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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잡일에 내몰린 학부모 둘째 아이 가질 엄두 못 내”

“학교 잡일에 내몰린 학부모 둘째 아이 가질 엄두 못 내”

서울 강북의 Y초등학교 3학년은 한 학급이 30명이다. 이곳의 학부모 중 학교 일에 참여하는 어머니는 14명 정도다. 명예교사 4명, 학부모회 3명, 어머니회 5명, 체육진흥회 2명이 배정됐다. 한 학급에서 약 45%의 학부모가 학교 일에 참석하고 있다. 학교의 어머니 활동은 교육부에서 정한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조직된다. 강제 사항이 아니지만 학교의 어머니회가 조직되지 않은 학교는 거의 없다. 특히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는 아예 학교 안에 소파·책상·의자·컴퓨터 등을 갖춘 ‘학부모 상주 지도실’이 있다. 이 학교는 학부모 상주 지도실을 만든 배경으로 “좋은 학교를 만드는 일이 교사나 학교의 힘만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 학교는 학부모 자원봉사자를 중심으로‘학부모 보람교사’도 조직·운영한다. 생활지도·학습지도·특기적성 활동 등의 학교교육 활동에 참여하거나 교원의 업무 경감을 위한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총괄지원부 4명(기획담당 3명, 총무담당 1명)을 비롯해 교수 학습지원부 23명(수업지원 및 자료제작부 11명, 도서실 상담부 12명), 생활지도 지원부 21명(교통질서 담당부 16명, 생활지도 및 상담 담당부 5명) 등 학교 활동을 하는 어머니는 이 학교에서 48명에 달한다. 다른 초등학교도 모임의 이름만 약간씩 다를 뿐 비슷한 형식으로 학부모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여기에 급식 도우미, 교통 안전 도우미와 한 달에 두서너 번 청소까지 어머니들이 해야 한다. 경기도 교육청은 지난 4월 21일 열린 교육위원회에서 “도내 879개 학교에서 연인원으로 학부모 11만1000여 명이 급식과 청소, 사서 도우미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중 청소 도우미 23개교 중 931명, 급식 도우미는 118개교 중 8만3700여 명, 사서도우미는 738개교 중 2만7000여 명에 달한다. 도 교육청 관계자는 “교육부 지침에 따라 지난해에 이어 올해 초에도 각 학교에 학부모를 급식 당번으로 동원하지 말라고 공문을 보냈다”며 “학부모가 자원하는 것이지 강제사항은 절대 아니다”고 말했다. 강제사항이 아니라지만 학부모 입장에선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정부의 출산장려 정책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허울뿐인 정책이라는 목소리가 크다. 요즘 초등학교 저학년 자녀를 둔 부모들은 학교 뒷바라지하느라 둘째 아이 출산은 꿈도 못 꾼다는 것이다. 직장 다니는 맞벌이 부부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유능한 커리어우먼이 아이를 학교에 입학시킨 후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아이를 안 낳는 사회다. 인구 감소는 노동력 인구 감소, 고령화 문제 야기 등 경제적 재앙을 동반한다. 보건복지부가 밝힌 국내 적정 합계 출산율은 1.8~2.4명. 2000년 국내 합계 출산율은 1.47명에서 2005년(잠정치) 1.08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중 평균 이하다. 정부는 2004년 1월 노동부·보건복지부·재정경제부·여성부 등 관련부처 공동으로 ‘저출산, 고령사회에 대응한 국가실천전략’을 마련하고 다양한 출산장려 정책을 펴왔다. 지난해 9월엔 복지부 5개 팀에 ‘저출산 고령 사회정책본부’를 신설, 범정부 차원 대응을 하고 있다. 시·도별로도 불임부부 시술비 지원이나 출산장려 금융상품 지급, 출산 장려금 등을 내세우며 자체적으로 출산장려 정책을 펴고 있다. 최근에도 정부는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 시안으로 2010년까지 32조원을 투입, 출산율을 끌어올리고 정년 연장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불이익 받을까봐 억지로 응해 그러나 출산 장려금 등을 지원하는 것보다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들이 일하면서 마음 편히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공교육 시스템 등이 갖춰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공교육 현실은 이와 동떨어져 있다. 