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 객원기자의 공개하지 못한 취재수첩] “YS 위로하려고 ‘중·소 가자’ 권유”
[이호 객원기자의 공개하지 못한 취재수첩] “YS 위로하려고 ‘중·소 가자’ 권유”
87년 대선 패배한 김영삼 찾아가 “큰 정치 하자”고 말하자 눈빛 달라져 정재문(70). 지금은 가스·석유 등 에너지 사업을 주종으로 하는 대양산업 회장이지만 5선(選) 국회의원을 지낸 그다. 냉전시대 공산 진영의 중심국 소련의 문을 열어젖힌 한국 정치인으로 첫 손에 꼽힌다. 노태우 정부가 이른바 북방외교를 천명하고서도 공식 외교 라인을 가동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 후의 일이지만 한국이 소련을 상대로 공개적인 외교를 추진할 무렵, 당시 언론은 정 의원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모스크바에서 김영삼 민자당 최고위원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회담을 성사시키는 데에 치밀한 계획과 탁월한 협상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인물은 정재문 의원이다.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가 막강한 미국의 힘을 배경으로 중공을 두드렸던 특사 신분이었으나 정 의원은 개인 자격으로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심장부 모스크바를 열었다는 점에서 ‘한국판 키신저’를 연상케 한다. 그는 경기고를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 명문 버클리대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법경(法經) 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국회에 몇 안 되는 국제 외교통으로 꼽힌다. 7선을 지낸 정해영 전 국회 부의장이 부친이다.” 그에게 ‘한국의 키신저’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 의원은 당시 한·소 수교의 신작로를 깔아놓았다(한·소 수교를 위한 행보를 시작한 당시의 기록과 비화를 중심으로 정 회장과 오랜 시간 인터뷰했다. 당시의 직책이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에 ‘의원’으로 호칭한다). 두 나라가 수교를 하고 소련이 러시아로 국명이 바뀌었으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001년 3월 수교 10주년을 기념해 정 의원에게 러시아 최고훈장을 주었다. 그리고 2005년 1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는 그에게 명예정치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러시아 최고 권위의 훈장과 최고 지성으로 꼽히는 국립과학원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동시에 받은 최초의 한국인이 된 것이다. 올해로 한·러 수교 16주년이다. 두 나라의 우호관계는 지난해 11월 19일 노무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 간에 있었던 정상회담 자리에서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자리에서 양국은 ‘대한민국과 러시아연방 간의 경제 통상 협력을 위한 행동계획(Action Plan)’을 채택했다. 양국은 교역량이 100억 달러로 향하고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가까운 사이다. 그 실체가 몇 가지 사례로 입증되기도 했다. 우선 한국은 러시아에 시장경제 지위(MES)를 부여키로 했고, 한국과 러시아 간에 에너지와 천연자원 협력을 가속화하기로 했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시베리아 횡단철도(TSR)-한반도 종단철도(TKR)’ 연결 사업도 공동으로 협의해 이행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한국의 키신저’ 별명 정 의원은 89년 3월 한국 국회의원 신분으로 모스크바로 잠입했던 추억의 보따리를 풀어놨다. 한국 정치인 어느 누구도 소련에 관심을 가지지 않던 시절에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향해 단신 잠입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고종의 밀명을 받은 민영환 특사가 러시아를 방문한 이후 92년 만이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도 하지요?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인 1896년 2월부터 1년여 동안이나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던 고종. 그해에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황제 대관식에 민영환 전권특명공사를 모스크바에 파견해 외교 활동을 하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내용이 ‘조선특사 민영환’이라는 타이틀로 KBS에서 방영된 적이 있었는데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온몸이 뜨거워질 때도 있었어요. 