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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전문기자의 역사를 알면 경제가 보인다⑥ AFL-CIO의 발자취] 노조의 변신… ‘위기’ 때 통합, ‘안주’때 분리

[이재광 전문기자의 역사를 알면 경제가 보인다⑥ AFL-CIO의 발자취] 노조의 변신… ‘위기’ 때 통합, ‘안주’때 분리

1955년 조지 미니 AFL 위원장과 월터 로이터 CIO 위원장이 손을 잡고 AFL-CIO의 공식 출범을 알렸다.
1937년 CIO 노조원들이 연좌농성을 벌이고 있다. 연좌농성은 CIO의 새로운 저항 기법으로 대중에 CIO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이재광 전문기자.
최근 한국과 미국의 노동계 이슈를 보면 기묘한 느낌이 든다. 한쪽에서는 50년 동안 이어지던 통합의 전통을 깨며 분열 양상을 보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20년 분리의 역사를 마감하고 통합 논의를 진행 중이다. 미국 노동계 화두는 단연 미국산별노조총연맹(AFL-CIO)의 분열이었다. 지난 8월 AFL-CIO 소속이었던 국제서비스노조연맹(SEIU)과 전미트럭운전자조합(TEAMSTERS)이 지도부와의 갈등 끝에 결국 AFL-CIO를 탈퇴한 것이다. 이들 두 노조 조합원 수는 무려 320만 명으로 전체 조합원 수의 25%나 된다. AFL-CIO는 창설 이래 최대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일고 있다. 9월 국내 노동계 최대 화두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의 통합문제였다. 두 노조 위원장은 성명서에서 “두 노총 지도부는 ‘1국(國) 1노총’의 조직운동 방향에 관한 논의가 시작될 필요성이 있다는 점에 공감했다”며 통합논의가 진행 중임을 알렸다. 이 상반된 노동운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미국과 한국의 노동 현실이 다른 것일까, 아니면 세계적 흐름에 누군가가 역행하는 것일까? 두 나라 노동계의 변화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일까? 미국 노동계의 양대 축인 미국노동총연맹(AFL)과 산업조직회의(CIO)의 통합과 분열의 역사를 보면 어느 정도 답을 찾을 수 있다.

“조금 더, 바로 이곳, 바로 지금” 미국 노동사가들은 1870~80년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저임과 열악한 근무환경에 대한 노동자의 불만이 집중적으로 폭발했던 시기로 미국 노동사의 분수령이 됐다는 것이다. 특히 1886년 8시간 근무제 등을 요구하며 일어난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 시위를 근대 노동운동의 분기점으로 여긴다. 7명이 사망하고 67명이 부상하는 유혈 참극으로 끝난 이 시위 이후 미국 노동계는 커다란 변화를 맞는다. 노동운동계의 거목 새뮤얼 곰퍼스는 당시 대규모 파업들을 겪으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인 대다수는 극단적인 과격주의와 사회주의를 거부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전복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과격한 노동운동은 자칫 미국 노동운동의 싹을 짓밟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렇게 되면 미국 노동운동은 시작 단계에서 무너져 내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에게 미국 노동계를 살릴 수 있는 길은 이념이나 정치행위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노동조건 개선이 시급했다. 이 같은 생각으로 그는 헤이마켓 시위 직후 AFL을 출범시켰다. 그 역시 사회주의 운동에 몸 담고 있었지만 노동계로부터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을 분리하는 것을 AFL의 초기 목표로 세웠다. “어떤 이념적 포장 속에서도 허덕이지 말자”고 주장했다. 그러자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조금 더, 바로 이곳, 바로 지금(More and More, Here and Right Now)’라는 실용주의적 슬로건에 노동자들이 귀를 기울인 것이다. 정부와 대다수 국민 역시 AFL의 노선을 지지했다. 이들은 AFL을 ‘가장 건전한 노동조합’으로 부르며 과격분자들로부터 미국을 구출해 줄 것으로 봤다. 출범 6년 만에 조합원 수는 25만 명이 됐고 곰퍼스가 사망한 1924년 그 수는 200만 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AFL은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숙련공 중심이어서 대다수 노동자를 외면했다는 점이다. 숙련공은 미국에서 오래 산 백인 남성 중심으로 이들은 노동계의 주류이자 기득권층이었다. 흑인 등 유색인종과 여성, 그리고 신규 이민자 등 정작 저임과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었던 노동자들은 노조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가입할 수도 없었다. 1936년 CIO가 AFL에서 떨어져 나간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당시 루스벨트 행정부는 불황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으로 적극적인 노동자 보호책을 폈다. 대공황이 빈부 격차에서 비롯됐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서민층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1934년 와그너법으로 알려진 전국노동관계법을 제정한 것도 이런 생각에서였다. 이 법으로 노동자들은 자유롭게 노조를 만들 수 있었으며 회사와 교섭할 권리를 보장받았다. 노조나 노조원 수가 크게 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주목받았던 인물이 존 루이스 연합광산노조(United Mine Workers) 위원장이었다. 그는 와그너법 제정 직후부터 1년 만에 신규 노조원 50만 명을 끌어들이며 기염을 토했다. 그는 AFL 내 개혁주의자였다. 그는 AFL이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비숙련공들도 가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도부가 이를 거부했다. 이들은 AFL의 전통을 깨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현실안주’라는 비판을 받을 만했다. 결국 루이스는 자신의 고집을 꺾는 대신 AFL을 뛰쳐나왔고 비숙련공 위주의 노조인 CIO를 창설했다.

