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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고속성장의 그늘

아일랜드 고속성장의 그늘

Sunset on the Liffey?

아일랜드에 새 영웅이 탄생했다. 매부리코에 안경을 썼고, 지금은 한물 간 개인금융 분야에서 일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에디 홉스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돈지갑을 통해서다. 아일랜드의 고비용 문화를 파헤친 홉스의 TV 프로그램 ‘날강도 공화국’(Rip-off Republic)은 지난달 마지막 회 방영 때 공전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또 홉스가 쓴 개인 부채 처리 안내서는 전국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됐다. 곤궁에 처한 아일랜드 소비자들은 그를 영웅으로 떠받든다.

곤궁에 처한 아일랜드 소비자라니? 아일랜드는 위대한 회생의 신화를 이룬 나라가 아니었던가. 고질적인 빈털터리였던 아일랜드의 근로자들이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봉급을 받는 근로자의 대열에 들어서지 않았는가. 그러나 홉스의 생각에는 아일랜드가 그런 나라가 아니다. 종종 유럽에서 물가가 가장 비싸고, 기득권층 위주의 정책에다, 빈부격차가 과거 어느 때보다 큰 나라라고 본다. “지난 10년간 우리가 정말 좋은 나라에 산다고 호들갑을 떠는 언론 보도가 봇물을 이루었다.

하지만 국민이 직접 피부로 느끼는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홉스는 말한다. 물론 실제로 아일랜드는 옛날의 감자밭에서 떨치고 일어나 경제와 첨단기술 분야의 강국이 됐다. 또 아일랜드인 대부분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잘 산다는 말도 옳다. 그러나 새로운 아일랜드에서 바뀐 게 많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은 점도 많다는 게 사실이다. “아일랜드가 현대 경제를 이룩했지만 그렇다고 현대 사회가 됐다는 뜻은 아니다”고 홉스는 말했다.

언뜻 보기에 너무 가혹한 평가라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어쨌든 아일랜드는 1990년대 중반 이래 연평균 6.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전 유럽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유럽연합(EU) 서쪽 끝의 작고 습기 많은 국가인 아일랜드가 유럽 대륙에서 우호적인 영어권 기지를 찾는 외국 기업들이 몰려드는 곳으로 바뀌었다. 아일랜드는 지난 10여 년간 미국의 대(對) 유럽 직접투자 총액의 4분의 1을 유치했다. 고질병이던 실업률은 4.2%로 떨어져 유럽 내 거의 최저 수준이 됐다. 또 지난 한 해 동안에만 경제 활성화로 일자리 9만3000개가 창출됐다.

지난 20년의 대부분을 집권해온 피아나 페일(운명의 전사)당이 이끄는 아일랜드 정부의 공로는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 ‘켈트 호랑이’가 원기 왕성하게 포효한다면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현명하고 기업친화적 정책을 펴온 정부의 덕이다. 델에서 인텔에 이르기까지 대형 투자자들이 ‘올드 에이레’(Olde Eire: 아일랜드의 옛 이름)의 환상적인 녹색 산천에 이끌려 이곳에 오지는 않았다.

그들은 유럽 최저의 법인세율(불과 12.5%)과 숙련된 노동력에 매력을 느꼈다. 아울러 아일랜드는 EU에서 받는 개발기금 대부분을 낙후된 교육제도 개혁에 쏟아부었다. 현재 아일랜드는 세계에서 일본 다음으로 노동력에서 과학자와 엔지니어 비율이 가장 높다. 또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정부가 중재한 일련의 ‘사회연대협약’ 덕분에 노사화합이 이루어져 더 이상 자본과 노동력이 서로 목을 조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었다. 경제 붐이 일기 이전 1980년대의 비탄에 잠긴 아일랜드는 이제 잊혀졌다. 각 세대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들이 빠져나간 해외 이주도 끝났다. 일자리를 찾아 몰려오는 수만 명의 이민자들과 함께, 해외로 이주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되돌아온다. “역사상 처음으로 아일랜드도 이민자들이 찾는 나라가 됐다”고 카리스마 넘치는 기업부 장관 마이클 마틴은 말했다.

오는 2030년까지 아일랜드 인구는 20% 이상 늘어 500만 명 선을 넘어서게 되며 그중 4분의 1은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차지할 전망이다. 한때 낙후된 지방도시였던 더블린은 여느 유럽 수도에 비해 손색없는 다양하고 풍요로운 국제도시가 됐다. 리피 강변을 따라 늘어선 기중기들이 한창 진행 중인 건설 붐을 실감케 한다. 자동차를 몰고 교외로 나가보면, 신흥 부자의 별장들이 시골 풍경을 수놓는다. “아일랜드는 지금 전성기를 구가한다”고 마틴 장관은 말했다.

