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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르포] 아르헨티나는 이제 울지 않는다

[현지 르포] 아르헨티나는 이제 울지 않는다

2001년 크리스마스 이브, 한때 세계 5위의 경제대국이었던 아르헨티나가 외국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하겠다며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했다. 이듬해 11월에는 세계은행으로부터 차관을 갚지 못해 2차 디폴트 상태에 빠졌다. 그로부터 3년 반-. 아르헨티나가 꿈틀대고 있다. 2002년 마이너스 10%대였던 경제성장률이 2003년부터 매년 9%를 넘나드는 급성장세로 반전했다. 지난해에는 사상 최대 수출 실적도 달성했다. 브라질과 함께 남미의 양대 공룡으로 불리는 아르헨티나가 과연 부활할 수 있을까. 그 현장을 찾았다.
3월 8일 오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푸에르토 마데로 지역. 라플라타 강변에 위치한 이곳은 최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부촌으로 급부상했다. 강 건너편 선박장엔 호화 요트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고, 인근 땅값은 이미 2001년 말 디폴트 이전 상황의 가격을 넘어섰다. 이 지역에 짓고 있는 고층 주상복합아파트는 현지 교민들에게 ‘아르헨티나의 타워팰리스’로 불린다. 코트라(kotra)의 전춘우 부에노스아이레스 무역관장은 “2001년 말 디폴트 선언 이후 미국 달러에 대한 아르헨티나 페소화의 가치가 3분의 1로 하락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지역 땅값이 4년 만에 세 배 이상 오른 셈”이라며 “경제가 급속하게 회복하는 바람에 부동산 가격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물가가 들썩이고 있다”고 말했다. 팬택 휴대전화를 아르헨티나로 수입하고 있는 엑시마르(EXIMAR)사의 고정권 사장은 “최근 경기가 좋아져서인지 품질과 디자인이 괜찮은 휴대전화는 금방 동날 정도로 구매력이 늘고 있다”고 밝혔다. 선박장 바로 옆의 한 고급 스테이크 전문점은 오후 9시가 되자 현지인들로 가득 찼다.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아르헨티나의 전통음식 아사도(소갈비)와 와인을 시키고 담소를 나누느라 식당 안은 시끌벅적했다. 전 관장은 “아르헨티나 현지인들이 즐기기에는 비싼 가격이지만 주말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 잡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내수 경기가 회복세로 돌아서면서 한때 아르헨티나를 떠났던 한인 교민들도 돌아오고 있다. 아르헨티나 한인경제인연합회의 권혁태 회장은 “한때 부에노스아이레스에만 교민이 3만 명을 넘었었지만 불황으로 사람들이 떠나면서 1만5,000여 명까지 줄어들었다”며 “최근 경기가 회복되면서 다시 늘기 시작해 지금은 2만5,000여 명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지 경제 전문가들도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대부분 낙관하고 있었다. 현 정부의 아시아·태평양 교역 담당 경제고문인 안토니오 로페스 크레스포 박사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지금처럼 수년간 연속으로 높은 성장을 한 적이 없었다”며 “일례로 지난 30년을 통산해보면 아르헨티나 경제는 단 1%도 성장하지 않았다”고 잘라 말했다.

