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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의 골프이야기] “YS와 골프치며 ‘3당합당’결의”

[JP의 골프이야기] “YS와 골프치며 ‘3당합당’결의”

“JP는 오행(五行) 중에서 토(土)의 역할을 한 사람이야.” 얼마 전 동양철학을 오랫동안 공부한 한의사 친구가 술자리에서 느닷없이 이런 말을 했다. ‘토’란 수레바퀴에 비유하면 바퀴 한가운데 있는 축과 같은 것으로, 이것이 없으면 수레바퀴가 굴러갈 수 없다. 다시 말해 ‘토’가 없으면 목화금수(木火金水)의 순환도, 춘하추동 사계절의 순환도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JP의 역할을 오행 속 ‘토’의 역할에 비유한 이 친구의 말을 술자리 농담쯤으로 흘려버리기엔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JP는 우선 5·16 군사혁명에 가담해 박정희 시대를 함께 열었고, DJP 연합으로 사상 첫 호남 정권인 김대중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일은 노태우 정권 때 여소야대 국면을 돌파하는 카드로 나온 3당 합당이었다. 여기서도 JP는 말하자면 ‘토’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JP 본인은 과거 3당 합당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DJP 연합은 악성 훅이 났지만 3당 합당은 잘했던 것 같아요. 티샷도 페어웨이에 잘 떨어졌고, 세컨드 샷도 훌륭했지.” JP가 3당 합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여소야대로 인한 정국의 경색을 해소하고, 북방외교의 길을 여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선택에 있어서도 골프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JP의 정치인생에서 골프를 떼놓을 수 없는 이유가 되고 있다. 지난 1989년 가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차 출국을 앞두고 측근들을 불렀다. 노 대통령은 직접선거로 뽑힌 대통령이긴 했지만 5공 정권의 후계자라는 국민적 시선이 따가웠고, 여소야대 구도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몹시 답답하던 차였다. 그래서 그가 꺼낸 카드가 합당을 통한 정계개편이었다. 그는 박철언·박준병 의원 등과 함께 몇 가지 시나리오를 그리고 야당 총재들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이런 와중에 JP와 YS가 10월 2일 경기도 안양CC(현 안양베네스트)에서 골프 회동을 가졌다. 당시 YS는 통일민주당 총재 시절이었고, JP는 신민주공화당 총재를 맡고 있었다. 18홀을 도는 이날 골프 회동에서 YS는 드라이버 샷을 하다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는 해프닝까지 있었지만 분위기가 좋아 전격적인 3당 합당으로까지 이어졌다.
YS 엉덩방아 찧었지만 분위기 좋아 “그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은 집권당으로서의 역할을 전혀 못했어요. 여소야대였으니까. 국무총리 인준조차 안 되는 판이니 어떻게 정치를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국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였어. 소련이 망하고, 남북 관계가 새로운 경지를 열어야 하는 시점이었단 말이지. 그때 나는 ‘정치가 이토록 삐걱거리면 경제도 안 되고, 사회도 불안해서 국민이 제대로 살 수 없다’고 판단했어요. 또 노태우 대통령이 북방외교를 통해 통일의 기반을 다져야겠다고 하니까 힘을 실어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 당을 위해 나라가 존재하는 게 아니다. 나라가 먼저 살아야 한다. 합당해서 시대적 요구를 이룩해나가자. 그게 합당한 이유지. YS가 그전에 골프를 조금 치다가 중단했다더군. 그러다가 나와 라운딩하느라 오랜만에 골프채를 잡았는데 그만 드라이버 샷 실수를 해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어요. YS는 골프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나와 마음을 교환하기 위한 도구로 골프채를 잡은 거야. 3당 합당은 잘 된 거여. 그 덕분에 북방외교도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소련은 물론이고 중국과도 국교를 맺게 되었잖아요. 그 샷은 페어웨이 한복판에 떨어졌어.”
대선 출마는 어쩔 수 없는 선택 정계를 떠난 JP는 요즘에도 가끔 YS와 만나 식사를 함께한다. 89년 동반 라운딩의 결과가 좋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와는 대조적으로 ‘악성 훅’을 낸 DJP 연합의 두 주역 DJ와 JP는 여태껏 응어리가 풀어지지 않고 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골프로 치면 ‘앨버트로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파5의 롱 홀에서 단 2번만에 홀인을 시켜야 하는 앨버트로스는 본인의 능력도 있어야 하지만 천운(天運)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프로 골퍼들 중에서도 앨버트로스를 기록한 선수는 몇 없다. 그렇게 비유한다면 총리나 야당 총재는 파4 홀에서 2번만에 홀인하는 ‘이글’쯤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글이라면 수도 없이 기록한 JP는 과연 ‘앨버트로스’에 대한 미련이 없었을까. “난 대통령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내게 만약 그럴 욕심이 있었다면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신 후 최규하씨 대신 대통령이 됐을지 몰라. 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어. 10·26 사건 이후 공화당 총재로서 국회에서 헌법을 개정하다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이 중단되고 얼마나 수모를 당했는지 몰라. 최규하씨에게 ‘당신이 총리니 대통령 유고시에 그 자리를 대신 맡아 법정기일 안에 대선을 치를 책임이 있다’고 분명히 말했어요. 그리고 ‘이제 박정희 대통령 시대가 끝났으니 유신체제를 끝내야 한다. 빨리 헌법을 개정하자’는 말도 했어요. ‘최규하 총리 당신이 대통령을 맡으시오. 1년이면 될 겁니다. 1년 안에 국회에서 새 헌법을 만들고, 당신은 그 사이 국가를 관리하고 그 다음 새 대통령을 뽑고 새 시대를 여는 일을 맡아야 돼요.’ 그런 말이 오가고 있었는데 전두환이 나와서 다 엎어버렸지.” 그러면 그동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JP는 “어쩔 수 없는 정치적 선택이었다”며 잠시 회상에 젖는다. “전두환이가 날 정계에서 내쫓는 바람에 말 못할 고초를 겪었어요. 몇 년 지나 정계로 복귀를 하려는데 그때 순서가 대통령 선거가 먼저야. 대선이 87년에 있었고, 국회의원 선거는 그 다음해였어. 순서가 그렇게 되니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거지. 대통령 선거에서 비록 떨어졌지만 내가 죽지 않고 있다는 게 증명돼 그 다음 총선에서 신민주공화당 후보자가 35명이나 당선됐지. 그래서 내가 다시 정계에 복귀하게 된 겁니다. 난 대통령이 되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세상에 의지가 꺾이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대선에 출마한 거지요.” JP는 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생애 최대의 시련을 겪었다.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들이 JP를 희생양으로 삼고 50여 일간 계엄사에 감금하는 바람에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물론, 일체의 정치활동도 못하게 됐다. 그러나 그는 87년 10월,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 재개를 꾀했다. 그 해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낙선했지만 이듬해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주공화당 후보가 35석을 차지하면서 JP의 존재가 다시 급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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