그렇다면 이런 그림에서 무엇이 잘못됐다는 말인가? 간단히 말해 아일랜드는 지금 스스로 이룬 행운의 부산물과 싸우는 중이다. 많은 이들이 이 부산물에 시달린다. 악몽 같은 더블린의 교통 체증과 싸우는 통근자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라. 매년 6만 대의 새 차가 도로로 쏟아져 나오는 마당에 반짝거리는 전차 노선 두 개로는 역부족이다. 포화상태에 이른 의료 서비스에 시달리는 환자들은 또 어떤가. 거의 하룻밤 새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가격이 치솟은 부동산 시장에서 살집 마련에 나선 주택 구매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경제 번영이 몰고온 여러 문제점 가운데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광기에 가까운 부동산 붐이다. 물론 이는 요즘 서방세계의 주요 도시들 대부분이 앓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경우는 차원이 다르다. 지난 10년간 부동산 가격은 130% 이상 올라 유럽에서 가장 가파른 상승세를 기록했다.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모여 사는 더블린 지역의 경우 수치는 더 끔찍하다. 1980년대에 운 좋게 집을 장만한 경우 집값은 무려 다섯 배로 뛰었다. 오늘날 집을 장만하려는 사람들은 암담한 처지다.

40년짜리 주택담보 대출에다 매달 상환금을 내려면 등골이 빠진다. 임대주택(공공임대주택은 말할 것도 없이) 얻기도 점점 힘들어진다. “사회복지주택 입주 대기자 수가 5만 명”이라고 무주택자들을 돌보는 자선단체 사이먼 커뮤니티의 노엘린 하티건은 말했다. 완화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현재 건설업계 종사자 수가 전체 노동력의 무려 12%에 이르지만, 주택 공급은 여전히 수요에 크게 못 미친다.

주택비가 워낙 뛰어 생활비로 쓸 돈이 모자랄 수밖에 없다. 홉스에 따르면 표준 장바구니 물가의 경우 유럽 평균에 비해 아일랜드가 20% 더 비싸다. 그리고 특히 아일랜드 남자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다. 술값이 유럽에서 제일 비싸다. “우리 고향에서 여자들은 그냥 집안일만 한다”고 필리핀 출신 간호사로 두 아이의 어머니인 지나 아비잔은 말했다. “그런데 아일랜드에 살기 위해선 맞벌이를 해야 한다.”

뉴욕의 머서 컨설팅 그룹이 올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더블린은 세계에서 14번째로 생활비가 비싼 도시다(뉴욕 바로 다음이다). 금리가 낮다는 사실이 이런 병의 증상인 동시에 원인이다. 이론적으로는 금리를 올리면 주택시장을 진정시킨다. 그러나 현재 금리는 유럽중앙은행이 있는 프랑크푸르트에 고정돼 있다. 유럽중앙은행은 프랑스와 독일의 부진한 경제 상황도 고려하며 금리를 결정해야 한다. 이 때문에 아일랜드인들은 은행 돈 쓰기 잔치를 벌였다. 10년 동안 가계 부채는 6배로 늘어났고, 지난 한 해 동안 25% 이상 늘었다. 주택담보 대출이 포함되지 않고도 그 정도다.

한때 아일랜드를 황폐화시킨 지긋지긋한 빈곤은 사실상 사라졌다. 그러나 빈곤계층은 아직 남아있다. 노년층과 교육 수준이 낮은 계층은 경제 부흥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직접 농사 짓는 소규모 영농자들도 마찬가지다. 아일랜드 중앙통계청(ICSO)의 자료에 따르면 인구의 23%가 빈곤의 위험 속에 산다. 옛 아일랜드 시절에는 국민 모두가 가난했다면, 갑작스레 도래한 지금의 풍요는 골고루 분배되지 않았다. 더블린 북부의 험악한 공공주택 건설 현장을 한번 찾아가 보면 실감이 난다. 9월 유엔이 내놓은 한 보고서에 따르면 아일랜드의 빈부격차는 선진국 중에서 최악에 속한다.

이 격차는 최근까지만 해도 경제 부흥의 최대 수혜자였던 신(新)중산층마저 삼킬 태세다. 물가 상승이 고임금 생활자들까지 제물로 삼기 시작함에 따라, 홉스도 주로 이들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한다. 직장을 얻었다고 새 자동차를 사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말린다. 자동차값이 유로지역 평균보다 3분의 1은 더 비싸기 때문이다. “35세 미만은 마치 고기 분쇄기를 통과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홉스는 말했다.

“경제가 젊은이들을 먹어치우는 양상이다.” 확실히 홉스는 이들의 높아가는 불만감을 잘 대변해 준다. 최근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93%(모든 계층에 걸쳐 있다)가 비싼 물가 때문에 ‘바가지 쓰는 느낌’이라고 응답했다. 아일랜드인들은 같은 돈으로 살 만한 물건은 점점 줄어드는데, 일은 더 많이 한다. 한때 주말은 신성불가침이었으나 이제는 옛날 이야기다. 노동 인구의 거의 절반이 일요일과 공휴일에도 출근한다.