민 공사가 대한제국의 운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러시아로 달려갔을 텐데, 그 강대국 외교 사절들 속에서 쇠백(衰白)한 국력의 특사였으니까 얼마나 외롭게 활동을 했을까? 상투머리에 갓을 쓴 민 공사가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찍은 흑백사진을 보니까요, 연정이 느껴집디다.” 정 의원의 대화가 길어졌다. “물론 민 공사와 제게 주어진 상황은 같을 수가 없지요. 결과도 달랐고요. 민 공사는 일본에 의해 풍전등화의 길을 걷고 있던 조선을 구하기 위해 특별히 고종의 밀명을 받은 흠차(欽差·황제의 명을 받은 신하)로 떠났지만 저는 그 누구의 특명도, 외교적 직함도 없이 오직 의원 신분으로 공산권 관계 개선을 위해 독립독행(獨立獨行)한 것입니다.” 민 공사는 부득이 중국~밴쿠버~뉴욕~런던을 경유하는 50일간의 장도 끝에 도착했다. 당시는 9980㎞의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성되기 4년 전이었다. 정 의원은 비행기로 잠입했을 것이니 시대적 상황 차이도 있는 셈이었다. 민 공사 방문 후 대(對)일본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불행하게도 한국과 무려 100년 가까이 외교의 문을 닫았다. 정 의원은 닫혀 있는 ‘철의 장막’을 열어젖히도록 초석을 놓고 돌아왔다는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실제로 정 의원의 첫 소련 방문이 시작된 89년 3월 이후 통일민주당 김영삼(YS) 총재의 1차 소련 방문(89년 6월)이 성사됐고, 소련의 공산당 간부들과 많은 학자가 서울을 방문하게 되는 특별한 사건(89년 10월)까지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발표된 ‘통일민주당-이메모(IMEMO·세계 경제 및 국제관계 연구소)’ 간의 공동 성명서가 서울에서 재확인되면서 한·소 수교를 선언하는 성명서의 모태가 된다. “어쨌든 1917년에 레닌이 수립한 공산당 정부가 74년 동안이나 대한민국을 적성국가로 분류하고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다가 결국 수교를 함으로써 적대 관계를 청산했습니다. 그 이후에 양국이 어느 때보다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공통의 이념, 민주주의와 인권, 더 나아가 시장경제 발전에 협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공인의 행적은 공동의 자산’이라는데 제가 했던 모스크바 활동을 전부 공개하지요. 얘기를 죽 하겠지만 특히 수교 과정 2년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보면 공문서 자료들도 있지만 당시 통일민주당과 IMEMO의 공동 성명서, 북한 허담 위원장과 회동 교섭, 고르바초프 대통령 면담 같은 것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되거든요?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내용들도 있으니까요. 그게 외교사를 공부하는 후학들한테도 여러 측면에서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외교통일위 맡으면서 단신 소련行 17년 전의 소련이라는 나라는 우리에게 아주 먼 곳이었다. 국교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적성국가였다. 더욱이 소련은 2억80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공산당 지배에 있었고, 북한엔 정치적 운동장이었다. 소련(러시아)으로 잠입하시기 전에, 정 의원님의 정계 인연은 어떻게 됩니까. “저는 85년도에 국내 정치에 발을 넣었지요. 시대적으로 보면 우리나라 민주화 대열에 참여하게 된 때인데요, 당시 야당이었던 신한민주당에 입당해서 바로 12대 국회에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외무위원회 간사와 당 내에서 국제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지요. 13대 국회를 거쳐 14, 15대 국회에서는 남들이 한 번도 맡기 싫다는 외무통일위원장을 연임했습니다.” 국회에서 보면 외무통일위원회에는 각 당의 원로급 의원들이 온다. 그만큼 중요하고 국가 차원의 테마를 풀어야 한다는 명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외무통일위원회가 인기 있는 상임위는 아니다. 예산이 많고 기업들이 관련돼 있는 상임위가 인기가 많게 마련이다. “외무통일위원회를 희망했던 것은 나름의 소신이랄까, 저는 1억 명이 다 같이 잘사는 길을 만드는 것이 정치 슬로건이었습니다. 남북한 1억 명의 인구가 다 같이 잘살 수 있고, 다 함께 행복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주변 강국들과의 관계 개선이 무엇보다 중요한 모티브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회 외무위원장으로서 누구와 의논도 없이 단신으로 소련 공산당 국제위원회부터 노크한 것이지요.” 