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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싶다”

“전문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싶다”

대한항공이 유니폼을 교체했다. 유니폼 교체에 맞춰 파격적인 TV 광고를 시작했다. 유니폼 교체는 1991년 이후 14년 만이다. 한진그룹 안팎에서는 유니폼 교체를 매우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유니폼 교체는 단순히 의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정신 자세와 체질을 바꾸는 것”이라고 그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그룹 안팎에서는 취임 3년째를 맞은 조 회장이 창업주 조중훈 회장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 색깔을 내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조 회장은 2002년 11월 17일 조중훈 회장이 타계한 뒤 3개월 동안 한진그룹 회장자리를 비워뒀다. 회장에 취임하라는 측근들의 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3개월이 지난 2003년 2월에서야 한진그룹 회장자리에 올랐다.

아버지가 타계한 뒤 곧바로 회장자리에 오르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조 회장은 재계 총수 가운데 ‘효자’로 소문나 있다. 그는 당시 선친이 입원해 있던 인하대병원의 병상을 매일같이 지켰다. 선친의 건강이 나쁘지 않았던 시절에는 주말마다 가족과 함께 선친의 부암동 자택을 찾았다.
장남인 조 회장의 이런 효심에 남호 ·수오 ·정호 등 동생들도 주말 약속을 별도로 잡지 않았다고 한다.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은 “국내에 머물 때는 주말마다 빠짐없이 부암동을 찾았다”며 “형이 솔선수범하니 동생들도 이를 따르게 됐다”고 말했다.

조 회장은 지난 3월 이종희 대한항공 총괄사장으로부터 30년 근속 기념패를 전달받았다. 그룹 총수가 전문경영인으로부터 30년 근속 기념패를 받은 것은 이례적이다. 조 회장은 이날 “나는 총수보다는 전문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싶다. 항공사의 최고경영진은 정보기술(IT) ·구매 ·서비스 등 여러 가지 분야를 꿰뚫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 회장의 최대 관심은 대한항공의 경영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다. 조 회장은 지난 89년 한진그룹의 IT전문업체인 한진정보통신을 설립했다. 재계 총수 가운데 조 회장만큼 IT 마인드가 뛰어난 회장도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99년 전경련의 Y2K대책위원장을 역임했다. 조 회장의 IT 마인드를 보여주는 사례 한 가지. 대한항공의 임원들은 자택에 컴퓨터가 두 대씩이다. 한 대는 순전히 조 회장의 특별지시를 받는 용도다. 대한항공의 임원치고 밤 10시 넘게 조 회장의 e메일을 받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조 회장은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일찍 퇴근해 9시 뉴스를 시청한다. 조 회장은 뉴스를 보다가 문득문득 생각나는 사안들을 해당 임직원에게 e메일로 날린다. “내일 아침 커피브레이크 시간에 토의해보자”는 의견이 붙는다. 대한항공 임원들은 조 회장 덕분에 다른 그룹 임원들에 비해 IT 마인드가 앞설 수밖에 없다고 한다. 조 회장은 항공사 종사자들은 IT 마인드가 기본이라고 강조한다. 장남 조원태 씨도 한진정보통신에 입사시켜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조씨는 지난해 대한항공 경영전략본부로 옮겼다.

대한항공 신임 임원들은 2002년부터 매년 16주 동안 서울대 경영대학원 위탁교육을 받고 있다. 항공운송업의 핵심은 우수한 인적자원 육성에 달려 있다고 판단한 조 회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KEDP(Korean Air Executive Development Program)’라 불리는데, 기수마다 30여 명의 임원이 참여한다.

조 회장은 취임 이후 선진경영 시스템 구축의 일환으로 소사장제와 책임경영제를 도입했다. 이를 위해서는 임원들의 경영능력 제고가 필수적이다. “CEO후보군인 임원들은 자기 업무에만 전문가여서는 안 되고 종합적인 사고를 가져야 소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게 조 회장의 지론이다. 이 교육 과정은 이라크전 발발, 사스 등의 여파로 경영환경이 매우 악화되던 시기에도 중단한 적이 없다.