교사들이 해야 할 일까지 학부모들이 나서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2학년 딸아이를 둔 강남구 청담동에 사는 이지영(36·가명)씨는 “학교 일에 불참하면 아이에게 어떤 불이익이 갈지 몰라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학교 일뿐만이 아니다. 아이의 학교 수업이 끝나면 숙제를 돌봐주고 이곳저곳 학원을 보내는 일까지 요즘 엄마들은 아이의 1인 매니저 역할을 해야 한다. 이화여대 경영학과를 수석으로 입학, 졸업하고 국내 굴지의 증권회사에 신입사원 수석으로 들어간 임혜정(35·가명)씨는 올해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결국엔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임씨는 “아이가 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친정 엄마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키울 수 있었으나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상황이 달라졌다”며 “한 달에 한 번 가야 하는 급식, 청소와 아이 숙제 돌보기 등 직장생활을 하며 동시에 병행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둘째 아이 출산은 남의 일일 수밖에 없었다. 노원구 상계동에 사는 주부 박지영(38·가명)씨는 얼마 전 초등학교 3학년 딸아이의 사회 과목 공부를 도와주기 위해 이틀 내내 동네를 다녔다. 사회 과목 중에 ‘동네 지도 그리기’라는 항목이 있는데 그 반 엄마들 6명이 동원돼 아이들을 삼삼오오 데리고 다니며 보조교사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학급의 교사는 학교에 있었다. 이 학교에서는 부모들이 한 달에 한 번 학교에 초청돼 예절교육을 가르치기도 한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때는 한 반에 70명이 되는 아이도 선생님 혼자 다 가르쳤잖아요. 왜 학교 공부까지 엄마들이 나서서 가르쳐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아요. 아무리 교사 일이 과중해도 교사가 해야 할 일과 학부모의 몫은 엄연히 다른데 교사 일까지 학부모가 쫓아다녀야 하니 애 많이 낳기가 쉬운 일이겠어요?” 모 학교에서는 교사가 어머니회 소속 학부모에게 수업시간에 ‘아이들을 좀 부탁한다’고 요청하고 교사 회의를 하러 가는 상식 밖의 일들도 벌어지고 있다. 학부모가 교사 대신 아이의 학습지도까지 해주는 상황에 대해 서울시 교육청 관계자에게 물었다. 교육청 담당자는 펄쩍 뛰었다. “아이 숙제를 대신해주는 엄마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교사가 할 일을 왜 학부모에게 전가하겠는가. 공부를 가르치는 건 교사의 몫”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교육청 관계자는 현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 학교 학부모는 분명히 교사의 요청에 의해 도우미를 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준비물이나 숙제도 1, 2학년 아이들이 혼자 하기 벅찬 것이 대부분이다. 공무원 생활을 하며 맞벌이를 하는 손지선(38·가명)씨는 “어느 날 교사와 상담이 있어서 학교에 갔더니 깜짝 놀랐다”며 “우리 아이가 해 온 숙제는 저만치 구석에 처박혀 있고 도저히 아이들 혼자 실력으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만들기 숙제들이 뽑혀 있었다”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의 과제물이 엄마들의 솜씨로 꾸며진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얘기다. 결국 그날 이후부터 이씨는 회사 퇴근 후 밤을 꼬박 새우면서 아이 숙제를 해주는 것이 일과 중 하나가 됐다. 요즘 일부 초등학교에선 학생 신체검사도 학교에서 하지 않고 부모 재량 하에 인근 병원에서 할 것을 요구한다. 송파구의 한 초등학교도 얼마 전 신체검사를 타 병원에서 해 올 것을 요구했었다. 맞벌이 가정의 경우 아이 신체검사를 위해 둘 중 한 명은 휴가계를 내야 하는 상황이다. 급식 도우미도 맞벌이 여성들에겐 힘겨운 부담이다. 지난해부터 학부모 급식이 학부모 자율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학부모들은 반강제적으로 동원되고 있다.

