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륜 한국·동아제분 대표… “밀가루와 함께 42년 아직 할 일 남았다”
이계륜 한국·동아제분 대표… “밀가루와 함께 42년 아직 할 일 남았다”
1963년 호남제분 '연구원 1호' “가정 형편이 안 좋아 공주중학교를 중퇴하면서 고향에서 목재상을 했어요. 한국전쟁 이후 복구사업이 한창이던 때라 처음엔 괜찮다 싶더니…. 사업 운이 따르지 않더군요.” 결국 “재복은 없나 보다”하고 취직을 결심했다. 나이 서른이 넘어 취직한 곳이 호남제분(1990년 한국제분으로 이름을 바꿈) 군산공장이다. 생산직 공원으로 시작했지만 일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정식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도둑 공부’였지요. 당시만 해도 기술자들이 ‘밥그릇을 빼앗긴다’며 교육을 꺼렸거든요. 그래서 꾀를 낸 것이 일요일에 몰래 들어가 기계를 뜯어보는 일이었습니다. 혼자 출근해 제분 기계를 열어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지요.” 6개월이 지나니까 이 회사의 창업주인 고(故) 이용구 회장이 그를 따로 불렀다. 이 회장은 별다른 말 없이 봉투를 내밀었다. 2만원이라는 거금이 들어 있었다. 월급으로 6만원을 받던 시절이었으니 꽤 큰돈이었다. “못 받습니다.” “어른이 주는 것이니까 받아라.” “이유 없는 돈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너는 이제부터 호남제분 1호 연구원이다. 이 돈은 연구수당이다.” 이렇게 해서 지방의 조그만 제분업체에 1호 연구원이 생겼다. 생산 증대가 곧 사업의 관건이던 시절 호남제분은 1963년 하루 3700대(22㎏)이던 생산량을 2년 후에 4500대로 늘릴 수 있었다. 그리고 또 2년 후엔 6000대를 생산했다. ‘1호 연구원’의 숨은 공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1967년 목포공장을 설립하면서부터 그는 ‘밀가루 도사’로 통하게 된다. 현재 목포공장에선 하루 3만4000대(20㎏)가 생산된다. “목포공장에 모터가 600개입니다. 그 소리만 들어도 기계 상태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지요. ‘탁-탁-’ 거리는 소리가 ‘툭-툭-’으로 바뀌면 그리스(윤활유)를 교환해줄 때가 됐다는 뜻입니다. 의사가 청진기를 대고 환자를 진찰하듯 밀가루를 쳐다보면 상태를 알 수 있어야 해요.” 1986년 정년퇴직 그리고… 생산현장에서만 꼬박 23년을 근무한 이 대표는 1986년 정년퇴직했다. 이번엔 이 회장이 그를 서울사무소로 불렀다. “퇴임하고 뭐할 계획인가.” “(당시는 수퍼마켓이 유행하던 시절이라) 퇴직금 털어 수퍼마켓이나 차려 보려고요.” “나하고 일하자.” “…예.” 그날로 인사가 났다. ‘촉탁직 부장’이 그의 정식 명함이 됐다. 이번엔 맡겨진 일이 달랐다. 당시 호남제분은 밀가루에 설탕·소금·탈지분유 등을 배합한 ‘프리믹스’ 제품의 일본 수출을 앞두고 있었다. 그가 맡은 일은 수출 영업이었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지 갈잎을 먹으면 어떻게 하느냐”며 고사했지만 다음날 그의 책상에는 L/C(신용장)가 올려져 있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던 막내아들을 불렀다. “당시엔 그 종이가 무역을 하기 위한 서류인지도 몰랐습니다. 막내아들에게 한 단어씩 물어가며 L/C에 나오는 96개 단어를 모조리 외웠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L/C에 적힌 대로 생산계획을 내려줬지요." 이것이 대박이 났다. 이 대표는 특유의 신용을 앞세워 프리믹스 월 2000t 수출에 성공했다. 호남제분이 500억원대 매출을 올리던 당시 100억원대 수출을 해 효자 중의 효자가 된 것. 