달라지고 있는 ‘국제사회 문제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도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7월 9일 대로(Avenida 9 de Julio)’. 땅 위로는 세계에서 가장 넓다는 폭 140m의 18차선 도로가 나 있고, 땅 밑으로는 1913년 남미 최초로 지어진 철로로 지하철이 다닌다. 도로 한복판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시 건립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36년에 세워진 오벨리스크가 있다. 도로 양 옆으로는 ‘남미의 파리’란 말이 실감날 정도로 고풍스러운 건축 양식의 건물들이 즐비하다.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중반만 해도 넘쳐나는 자원으로 세계 5대 강국의 자리에 오르며 ‘남미의 진주’라고 불렸다.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가 젊은 시절 이민을 와 엄청난 부를 축적했던 기회의 나라이기도 하다. 남북 4,000km, 동서 1,000km에 이르는 면적으로 따지면 세계에서 8번째, 한반도의 14배에 달한다. 왼쪽에는 안데스 산맥과 오른쪽에는 대서양을 끼고 있고, 중앙에는 넓고 비옥한 곡창지대인 팜파스 평원이 펼쳐져 있다. 권혁태 회장은 “아르헨티나는 밀 ·밀두 ·옥수수 등의 생산량이 세계 10위권에 들 정도로 농산물 대국”이라며 “사람보다 소가 더 많은 나라로 목축업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말했다. 아르헨티나는 이런 천혜의 자연 환경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50년 동안 불황에 허덕였다. 우리가 50년 만에 세계 최빈국에서 11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반면, 아르헨티나는 1,420억 달러라는 사상 초유의 외채로 국가위험도 세계 1위, 물가상승률 40%를 넘나들며 ‘국제 사회의 문제아’로 추락했다. 아르헨티나 경제가 지난 반세기 동안 ‘죽을 쑨’ 이유는 무엇일까. ‘7월 9일 대로’에서 차를 타고 북서쪽으로 15분쯤 가자 고급 상가와 레스토랑들이 눈에 띄게 늘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현지인과 더불어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바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명물인 레콜레타 묘지였다. 1882년 세워진 이곳에는 역대 대통령 18명을 비롯해 장군 ·각료회의 ·예술가 등 아르헨티나의 유명인사 7만여 명이 잠들어 있다. 수많은 묘지 중에서 단연 관광객들의 눈길을 끄는 곳은 에비타의 묘다. 팜파주의 조그만 도시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탱고 가수, 라디오 아나운서를 하다가 페론과 결혼해 후에 영부인까지 오른 여인이다. 아나운서 출신답게 그녀는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후 대통령궁으로 몰려든 군중 앞에서 ‘아르헨티나여, 이젠 울지 말아요’를 외치며 아르헨티노들의 심금을 울렸던 명연설가였다. 그녀는 아르헨티나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갖게 해줬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많은 활동을 했다. 그녀의 묘 앞에는 항상 꽃다발이 놓여 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아직도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경제 전문가들은 아르헨티나 경제가 반세기 동안 굴곡을 거친 이유로 에비타를 꼽고 있다. 페론의 집권으로 한 순간에 퍼스트레이디가 된 에비타는 노동자 천국을 만들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남편인 페론을 쥐고 흔들며 부통령 자리까지 꿰찬 그녀는 부유층의 재산을 빈민노동자들에게 무상분배했다. 무작정 국가재정을 끌어다 무주택 빈민들에게 아파트와 병원을 지어 주며 서민들을 감동시켰다. 하지만 이로 인해 정부 공공지출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그녀는 결국 33세의 나이에 암으로 요절했다. 그러나 페로니즘이라고도 불리는 그녀의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정책으로 아르헨티나는 외채에 허덕이는 불량 국가가 됐다. 그 후 30여 년 가까이 아르헨티나를 지배한 군부 정권과 85년 바통을 이어받은 알폰신 민간정부는 페론 정부가 남긴 외채와 인플레이션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풀지 못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아르헨티나 국민이 에비타가 펼친 남미식 복지정책에 익숙해졌다는 점이다.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작가 조지 루이스 보그는 “페론주의자들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들은 단지 구제불능일 뿐”이라고 말했다. 89년 4,900%란 경이적인 초인플레이션에 나라가 흔들리면서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이 집권했다. 그는 신자유주의 시장 개방정책으로 전기 ·철도 ·수도 ·항공 등 국영기업들을 민영화했다. 