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 같은 시계, 시계 같은 보석’
‘보석 같은 시계, 시계 같은 보석’
“고객의 요구보다 더 훌륭하게 만들어라.” 창업주 조르주 피아제가 던진 시계 철학은 지난 130년간 이어져 오면서 피아제를 보석시계의 거목으로 키웠다. 피아제는 지금도 대담한 창조성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재탄생하며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스위스 쥐라 산악 지대의 작은 마을 라 코토페의 겨울은 길고 춥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겨울이 다가오면 마을 사람들은 레이스 수공이나 시계 제작과 같은 고도의 인내와 집중력을 요하는 수공업에 몰두하곤 했다. 조르주 피아제(George Piaget)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본디 농부였던 그는 부업으로 시계를 제작해 동네 주민들에게 판매했다. 그러던 그는 1874년 자신의 성을 딴 파브리크 피아제(Fabrique Piaget)라는 작업실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시계 장인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19세였던 피아제에게 시계의 세계는 호기심과 가능성 그 자체였다.
초창기의 파브리크 피아제는 시계 무브먼트를 제조 ·공급하는 회사였다. 시계의 가장 예민하고 정교한 부품인 무브먼트는 시간의 정확성과 수명을 좌우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사람에 비유하면 마치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부품으로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다. 가내수공업 수준에 불과했던 피아제는 1925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고품질의 슬림 라인 무브먼트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는 피아제가 1930년 저명한 시계 브랜드였던 ‘론진 위테나우어(Longines Wittenauer)’에 무브먼트를 납품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렇듯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피아제의 시계는 다른 회사의 상표가 달린 채 팔렸다. 피아제가 독보적인 무브먼트 공급자로서 입지를 굳힌 것은 1945년이다. 시계 역사에 있어서 일명 ‘피아제의 전설’이 탄생했다. 세계에서 가장 얇은 무브먼트인 ‘슬림 라인 무브먼트’를 개발한 것. 이 무브먼트의 두께는 불과 1.35mm로 당시 미국의 10센트 동전에도 장착시킬 수 있을 정도로 얇았다.
45년 창업주 조르주 피아제의 손자인 제랄드 피아제(Gerald Piaget)가 회사를 맡으면서 피아제는 새롭게 변모하게 된다. 그들은 조부가 설립한 회사인 피아제를 세계 시장에 알리기 위해 우선 ‘피아제’ 상표를 등록했다. 50년에는 스위스 ·독일에 이어 미국 뉴욕에 세 번째 피아제 매장을 오픈했다. 미국 시장 진출 이후 피아제는 다양하고 창조적인 디자인을 속속 선보였다. 피아제는 무엇보다 ‘슬림 라인 무브먼트’ 시리즈를 끊임없이 개발해 타사보다 얇고 가벼운 손목시계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얇은 무브먼트 덕분에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창조성을 대담하게 표출할 수 있었다. 피아제의 기술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피아제의 ‘12P 무브먼트’는 67년까지 자동 시계 가운데 가장 얇은 무브먼트로 기네스 북에 기록됐다.
피아제 시계 역사에서 신기술 개발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보석 디자인이다. 60년 이후 세계 시계 시장의 경쟁은 날로 치열해져 갔다. 당시 경쟁사인 롤렉스와 오메가는 스포츠 시계 부문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피아제는 보석 세공이 들어간 장식용 시계로 눈을 돌렸다. 혁신적인 보석 디자인이 가미된 모델들을 내놓았다. 시계 판의 숫자는 다양한 색깔의 보석으로 장식했고, 갈수록 이색적이고 색다른 보석들을 사용했다.
64년엔 터키석과 청금석 등 30개 이상의 보석으로 장식한 세계 최초의 컬러 시계 문자반이 출시됐다. 80년에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태양신에 대한 경의를 표현한 남성용 손목시계 ‘피버스(Phoebus)’를 선보였다. 296개 다이아몬드로 세팅한 이 시계는 총 87.87캐럿으로 우리 돈 100억원을 호가할 정도다. 세계인의 머리 속에 피아제의 고급스러운 브랜드 이미지를 심는 데 주효했다.