“노노 갈등은 공멸” AFL과 CIO는 분명 상호보완적 성격이 있었다. AFL은 숙련공을 대표하는 노조로, CIO는 비숙련공을 대표하는 노조로 서로 도와 가며 교섭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완전히 달랐다. 갈등이 심각했다. 노조원끼리 다투는 일이 허다했다. 한 목재회사에서 AFL 소속 숙련공인 목수의 임금을 올려주면 CIO 소속 비숙련공인 벌목공들은 자신의 임금도 올려 달라고 요구하는 식이었다. AFL 소속 조합원들은 CIO를 공산주의 혁명세력으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노노 갈등은 노동계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멸할 수도 있다. 특히 노동계 외부에 강력한 적이 나타났을 때 위기는 더욱 커진다. 1950년대 상황이 꼭 그랬다. 냉전 시대 개막과 동시에 미국에서는 반공산주의 정서가 심화됐고 노동운동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1947년 제정된 태프트-하틀리법은 이 같은 불안을 반영한 것이었다. 정부는 노조의 최대 무기인 파업권을 규제했다. 노동계는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1954년 선거에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위기감은 더욱 커졌다. 그는 부자와 기업을 위한 정책을 펼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반면 노동계는 분열 상태였다. AFL과 CIO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어느 쪽에도 가입하지 않은 노조가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AFL과 CIO 소속 노조원은 170만 명이었으나 비소속 노조원은 250만 명에 이르렀던 것이다. AFL과 CIO로서는 위기감을 갖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결국 이들은 1955년 모든 갈등과 경쟁을 뒤로하고 통합을 결의하게 된다. 최근의 AFL-CIO의 분열은 1930년대 미국 노동계의 위기를 생각하게 한다. 여성·비정규직이 급속하게 늘고 있는데도 AFL-CIO는 여전히 정규직 중심이다. 탈퇴한 노조가 여성·비정규직 중심이라는 사실도 이를 반영한다. 반면 한국 내 통합 논의는 1950년대 미국 노동계의 위기를 연상시킨다. 세계화의 여파로 노동계의 입지는 줄고 설상가상으로 노동계 비리까지 터져나와 곤혹스럽다. 이제 국내 노동계는 주도권 다툼보다 공생의 길을 찾을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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