이것이 기록상 국회의원으로서는 첫 번째로 소련을 방문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당시 정 의원은 의원 외교를 통해 한·소 관계를 개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졌다고 한다. 사실 희망이라기보다는 모험에 가까운 시도였을 것이다. “어찌하겠어요. 막연하긴 했지만 작은 구멍이라도 뚫을 수 있다면 맑고 새로운 물이 흘러들어가도록 구멍을 뚫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로 의심과 분쟁으로 증오와 무기 경쟁에 얽매여 언제까지고 신음을 계속할지도 모르는데…. 당시로선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이었지만 그때 상황에서는 추진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의 하나가 공산권 수교로 평화의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는 그런 신념으로 들어가게 된 겁니다.” 첫 소련 방문은 대선에서 패배한 YS를 만나면서 당시 구상을 처음 밝히게 된 것입니까. “그게 이렇게 됩니다. 당시 YS가 워낙 낙담을 하고 있어서…. 당장 YS를 살려야 되겠다 싶은 마음이 치솟아서 말씀을 꺼낸 건데. 87년 12월 16일에 실시됐던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고 YS가 패배하지 않았습니까. YS는 88년 새해가 됐는데도 신년인사를 거부하면서 부산 조선비치호텔에서 칩거하고 있는 겁니다. 정계를 은퇴하는 문제까지 언급했을 정도였으니까 패배의 충격이 컸겠지요. 근데 저는 새해니까 부산에 내려가서 지역구 구민들과 인사도 나누고 그랬거든요? 매년 새해에는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런데 YS가 호텔에 계시니까 새해의 기분도 있는데 총재의 비서진들이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그래서 비서들과 저녁이나 하기 위해 잠시 호텔에 들렀지요. 그랬더니 김기수 비서가 보고를 드리지 말라고 하였는 데도 바로 총재께 보고를 드린 모양이에요. 그때 YS가 예외로 저만 보자고 그래요.” YS와 정 의원의 만남은 이곳이 처음은 아니었다. 대선 결과에 실망한 YS는 비서진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속리산관광호텔에서 탈진된 몸을 추스르며 며칠 지낸 적이 있었다. 그때도 YS는 은밀히 정 의원을 불러 단둘이서만 서울로 가자고 한 적이 있지만 사실 예나 지금이나 YS가 정 의원에게 보여주는 애정은 남다르다. 해운대에서도 그래서 정 의원만 만났겠으나 말하자면 격식을 벗어두고 동생 대하듯이 해온 것이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전화가 걸려왔다. “정 의원, 지금 뭐하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누가 되게 큰 생선을 한 마리 보내왔는데 억수로 싱싱하다. 먹으러 안 올래?” 부를 일이 있어도 이런 식이었다. 좋은 생선 먹으러 오라는데 마다할 수도 없는 노릇. 그런데 막상 가보면 “아이고 봐라, 생선이 얼매나 펄떡거리는지 정 의원 온다 소리 듣고 대번에 바다로 퐁당 들어갈라 안쿠나”라는 말이 나온다. “죽었는데요?” “생선은 낭중에 부산 가서 먹고….” 중요한 밀담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YS는 아무리 면담자가 밀려 있어도 정 의원부터 만나왔다는 것이다. “초청장을 받는다카면 몰라도…” “총재님이 묵고 있는 방으로 들어서니까 창밖으로 겨울바다를 내다보고 있는데 점퍼를 걸치고 있는 뒷모습이 참 쓸쓸해 보이고 도저히 어제의 대통령 후보가 아니에요. 그런데 위로의 말을 꺼내기가 싫은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총재는 툭툭 털고 내일을 계획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지 저런 초순(焦脣)한 모습이 아니거든요. 더구나 YS한테 표를 찍어준 수백만 명의 지지자들이 본다면 얼마나 실망하겠어요. 그래서 대뜸 ‘고생한 비서진들하고 저녁이나 할까 해서 왔습니다만 같이 나가시지요’라고 했지요.” “하고 와. 생각 없어. 난 여기 있을 테이까.” 정 의원은 그때만큼 YS에게 크게 실망을 느낀 적이 없다고 한다. 대선에 패하면 저렇게도 자신의 위엄이 위축되는가 싶었다. 그래서라도 빨리 용기와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는 방안을 내놓아야겠구나 생각했다. 어쩌면 수렁에 빠져 있는 총재를 가장 정치적이고, 멋진 방법으로 구출하는 길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그때 나온 얘기다. “총재님. 베이징이나 모스크바에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말 난데없는 얘기였다. 그때만 해도 모스크바든, 베이징이든 공산주의 종주국이고 사회주의 중심국이었다. “그기 무슨 소리가?” “앞으로 하셔야 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두문불출하실 게 아이라 이럴 때 기회를 맨들어서 중국이나 소련 지도자들을 만나 한반도 평화 문제에 대해 논의해 보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그런 일을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베이징에 가시면 틀림없이 대접을 받으실 깁니다. 