피아제엔 시계 장인보다 보석 장인의 수가 더 많다. 이 사실만 봐도 피아제가 시계에서 보석 디자인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피아제의 대표제품은 화려하고 정교한 보석으로 장식된 여성용 장식 시계와 금으로만 제작된 팔찌형 시계다. 보석 시계의 거목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한 해에만 수천 캐럿에 달하는 최고급 다이아몬드와 5t에 달하는 금을 사들이고 있다. 현재 피아제 시계는 무브먼트 부품을 제외한 모든 시계 부품들이 순금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70년대에는 ‘폴로 컬렉션’을 선보이며 남성용 시계 시장 공략에 나섰다. 세계 시계 역사에 있어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시계 모델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 컬렉션은 ‘피아제 스타일’을 실현한 디자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인기가 너무 높아 폴로 컬렉션을 본뜬 아류 시계들이 곳곳에서 팔리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그러자 피아제는 아류의 원산지였던 홍콩과 이탈리아의 기업들을 상대로 법정 소송을 냈고 승소했다.
최근 애호가들을 위해 재출시된 폴로 컬렉션은 귀족 스포츠인 폴로와의 연관성을 활용해 판촉해 나가고 있다. 76년부터 매년 미국 플로리다주 웨스트 팜비치에서 개최되는 폴로 경기는 현재 ‘피아제 폴로 월드컵’으로 불리고 있다. 흔히 피아제 시계의 장인들은 시계에 예술의 혼을 불어넣는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고통에 가까운 집중력과 정교함으로 시계 제작에 임한다.
보석 전문가에 의해 완벽하게 세공된 다이아몬드, 섬세한 조각사에 의해 제작된 시계 줄, 전문 시계 기능공에 의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는 수백 가지의 시계 부품들. 이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피아제의 이름 아래 하나의 시계가 탄생된다. “피아제의 시계를 소유한 사람은 시간을 읽는 것을 넘어서 그 자체를 흠모하게 된다”는 조르주 피아제의 말은 오늘날도 피아제 시계 속에서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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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쥐라 산악 지대의 작은 마을 라 코토페의 겨울은 길고 춥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겨울이 다가오면 마을 사람들은 레이스 수공이나 시계 제작과 같은 고도의 인내와 집중력을 요하는 수공업에 몰두하곤 했다. 조르주 피아제(George Piaget)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본디 농부였던 그는 부업으로 시계를 제작해 동네 주민들에게 판매했다. 그러던 그는 1874년 자신의 성을 딴 파브리크 피아제(Fabrique Piaget)라는 작업실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시계 장인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19세였던 피아제에게 시계의 세계는 호기심과 가능성 그 자체였다.
초창기의 파브리크 피아제는 시계 무브먼트를 제조 ·공급하는 회사였다. 시계의 가장 예민하고 정교한 부품인 무브먼트는 시간의 정확성과 수명을 좌우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사람에 비유하면 마치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부품으로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다. 가내수공업 수준에 불과했던 피아제는 1925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고품질의 슬림 라인 무브먼트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는 피아제가 1930년 저명한 시계 브랜드였던 ‘론진 위테나우어(Longines Wittenauer)’에 무브먼트를 납품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렇듯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피아제의 시계는 다른 회사의 상표가 달린 채 팔렸다. 피아제가 독보적인 무브먼트 공급자로서 입지를 굳힌 것은 1945년이다. 시계 역사에 있어서 일명 ‘피아제의 전설’이 탄생했다. 세계에서 가장 얇은 무브먼트인 ‘슬림 라인 무브먼트’를 개발한 것. 이 무브먼트의 두께는 불과 1.35mm로 당시 미국의 10센트 동전에도 장착시킬 수 있을 정도로 얇았다.