“켈트 호랑이라는 이미지는 모든 사람에게 순금덩어리와 같았다”고 아일랜드 의회의 유일한 사회당 의원인 조 히긴스는 말했다. “그런데 지금 보통사람들은 하나같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한 스트레스와 긴장 속에 산다.” 노조도 불만의 목소리를 높여간다. “사람들이 질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고 아일랜드 노동조합총연맹(ICTU)의 맥다라 도일은 말했다. “경제를 위해 우리가 있는가, 아니면 사회를 위해 경제가 있는가?”

정치인들은 이를 번영의 대가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홉스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더 어두운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부동산 부자들이든, 술집 주인이든, 소매업주들이든 기득권층에 너무 가깝다는 지적이다. 그들은 이를 부패라고 부르기보다는, 옛날식 정실주의가 새 아일랜드에서도 살아 움직인다고 표현한다. 시장경제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경쟁과 가격 하락을 방해하는 수많은 짜증스러운 제약들을 남겨놓았다. 한 가지 좋은 예가 28년 전 제정된 식품점 법령이다. 이는 식품점이 생산 가격 이하로 못 팔게 규제해 비싼 가격이 유지되도록 한다. 그러나 미국 대형 마켓들은 흔히 생산 가격 이하로 판다. 외국 수퍼마켓과 경쟁하는 아일랜드 체인점들에는 좋은 일이지만, 소비자들은 좋아할 리가 없다.

불만에 찬 국민은 정부의 세금 감면 약속에서도 별 위안을 찾지 못한다. 집을 장만하면 유럽 내 최고 세율인 부가세를 포함해 주택 구입비의 4분의 1이 세금으로 들어간다. 거둬들인 세금의 오용도 문제다. 언론은 어설픈 정부 프로젝트를 질타한다. 5000만 유로를 쏟아부은 뒤 폐기된 전자투표제 도입 계획과, 더블린에는 맞지도 않는 순환고속도로 건설에 엄청난 비용을 쓴 일이 대표적 사례다. “수출 분야에서 경제는 초현대적인 수준인데, 국내 분야는 모든 게 19세기에 머물러 있다”고 더블린 트리니티대 경제학자인 콘스탄틴 거드기프는 말했다. 한발 더 나아가 정부와 공공 부문의 관료주의는 ‘17세기 수준’이라는 게 그의 평가다.

이런 문제들을 성장의 대가라고 치부하면서 자기 위안을 삼기는 쉽다. 그러나 아일랜드 정부도 과거에 경제적 성공을 가져다준 틀만 갖고는 밝은 미래를 보장받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다. 임금과 각종 혜택을 포함해 아일랜드 근로자의 인건비는 유럽 내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빠른 속도로 상승 중이다. 노동력 부족과 생활비 상승의 결과다. 이미 아일랜드는 외국 투자자들을 끌어들인 매력 중 일부를 잃었다. 최근에는 생산 비용이 낮은 슬로바키아·폴란드 등 다른 동유럽 국가들이 국제 자본의 매력적인 투자처로 떠오른다. “우리는 경쟁력이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아일랜드 비즈니스와 고용주협회(IBEC)의 경제학자인 대니 매코이는 지적했다.

이러는 사이에 성장률과 산업 생산량은 둔화되어 간다. 부동산 건설 경기의 호황과 소비 수요가 그나마 경제를 지탱해 준다. 아일랜드가 경제 수준을 유지하려면 가장 머리를 많이 쓰는 분야, 특히 오직 두뇌만으로 승부하는 서비스 분야에 집중해야 한다. 마틴 기업부 장관도 “우리를 여기까지 오도록 해준 모델로는 미래에 살아남지 못한다”고 기꺼이 인정했다.

최근 런던에서 열린 EU 정상회담에서도 이 문제가 다뤄졌다. EU 정상들은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지 논의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일랜드는 자본과 노동 간의 험악한 충돌 없이 운명을 바꾼 표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일랜드도 이 논의에 참여해야 할 처지가 됐다. 그동안은 기업가들이든 노조 지도자들이든 간에 강력한 기득권층과의 충돌을 연기시킨 대가로 번영을 이루었다.

이제 국내 경기 활성화를 위해 영국식 민영화와 신속한 규제 철폐 도입이 시급할지 모른다. 정부는 정부 자신이 키워낸 현대식 기업들보다 변화에 적응하는데 느렸다. 지금 드러난 문제들은 더 광범위하고 뿌리깊게 자리 잡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언젠가 아일랜드의 기적은 운이 다할지 모른다.

With DIARMAID MACDERMOTT in Dub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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