조 회장의 이 프로그램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다. 조 회장은 지난해 서울대 경영대학원을 방문해 교육 중인 임원들과 함께 조동성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회사로 돌아온 임원들은 3?명이 한 조를 이뤄 교육과 현업을 접목한 주제를 찾아 발표회를 하는데 조 회장은 이런 발표회에 빠진 적이 없었다.
KEDP는 소사장제와 책임경영제를 뒷받침할 주요한 교육 프로그램이라는 게 내부 평가다. 책임경영제와 소사장제를 도입한 이후 회사는 ‘경쟁의 미학’이 자리 잡고 있다. 정비 ·기내식 ·화물영업 ·여객영업 등 본부별 원가 절감 노력이 치열해진 것이다.

“우리 회사 정비단가가 루프트한자에 비해 왜 비쌉니까.”
“우리 비행기에는 왜 그렇게 많은 주스가 실립니까.”
대한항공 본부장끼리의 이런 토론은 이제 일상화됐다. 원가를 한 푼이라도 절감하는 것이 자신들의 연봉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조 회장은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알아주는 CEO다. 선친인 조중훈 회장으로부터 인맥 관리 노하우를 배웠다. 고 조 회장은 주한미군 장성급 인사들이 본국에 귀환할 때마다 자신의 자택인 ‘부암장’으로 초대해 송별 모임을 가졌다. 고 조 회장은 이런 인맥관리를 통해 베트남 등지에서의 미군 물자를 수송할 수 있었다.
조 회장은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집행임원이다 보니 외국 항공사 CEO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그는 2000년 6월에 발족한 국제 항공동맹체인 스카이팀(SkyTeam) 설립을 주도했다. 조 회장은 그해 초 델타항공 레오 뮬린(Leo Mullin) 회장과 만나 항공동맹체 설립을 제의했으며, 뮬린 회장의 동의 아래 에어프랑스 ·아에로멕시코 등을 포함시켜 4개사로 스카이팀을 발족시켰다. 스카이팀은 현재 9개의 회원사로 늘어났다. 스카이팀 회원사는 코드셰어 및 정비 노하우 공유를 넘어서 자재를 공동구매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조 회장은 샴페인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진다. 골프에도 취미가 없다. 그런 그가 30년 넘는 경험을 통한 업무 장악력과 탈권위주의적 생활태도로 리더십을 세우고 있다는 게 주변의 평이다. 조 회장의 비서는 대리급 여비서와 부장급 남자 비서 두 명이 전부다. 남자 비서는 1년마다 교체된다. 다른 그룹 총수들과 달리 비서실이 없다. 해외 출장 시에는 컴퓨터가 유일한 비서다. 대외행사에 비서를 동행시키지 않는다. 조 회장은 “회사에 들어와 비서로 일한다며 전화나 받아서야 되겠느냐. 인재들이 현업에서 폭넓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른 그룹 비서 출신들이 승승장구하면서 막강한 힘을 누리고 있는 반면 대한항공은 비서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아예 없다.

조 회장이 말수가 적다 보니 직원들과의 스킨십이 부족하지 않으냐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지만 대한항공 인사들은 손사래를 친다.
몇 년 전 모 임원이 암에 걸렸다는 얘기가 조 회장에게 들어갔다. 조 회장은 그 자리에서 담당임원의 상태를 확인한 뒤 남가주대(USC)로 전화를 걸었다(조 회장은 남가주대 재단이사다). “나를 치료하듯이 쭛 쭛전무를 치료해 주십시오”라는 게 조 회장의 부탁이었다.

대한항공 임직원들은 자체 병원인 항공의료원에서 매년 건강검진을 받고 있다. 건강검진을 받지 않는 임원들을 불러 놓고 야단까지 친다. 몇 년 전엔 흡연하는 임원은 승진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다시 태어나도 항공운송업을 하겠다는 조 회장은 지난해 ‘2010년 항공여객 세계 10위, 2007년 항공화물 세계 1위’라는 목표하에 ‘세계 항공업계를 선도하는 글로벌 항공사’의 비전을 선포 했다. 그가 이 같은 비전을 어떻게 달성해 나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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