45년 창업주 조르주 피아제의 손자인 제랄드 피아제(Gerald Piaget)가 회사를 맡으면서 피아제는 새롭게 변모하게 된다. 그들은 조부가 설립한 회사인 피아제를 세계 시장에 알리기 위해 우선 ‘피아제’ 상표를 등록했다. 50년에는 스위스 ·독일에 이어 미국 뉴욕에 세 번째 피아제 매장을 오픈했다. 미국 시장 진출 이후 피아제는 다양하고 창조적인 디자인을 속속 선보였다. 피아제는 무엇보다 ‘슬림 라인 무브먼트’ 시리즈를 끊임없이 개발해 타사보다 얇고 가벼운 손목시계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얇은 무브먼트 덕분에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창조성을 대담하게 표출할 수 있었다. 피아제의 기술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피아제의 ‘12P 무브먼트’는 67년까지 자동 시계 가운데 가장 얇은 무브먼트로 기네스 북에 기록됐다.
피아제 시계 역사에서 신기술 개발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보석 디자인이다. 60년 이후 세계 시계 시장의 경쟁은 날로 치열해져 갔다. 당시 경쟁사인 롤렉스와 오메가는 스포츠 시계 부문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피아제는 보석 세공이 들어간 장식용 시계로 눈을 돌렸다. 혁신적인 보석 디자인이 가미된 모델들을 내놓았다. 시계 판의 숫자는 다양한 색깔의 보석으로 장식했고, 갈수록 이색적이고 색다른 보석들을 사용했다.
64년엔 터키석과 청금석 등 30개 이상의 보석으로 장식한 세계 최초의 컬러 시계 문자반이 출시됐다. 80년에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태양신에 대한 경의를 표현한 남성용 손목시계 ‘피버스(Phoebus)’를 선보였다. 296개 다이아몬드로 세팅한 이 시계는 총 87.87캐럿으로 우리 돈 100억원을 호가할 정도다. 세계인의 머리 속에 피아제의 고급스러운 브랜드 이미지를 심는 데 주효했다.
피아제엔 시계 장인보다 보석 장인의 수가 더 많다. 이 사실만 봐도 피아제가 시계에서 보석 디자인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피아제의 대표제품은 화려하고 정교한 보석으로 장식된 여성용 장식 시계와 금으로만 제작된 팔찌형 시계다. 보석 시계의 거목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한 해에만 수천 캐럿에 달하는 최고급 다이아몬드와 5t에 달하는 금을 사들이고 있다. 현재 피아제 시계는 무브먼트 부품을 제외한 모든 시계 부품들이 순금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70년대에는 ‘폴로 컬렉션’을 선보이며 남성용 시계 시장 공략에 나섰다. 세계 시계 역사에 있어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시계 모델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 컬렉션은 ‘피아제 스타일’을 실현한 디자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인기가 너무 높아 폴로 컬렉션을 본뜬 아류 시계들이 곳곳에서 팔리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그러자 피아제는 아류의 원산지였던 홍콩과 이탈리아의 기업들을 상대로 법정 소송을 냈고 승소했다.
최근 애호가들을 위해 재출시된 폴로 컬렉션은 귀족 스포츠인 폴로와의 연관성을 활용해 판촉해 나가고 있다. 76년부터 매년 미국 플로리다주 웨스트 팜비치에서 개최되는 폴로 경기는 현재 ‘피아제 폴로 월드컵’으로 불리고 있다. 흔히 피아제 시계의 장인들은 시계에 예술의 혼을 불어넣는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고통에 가까운 집중력과 정교함으로 시계 제작에 임한다.
보석 전문가에 의해 완벽하게 세공된 다이아몬드, 섬세한 조각사에 의해 제작된 시계 줄, 전문 시계 기능공에 의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는 수백 가지의 시계 부품들. 이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피아제의 이름 아래 하나의 시계가 탄생된다. “피아제의 시계를 소유한 사람은 시간을 읽는 것을 넘어서 그 자체를 흠모하게 된다”는 조르주 피아제의 말은 오늘날도 피아제 시계 속에서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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