학교 급식에도 반강제적 동원 서울시 교육청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558개 초등학교를 조사한 결과 366개교인 65.5%가 학부모에 의존해 배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인적자원부에서 발표한 ‘2005학년도 학교급식 실시 현황’ 자료를 보면 총 139만6000여 명이 동원됐고, 이 중 초등학생 학부모가 111만1000여 명(79.6%)을 차지했다. 나머지는 중학생(12.8%)과 고등학생(6.9%)이다. 급식 재원 부담도 학부모가 연 2조4442억원으로 77.1%를 부담하고 있다. 교육부의 급식 지원금은 교육부 전체 예산의 20% 남짓한 실정이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초등학교 급식을 무상으로 지급하고 있는 현실과 비교된다. 국내는 재원 부담도 모자라 봉사까지 학부모가 해야 하는 실정인 것이다. 유명한 홈쇼핑 회사의 팀장인 이미애(35·가명)씨는 초등학교 1학년생인 딸아이를 두고 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있는 딸아이 급식 도우미로 참가하기 위해 회사에 핑계를 대고 나올 수밖에 없다. 급식 도우미만 하고 가면 다행이다. 와서 교실 청소까지 하고 점심은 복도에 선 채로 허둥대고 먹고 다시 회사로 돌아오는 일을 한다. “자식 맡긴 사람이 죄인이라고 어떡하나요. 할 수 없이 해야죠.” 일을 하는 엄마들이 정장 차림에 뾰족구두를 신은 채로 학교로 달려와 아이들의 급식을 챙겨주고 돌아가는 일은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니다. 학부모들의 학교일 참석이 늘어나면서 교사의 역할에 대해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선 교사들도 할 말이 많다. 경기도 한 초등학교 교사는 “공무를 처리하느라 오후 9시, 10시가 넘어 퇴근하는 것이 교사들의 현실”이라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 있을 때가 다반사”라고 하소연했다. 이렇다 보니 봉사나 서비스 부문은 학부모의 손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교사들은 학교별로 위원회가 많아 그 위원회 뒷바라지를 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교사들은 학교 내에 만들어진 학업성적관리위원회, 교육과정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의 위원으로 소속돼 활동한다. 교육부 장관을 역임했던 문용린(59)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수는 “학부모들이 자발적으로 학교 교육에 참석하는 건 바람직하나 노동력 부족을 채우기 위해 동원하는 것은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문 교수는 “정부가 교육에 적절한 투자를 해야 하는데 학교들이 너무 영세하다 보니 급식 제도 등 일손이 달려 학부모를 고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나라 전체적으로 교육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게 문제다. 아파트는 좋은 부지에 우후죽순처럼 지으면서 학교에 식당 하나 없는 것이 당연시되고 학교 지을 땅은 변두리에 마련하기도 힘든 것이 우리 교육계 현실”이라며 “학교 재정이 빈약하다 보면 지금의 주먹구구식 학부모 동원 시스템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따끔한 충고를 했다.

체육대회 대신 바자 여는 이유 서울의 K초등학교는 지난해 1년에 한 번 하는 체육대회를 하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들 주최로 여는 알뜰 바자 행사를 두 번 했다. 이 행사에 동원된 한 학부모는 “형식적으로는 아이들에게 아껴쓰는 물자절약 정신을 일깨워준다는 의미가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학교 수익에 보탬을 얻으려고 한 것 아니겠느냐”며 “바자에 동원되는 학부모들은 하루 종일을 투자해야 하고 주머닛돈도 갹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체육대회를 열면 교사들만 피곤하고 수익이 안 나지만, 바자를 열면 수익금 일부를 학교에서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여성개발원이 2004년 대도시 가임여성 1000명을 대상으로 저출산 원인을 설문조사한 결과 ‘경제위기로 인해 기혼남녀의 취업과 직업 불안정’(21.0%)에 이어 ‘양육비 부담’(19.7%)과 ‘맞벌이 부부의 자녀 양육을 덜어주기 위한 사회적 지원이 부족하기 때문’(9.7%)이라는 의견이다. ‘사회적 지원 부족’은 공교육 현장까지 스스로 뛰어야 하는 학부모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정부의 출산장려금 지원만으로는 아이 뒷바라지에 허덕이는 부모들의 마음을 잡을 수 없다. 공교육이 원스톱 서비스를 해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교육과 학생 사이 사각지대를 생활전선에서 뛰고 있는 학부모들이 메우고 있는 한 정부의 출산장려 정책은 공허한 메아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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