베이징은 홍콩을 통해 가면 쉽게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고 그캅니다.” “몰래 밀입국한다 그 말이가?” “수교가 안 돼 있는 나라에 들어가는 긴데 밀입국이 아이고 편법을 쓰는 기지요.” YS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내 표정도 무덤덤해지더니 “그건 정 의원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라며 난색을 표했다. “명색이 대통령 후보였던 내가 우째 그래하노.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서는 소련이나 중국 같은 공산국가들하고 접촉을 해보는 기 필요하지. 그렇지만 초청장을 받는다카면 몰라도….” YS는 판단이 굉장히 빠른 사람이다. 임기응변에도 뛰어나지만 놀랄 정도로 감각이 빠르고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몇 수 앞을 내다본다. YS는 “홍콩 통해서 들어가는 그런 방법 말고, 정식으로 초청장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그걸 한 번 알아보면 모를까”라는 말을 꺼낸 것이다. 틀림없이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얘기였다. <계속>
정재문 대양산업 회장 「약력」 1936년 부산생 경기고·미 UC 버클리 정치경제학 학사 1962년 독일 마인츠대 법경연구원 1967년 한국외국어대 법정학부 강사 1968년 대양산업·신대동 대표이사 사장 1977년∼現 대양산업 회장 1985∼2004년 제12∼16대 국회의원(5선) 1996년 국제의회연맹 한국 대표 2000년 한국의원외교포럼 대표 2002년 대만 문화대학 명예정치학박사 2005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명예정치학박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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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키신저’ 별명 정 의원은 89년 3월 한국 국회의원 신분으로 모스크바로 잠입했던 추억의 보따리를 풀어놨다. 한국 정치인 어느 누구도 소련에 관심을 가지지 않던 시절에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향해 단신 잠입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고종의 밀명을 받은 민영환 특사가 러시아를 방문한 이후 92년 만이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도 하지요?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인 1896년 2월부터 1년여 동안이나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던 고종. 그해에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황제 대관식에 민영환 전권특명공사를 모스크바에 파견해 외교 활동을 하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내용이 ‘조선특사 민영환’이라는 타이틀로 KBS에서 방영된 적이 있었는데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온몸이 뜨거워질 때도 있었어요. 민 공사가 대한제국의 운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러시아로 달려갔을 텐데, 그 강대국 외교 사절들 속에서 쇠백(衰白)한 국력의 특사였으니까 얼마나 외롭게 활동을 했을까? 상투머리에 갓을 쓴 민 공사가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찍은 흑백사진을 보니까요, 연정이 느껴집디다.” 정 의원의 대화가 길어졌다. “물론 민 공사와 제게 주어진 상황은 같을 수가 없지요. 결과도 달랐고요. 민 공사는 일본에 의해 풍전등화의 길을 걷고 있던 조선을 구하기 위해 특별히 고종의 밀명을 받은 흠차(欽差·황제의 명을 받은 신하)로 떠났지만 저는 그 누구의 특명도, 외교적 직함도 없이 오직 의원 신분으로 공산권 관계 개선을 위해 독립독행(獨立獨行)한 것입니다.” 민 공사는 부득이 중국~밴쿠버~뉴욕~런던을 경유하는 50일간의 장도 끝에 도착했다. 당시는 9980㎞의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성되기 4년 전이었다. 정 의원은 비행기로 잠입했을 것이니 시대적 상황 차이도 있는 셈이었다. 민 공사 방문 후 대(對)일본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불행하게도 한국과 무려 100년 가까이 외교의 문을 닫았다. 정 의원은 닫혀 있는 ‘철의 장막’을 열어젖히도록 초석을 놓고 돌아왔다는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실제로 정 의원의 첫 소련 방문이 시작된 89년 3월 이후 통일민주당 김영삼(YS) 총재의 1차 소련 방문(89년 6월)이 성사됐고, 소련의 공산당 간부들과 많은 학자가 서울을 방문하게 되는 특별한 사건(89년 10월)까지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발표된 ‘통일민주당-이메모(IMEMO·세계 경제 및 국제관계 연구소)’ 간의 공동 성명서가 서울에서 재확인되면서 한·소 수교를 선언하는 성명서의 모태가 된다. “어쨌든 1917년에 레닌이 수립한 공산당 정부가 74년 동안이나 대한민국을 적성국가로 분류하고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다가 결국 수교를 함으로써 적대 관계를 청산했습니다. 