그러나 메넴 정부는 달러 대 페소의 비율을 1대 1로 강제로 유지한 결과, 외채가 급증했고 결국 2001년 1,420억 달러의 외채를 진 채 디폴트를 선언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압박으로 허리띠를 졸라맸지만 40% 이상의 높은 인플레이션율과 마이너스 10%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경제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미국 주도 신자유주의와 결별 이때 등장한 사람이 지금의 키르치네르 대통령이다. 그는 2003년 5월 22%의 낮은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마침 국제 원자재 가격이 뛰고, 1달러 대 3페소로 페소화 환율을 약세로 유지한 덕분에 수출이 호조를 보였다. 2004년 초에는 국내외 민간채권단을 상대로 채권 액면가를 25%로 낮춤으로써 외채 부담도 한결 덜었다. 경제 지표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외환위기 직후인 지난 2002년 마이너스 10.1%였던 경제성장률은 이듬해 8.9%로 뛰어올랐고, 2004년과 2005년에도 9%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지난해에는 수출이 사상 최대인 402억 달러를 기록했고, 수출세(수출품의 5~10% 부과) 수입으로 정부 재정도 튼튼해졌다. 역사상 처음으로 재정흑자와 무역흑자를 동시에 달성했다. 크레스포 박사는 “최근 아르헨티나 경제가 성장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경제 모델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라며 “과거 조건 없는 개방정책에서 벗어나 생산성에 기반을 둔 발전 모델로 교역 대상도 미국과 유럽에서 아시아로 다변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초 아르헨티나는 IMF에 95억 달러의 차관을 전액 상환하고 사실상 IMF 관리체제 조기 졸업을 선언했다. 그리고 ‘IMF 모범생’이던 아르헨티나는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와 결별을 선언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반미 감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현지에서 만난 대부분의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미국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욕부터 시작하고, 나라가 디폴트를 선언하게 된 것도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대신 최근 아르헨티나에서는 아시아가 ‘기회의 파트너’로 떠오르고 있다. 일례로 아르헨티나는 지난해 중국에 콩을 수출해 2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중국 정부도 남미의 풍부한 자원을 높이 보고 협력강화에 적극적이다. 하지만 아직 한국과의 교역량은 미미한 편이다. 아르헨티나의 대(對) 한국 교역량은 전체 교역량의 1.1%를 차지할 뿐이다. 크레스포 박사는 “현 정부가 과거 정부와 가장 큰 차이점은 미국 의존도를 줄이고 아시아와 교역을 늘려가고 있다는 것”이라며 “한국과의 교역량도 점점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점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인플레이션이다. 키르치네르 정부가 선택한 약(弱) 페소화 정책은 경제성장과 수출을 늘렸지만, 물가는 급등하고 있다. 외환위기 직후 2002년 페소화 폭락으로 41%에 달했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003년에는 3.7%로 하락했으나 2004년에 6%를 넘었고, 지난해 다시 12.3%로 상승했다. 물가가 치솟으면서 빈민층의 고통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외환위기 직후 40%를 넘었던 극빈 가구의 비율이 약간 줄어든 데 그쳤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땜질식’ 물가 통제 방식을 동원하고 있다. 예컨대 정부 각료들이 슈퍼마켓 체인점 대표들을 만나 제품 가격을 15% 인하하도록 압력을 넣는 식이다. 강력한 물가 억제책은 많은 외국계 기업들과도 마찰을 빚었다. 지난해 정부는 가격억제책에 반발했던 석유기업 ‘셸(Shell)’과 ‘에소’의 제품들 중 기름 한 캔이라도 사지 말라고 국민에게 당부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권기수 박사는 “아르헨티나는 올해도 6%대 성장을 달성할 것으로 전망되지만 여전히 조심스럽다”며 “경제 위기를 불러일으킨 원초적인 문제가 정부의 포퓰리즘 정책이었음에도 이를 미국 탓으로 돌리는 등 경제 펀더멘털에는 전혀 손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권 박사는 이어 “최근 성장세가 세계 경기 호황에 따른 일시적인 반등인지, 아니면 정말 회복을 하고 있는지는 좀더 지켜봐야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부촌으로 부상하고 있는 푸에르토 마데스 지역.

시내 노점삼의 포스터에 걸린 것처럼 에비타,체 게바라,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인들의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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