프리믹스 수출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2005년 "다시 도전이다" “지난해 여름 밤 10시가 넘어 회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일본 야마사키제빵 임원을 만났는데 ‘어떻게 프리믹스는 3년이 넘도록 클레임이 없느냐’며 품질을 높이 평가하더랍니다. 회장님은 ‘당신이 받아야 할 칭찬을 내가 대신 받았다’고 하시더군요. 제분 기술이 가장 발전했다는 일본에서 이런 평가를 받으니 ‘40년 제분 인생이 헛되지는 않았구나’싶더군요." “다시 목포에 내려가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은 1993년이다. 일본인 공장장이 은퇴하면서 이 자리를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이미 환갑을 넘어서다. 이번에도 이 회장은 “이사시켜 준다”는 한마디 말뿐이었다. 그런데 이 회장은 4개월 뒤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 회장이 작고하고 차남인 이희상 회장이 회사를 물려받았지만 그는 전무·부사장으로 승진을 계속했다. 40년 세월은 당시 군소업체였던 한국제분을 연 매출 2300억원을 올리는 업계 1위로 끌어올렸다. 2000년 동아제분을 인수하면서 시장 점유율이 26%로 높아진 것. 이때부터 동아제분 소유의 인천·부산공장을 추가로 맡게 된다. 이번엔 두 회사의 기업 문화를 통합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때부터 인천~목포~부산을 잇는 현장 경영이 시작됐다. 이 대표가 여의도 본사에 출근하는 날은 단 이틀, 나머지는 언제나 현장을 찾는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현장을 찾아다니다 보면 어김없이 하루 만보를 걷는단다. “목포공장 근무 시절 직원들 가족 중에 애사가 있기라도 하면 제일 먼저 달려간 사람이 접니다. 이런 친화력 덕분인지 한국과 동아제분이 한 기업으로 섞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부산공장에서 ‘영감님 왜 안 오세요?’라며 휴대전화가 옵니다. 그러면 ‘왜 술 먹고 싶으냐’라고 대답하고 곧바로 KTX를 탑니다." 이렇게 노사 관계에서는 인자한 할아버지가 되고, 품질에선 엄격한 시아버지가 된다. “밀가루를 ‘천의 얼굴을 가진 마술사’라고 부릅니다. 라면이나 제과 재료로 들어가는 것은 물론, 접착제나 건설자재로도 널리 쓰여서지요. 그래서인지 밀가루를 다루는 사람도 ‘천의 얼굴’이 되네요.” 조만간 한국제분은 목포 시대를 마감하고 충남 당진으로 공장을 이전한다. 현재 공장이 위치한 삼학도가 복원공사에 들어가면서 공장 이전을 추진하게 된 것. 그리고 이 대표에겐 새로운 도전이 남아있다. “후배들에게 ‘당장 집에 가라고 해도 나는 괜찮다. 그러나 너희는 그럴 수 없지 않으냐’는 말을 자주 합니다. 낮은 가격을 앞세운 중국 제품이 들어오면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상품 리더십이 중요해요. 한국·동아의 핵심역량이 ‘제분’ 기술인 만큼 수수·메밀·쌀 등을 배합한 제분 제품으로 승부를 겨루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후배들이 살길을 터주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42년 장수의 비결을 물었다. “눈치 보지 않고 일해야 합니다.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일과 스스로 잘하려고 하는 일이 있는데, 여기서 부장될 사람과 임원될 사람을 구별할 수 있어요. 스스로 잘하려고 일하다 보면 결국 회사 일도 잘 굴러가게 되더군요.” 이계륜 한국·동아제분 대표 1931년 충남 논산生, 공주중학교 5년 중퇴 1963년 호남제분(現 한국제분) 입사 1986년 정년퇴직, 촉탁부장으로 재입사 1993년 한국제분 목포공장장·이사 2001년∼현재 한국·동아제분 대표이사 부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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