그 이후에 양국이 어느 때보다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공통의 이념, 민주주의와 인권, 더 나아가 시장경제 발전에 협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공인의 행적은 공동의 자산’이라는데 제가 했던 모스크바 활동을 전부 공개하지요. 얘기를 죽 하겠지만 특히 수교 과정 2년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보면 공문서 자료들도 있지만 당시 통일민주당과 IMEMO의 공동 성명서, 북한 허담 위원장과 회동 교섭, 고르바초프 대통령 면담 같은 것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되거든요?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내용들도 있으니까요. 그게 외교사를 공부하는 후학들한테도 여러 측면에서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외교통일위 맡으면서 단신 소련行 17년 전의 소련이라는 나라는 우리에게 아주 먼 곳이었다. 국교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적성국가였다. 더욱이 소련은 2억80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공산당 지배에 있었고, 북한엔 정치적 운동장이었다. 소련(러시아)으로 잠입하시기 전에, 정 의원님의 정계 인연은 어떻게 됩니까. “저는 85년도에 국내 정치에 발을 넣었지요. 시대적으로 보면 우리나라 민주화 대열에 참여하게 된 때인데요, 당시 야당이었던 신한민주당에 입당해서 바로 12대 국회에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외무위원회 간사와 당 내에서 국제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지요. 13대 국회를 거쳐 14, 15대 국회에서는 남들이 한 번도 맡기 싫다는 외무통일위원장을 연임했습니다.” 국회에서 보면 외무통일위원회에는 각 당의 원로급 의원들이 온다. 그만큼 중요하고 국가 차원의 테마를 풀어야 한다는 명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외무통일위원회가 인기 있는 상임위는 아니다. 예산이 많고 기업들이 관련돼 있는 상임위가 인기가 많게 마련이다. “외무통일위원회를 희망했던 것은 나름의 소신이랄까, 저는 1억 명이 다 같이 잘사는 길을 만드는 것이 정치 슬로건이었습니다. 남북한 1억 명의 인구가 다 같이 잘살 수 있고, 다 함께 행복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주변 강국들과의 관계 개선이 무엇보다 중요한 모티브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회 외무위원장으로서 누구와 의논도 없이 단신으로 소련 공산당 국제위원회부터 노크한 것이지요.” 이것이 기록상 국회의원으로서는 첫 번째로 소련을 방문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당시 정 의원은 의원 외교를 통해 한·소 관계를 개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졌다고 한다. 사실 희망이라기보다는 모험에 가까운 시도였을 것이다. “어찌하겠어요. 막연하긴 했지만 작은 구멍이라도 뚫을 수 있다면 맑고 새로운 물이 흘러들어가도록 구멍을 뚫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로 의심과 분쟁으로 증오와 무기 경쟁에 얽매여 언제까지고 신음을 계속할지도 모르는데…. 당시로선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이었지만 그때 상황에서는 추진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의 하나가 공산권 수교로 평화의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는 그런 신념으로 들어가게 된 겁니다.” 첫 소련 방문은 대선에서 패배한 YS를 만나면서 당시 구상을 처음 밝히게 된 것입니까. “그게 이렇게 됩니다. 당시 YS가 워낙 낙담을 하고 있어서…. 당장 YS를 살려야 되겠다 싶은 마음이 치솟아서 말씀을 꺼낸 건데. 87년 12월 16일에 실시됐던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고 YS가 패배하지 않았습니까. YS는 88년 새해가 됐는데도 신년인사를 거부하면서 부산 조선비치호텔에서 칩거하고 있는 겁니다. 정계를 은퇴하는 문제까지 언급했을 정도였으니까 패배의 충격이 컸겠지요. 근데 저는 새해니까 부산에 내려가서 지역구 구민들과 인사도 나누고 그랬거든요? 매년 새해에는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런데 YS가 호텔에 계시니까 새해의 기분도 있는데 총재의 비서진들이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그래서 비서들과 저녁이나 하기 위해 잠시 호텔에 들렀지요. 그랬더니 김기수 비서가 보고를 드리지 말라고 하였는 데도 바로 총재께 보고를 드린 모양이에요. 