Suisse) 같은 스위스 기업들도 보통 CEO 임금을 공개하지 않는다. 포브스와 미국의 기업 지배구조 연구 ·개선운동 단체인 코퍼레이트 라이브러리는 CEO 임금 순위(66~67쪽)를 작성하기 위해 UBS의 페테르 우플리(Peter Wuffli), 네슬레의 페테르 브라베크 레트마테(Peter Brabeck-Letmathe), 크레디 스위스의 오스발트 그루벨(Oswald Grubel) 등의 임금을 이사회 전체 연봉에 근거해 추산해야 했다. 미국처럼 상장기업 임원들의 임금은 의무적으로 공개돼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유럽 ·아시아 기업인의 임금은 미국 기업인의 그것과 상황이 다른데 굳이 밝힐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있다. 미국 기업인들의 임금에 대해 한 번 살펴보자. 테닛 헬스케어(Tenet Healthcare)의 제프리 바버코(Jeffrey Barbakow)는 포브스 선정 미 CEO 임금 순위에서 지난해 중 주식수익과 기타 보너스 등으로 1억1,600만 달러를 벌어 1위에 올랐다. 바버코는 그 뒤 테닛의 파산 와중에 회사를 빠져 나갔다. 그리고 몇몇 특기할 만한 CEO의 임금은 다음과 같다. 주택건설업체 NVR의 드와이트 샤(Dwight Schar) 9,400만 달러, 델 컴퓨터(Dell Computer)의 마이클 델(Michael Dell) 8,200만 달러, 퀄컴(Qualcomm)의 어윈 제이콥스(Irwin Jacobs) 6,300만 달러, USA 인터랙티브(US Interactive)의 배리 딜러(barry Diller) 5,300만 달러.

위에 열거한 CEO들 임금의 정당성을 둘러싼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공시는 다르다. CEO 임금 공개는 일종의 의무다. 주주들의 돈이 효율적으로 관리되고 있는지 감시할 때 CEO 임금은 잣대로 활용될 수 있다. 주주들이 이사진 선출에 나서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토록 하기 위해서다. 코퍼레이트 라이브러리의 폴 호지슨 수석 연구원은 “이사회가 CEO 연봉에 대해 ‘노(No)’라고 말할 수 없다면 CEO가 회계나 윤리 규정을 변경할 때도 ‘노’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호지슨은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다. “임원 임금은 이사회의 의사결정에서 가장 공개적이어야 할 부분 가운데 하나다. 공시정책이 적절하다면 경영진의 이해관계가 주주들의 이해관계와 동일하다는 신호다”.
호지슨은 더디긴 하지만 유럽 대륙에서 진전이 나타나고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바로 여기서 투명성 경쟁이 시작되는 것이다.독일은 유럽에서 기업 지배구조를 가장 늦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기업 지배구조 검토는 어떤 면에서 독일 국내외 주주들의 의문과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서다. 기업 지배구조 행동강령을 도입한 위원회 대변인은 “투자자가 독일 기업의 경영방식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며 “행동강령 도입은 투자자들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시아에서도 긍정적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올 들어 싱가포르는 기업 지배구조 강령을 발표했다. 말레이시아는 2001년 소액주주들로 이뤄진 감시단체를 구성했고 태국은 지난해에 주주협회를 발족시켰다. 모두가 해당 정부와 증권 규제 당국의 요구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

1999년 한국은 새로운 기업 지배구조 강령을 발표했다. 주주들로 하여금 주권을 적극 행사하고 경영도 감시하도록 장려한 것이다. 아시아 기업 지배구조 협회(ACGA)의 제이미 앨런 사무총장은 기업 지배구조가 아직 아시아에 낯선 개념이라며 이렇게 전했다. “아시아에서 기업 지배구조 규정으로 득을 본다고 생각하는 기업은 거의 없다. 대부분 규제 수단으로 간주한다. 아시아의 기업인들은 기업 지배구조 규정이 비용만 늘린다며 투덜거리기 일쑤다.”

아시아에서 모범적인 기업 지배구조 관행을 도입한 기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인포시스(Infosys)와 HSBC 정도가 고작인데 이들 기업은 임원들의 수입을 낱낱이 공시하고 있다. 싱가포르 ·홍콩 ·인도가 아시아에서 최고 기업 지배구조 환경을 갖춘 나라로 평가받는 반면 인도네시아 ·필리핀 ·중국은 최악으로 간주되고 있다.
한국을 한 번 살펴보자. 한국의 최대 기업 삼성전자는 CEO 연봉 공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일본 다케다(武田)약품공업과 함께 포브스 리스트에서 투명성이 가장 떨어지는 두 기업으로 꼽혔다. 두 기업 모두 경영진 보수에 대한 어떤 정보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ACGA와 홍콩 소재 증권사 CLSA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아시아에서 기업 지배구조 개선 가운데 상당 부분은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공약하고 관련 위원회까지 설립하며 독립 외부 이사도 영입하지만 형식일 뿐이다. 기업 지배구조 문제를 중시할 경우 금융 ·제휴관계에서 유리하고 우선 사업자로 선정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올 초반 발표된 CLSA ·ACGA 보고서에 따르면 과거 5년 동안 기업 지배구조 순위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아시아 기업들의 수익이 조사 대상 기업 전체 평균보다 35% 높았다.

그러나 하위권 기업들의 경우 평균보다 25% 낮았다. 독일의 투자자들은 이제 행동강령이 자국 대기업 실적을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해도 좋다. 현재까지 27개 독일 우량기업이 의무사항을 대부분 이행했다. 그렇다면 기업들은 행동강령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베를린 기업 지배구조 센터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올해 말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 증시의 DAX지수 편입 기업 가운데 겨우 절반만 모든 권고안을 이행할 계획이다. 기업이 특정 권고안에 따르지 않을 경우 이유를 설명하면 그만이다.

도이체 방크(Deutsche Bank)에는 갈채를 보내야 할 것 같다. 도이체 방크 역사상 처음으로 CEO 요제프 아커만(Josef Ackermann)의 보수가 지난해 연례 보고서를 통해 공개된 것이다. 게다가 DAX 상장기업 코메르츠방크(Commerzbank) ·인피니온(Infineon) ·메트로(Metro) ·셰링(Schering) ·센크루프(Thyssen-Krupp)는 모든 권고안을 이미 준수하고 있다.뮌헨재보험은 지난해 경영진 10명의 총 임금이 1,150만 유로로 DAX 기업 가운데 끝에서 세 번째였다며 공개할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개하지 않는 이유가 또 있다. “투자자가 임원들의 연봉에 따라 투자를 결정할 가능성은 없다. 한 임원이 다른 임원보다 1만 달러 더 번다는 것을 안다고 주주에게 무슨 부가가치라도 생기는가.” 뮌헨재보험의 대변인의 말이다.연봉 차이가 10만 달러라면 어떨까. 이사회는 주주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 따라서 비밀주의를 버리고 CEO의 임금에 대해 알면 부가가치가 생기는지 안 생기는지 주주들 스스로 판단하도록 놓아두는 게 더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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