그때 YS가 예외로 저만 보자고 그래요.” YS와 정 의원의 만남은 이곳이 처음은 아니었다. 대선 결과에 실망한 YS는 비서진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속리산관광호텔에서 탈진된 몸을 추스르며 며칠 지낸 적이 있었다. 그때도 YS는 은밀히 정 의원을 불러 단둘이서만 서울로 가자고 한 적이 있지만 사실 예나 지금이나 YS가 정 의원에게 보여주는 애정은 남다르다. 해운대에서도 그래서 정 의원만 만났겠으나 말하자면 격식을 벗어두고 동생 대하듯이 해온 것이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전화가 걸려왔다. “정 의원, 지금 뭐하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누가 되게 큰 생선을 한 마리 보내왔는데 억수로 싱싱하다. 먹으러 안 올래?” 부를 일이 있어도 이런 식이었다. 좋은 생선 먹으러 오라는데 마다할 수도 없는 노릇. 그런데 막상 가보면 “아이고 봐라, 생선이 얼매나 펄떡거리는지 정 의원 온다 소리 듣고 대번에 바다로 퐁당 들어갈라 안쿠나”라는 말이 나온다. “죽었는데요?” “생선은 낭중에 부산 가서 먹고….” 중요한 밀담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YS는 아무리 면담자가 밀려 있어도 정 의원부터 만나왔다는 것이다. “초청장을 받는다카면 몰라도…” “총재님이 묵고 있는 방으로 들어서니까 창밖으로 겨울바다를 내다보고 있는데 점퍼를 걸치고 있는 뒷모습이 참 쓸쓸해 보이고 도저히 어제의 대통령 후보가 아니에요. 그런데 위로의 말을 꺼내기가 싫은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총재는 툭툭 털고 내일을 계획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지 저런 초순(焦脣)한 모습이 아니거든요. 더구나 YS한테 표를 찍어준 수백만 명의 지지자들이 본다면 얼마나 실망하겠어요. 그래서 대뜸 ‘고생한 비서진들하고 저녁이나 할까 해서 왔습니다만 같이 나가시지요’라고 했지요.” “하고 와. 생각 없어. 난 여기 있을 테이까.” 정 의원은 그때만큼 YS에게 크게 실망을 느낀 적이 없다고 한다. 대선에 패하면 저렇게도 자신의 위엄이 위축되는가 싶었다. 그래서라도 빨리 용기와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는 방안을 내놓아야겠구나 생각했다. 어쩌면 수렁에 빠져 있는 총재를 가장 정치적이고, 멋진 방법으로 구출하는 길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그때 나온 얘기다. “총재님. 베이징이나 모스크바에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말 난데없는 얘기였다. 그때만 해도 모스크바든, 베이징이든 공산주의 종주국이고 사회주의 중심국이었다. “그기 무슨 소리가?” “앞으로 하셔야 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두문불출하실 게 아이라 이럴 때 기회를 맨들어서 중국이나 소련 지도자들을 만나 한반도 평화 문제에 대해 논의해 보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그런 일을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베이징에 가시면 틀림없이 대접을 받으실 깁니다. 베이징은 홍콩을 통해 가면 쉽게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고 그캅니다.” “몰래 밀입국한다 그 말이가?” “수교가 안 돼 있는 나라에 들어가는 긴데 밀입국이 아이고 편법을 쓰는 기지요.” YS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내 표정도 무덤덤해지더니 “그건 정 의원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라며 난색을 표했다. “명색이 대통령 후보였던 내가 우째 그래하노.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서는 소련이나 중국 같은 공산국가들하고 접촉을 해보는 기 필요하지. 그렇지만 초청장을 받는다카면 몰라도….” YS는 판단이 굉장히 빠른 사람이다. 임기응변에도 뛰어나지만 놀랄 정도로 감각이 빠르고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몇 수 앞을 내다본다. YS는 “홍콩 통해서 들어가는 그런 방법 말고, 정식으로 초청장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그걸 한 번 알아보면 모를까”라는 말을 꺼낸 것이다. 틀림없이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얘기였다. <계속>
정재문 대양산업 회장 「약력」 1936년 부산생 경기고·미 UC 버클리 정치경제학 학사 1962년 독일 마인츠대 법경연구원 1967년 한국외국어대 법정학부 강사 1968년 대양산업·신대동 대표이사 사장 1977년∼現 대양산업 회장 1985∼2004년 제12∼16대 국회의원(5선) 1996년 국제의회연맹 한국 대표 2000년 한국의원외교포럼 대표 2002년 대만 문화대학 명예정치학박사 2005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명예정치학박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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