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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어머니 휜 허리 보며 싱크대 생각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어머니 휜 허리 보며 싱크대 생각

우리나라 성인 중 ‘오리표 싱크’라는 상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40여 년 전에 이 싱크대가 생산됨으로써 우리나라 주부들은 드디어 허리를 펴고 편하게 설거지를 할 수 있게 됐다. 그것은 가히 주방문화의 혁명이었다. 이번 호부터는 그 혁명의 주인공, 박유재 회장의 불 같은 사업 스토리를 소개한다.



박유재 에넥스 회장 1934년 충북 옥천생 58년 국제대학 화학과 졸업 63년 제일도기사 설립 81~92년 오리표싱크 회장 81년 제11대 국회의원 92년 오리표에서 에넥스로 상호 변경 92년 에넥스 대표이사 회장지난 11월7일 열린 의료사고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궐기대회.

부엌가구만 전문으로 생산, 판매하기를 올해로 36년째 계속해 오고 있는 주식회사 에넥스(ENEX)는 최근 두 가지 좋은 일이 생겼다. 지난 6월 대한주택공사에서 펼친 판교아파트의 ‘가구류 디자인 공모전’에서 국내 유명 부엌가구 전문기업 13개 업체가 참여한 가운데 최우수 평점을 받아 8월부터 분양되는 판교 신도시 중대형 아파트에 부엌가구를 포함해 모든 가구를 납품하게 됐다. 또 서울대 항공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석·박사를 마친 뒤 한국통신(현 KT)에서 무궁화위성 발사기술부장을 지낸 박유재 회장의 2남 박진호 박사가 에넥스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 지난해 적자에서 올 2분기에는 5억2800만원의 영업이익을 냈다는 게 또 하나의 뉴스다. 건설경기 위축으로 모든 부엌가구 업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흑자를 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부엌가구 분야가 건설경기의 영향을 크게 받아 독자적인 시장(시장 규모는 1조5000억원으로 추산)을 갖지 못하고 있음에도 ‘오리표’라는 이름으로 40년 가까운 기업 역사를 쌓아 오고 있는 창업주 박유재(72) 회장을 만났다. “국민소득 87달러밖에 되지 않던 1960년대 정부가 대기업 육성 정책을 추진할 때 중소기업으로, 그것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싱크대를 생산하겠다고 하니까 전부 미친놈이라고 했소. 그땐 사람들이 싱크대라는 말도 몰라요. 자숫물통·개수대·설거지통이라고 해야 겨우 알아듣고. 그나마 설거지통도 물을 받는 철판만 생각하지 찬장이 달려 있고 입식이라는 걸 앉은뱅이 아궁이와 나무를 연료로 쓰는 독립부엌에서는 아예 몰랐어요. 쪼그린 채 앉아서 설거지를 해 온 사람들이라 일어서서 설거지를 어떻게 하느냐고 했으니 뭐.”

“싱크대 만든다니 미친놈이래” 사실상 68년부터 싱크대를 만들었지만 71년 ‘오리표 싱크’라는 공식적인 상품명을 사용한 후 21년째가 되는 92년 3월, 주식회사 ‘에넥스’로 상호를 변경한 박유재 회장은 싱크대 제조업의 창시자였다. 그러나 이미 29세 때인 63년에 서울 을지로에서 위생변기·타일 등 건자재 도기류를 수입, 판매하는 ‘제일도기사’를 창업해 어찌 보면 생활환경과 입식부엌 현대화에는 선도적인 역할을 해 온 독보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박 회장을 만난 지는 오래됐지만 10·26 이후 이른바 신군부가 득세하고 새로운 정객들이 정치권을 달굴 때 권정달 전 의원에게 이끌려 11대 국회의원으로서 4년간 외도한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부엌가구만을 고집한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여정은 흥미로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민당 총재시절 경쟁이 아니라 정경유착으로 대기업들한테 독점을 주다시피 하니까 중소기업들이 도산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거 아니냐고 비판했지만 막상 대통령이 돼 중소기업을 얼마나 육성했어요? 김영삼 전 대통령이 통일민주당 총재 시절 중소기업청을 만들어 중소기업을 적극 도와야 한다고 했지만 뭘 했어요? 중소기업은 역대 정권들이 말만 무성하게 하고 실제로는 서자 취급했어. 그런데 중소기업 하겠다니까 미쳤다고 했는데 거기다가 주방기기산업을 한다고 했으니 돌았다고 하지. ‘주방’이라는 말 자체도 싱크대라는 말이 보편화하기 전에는 생소한 단어였고 ‘주방문화’라는 말은 아예 없었어. 언제부터 썼소? 그러니까 ‘주방기기산업’이라는 것부터 역사가 40년이 채 안 된단 말이오.” 국가정책의 다변화 속에서 유독 중소기업, 특히 주방기기산업에는 무관심했던 시절 박 회장은 주방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개조되지 않고는 우리나라 주부들을 허리 병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 싱크대에 관심을 보인 동기였다. “뭐, 고차원적인 기업 철학은 나중이고, 우리 어머니 허리를 무엇이 저렇게 휘도록 만들었나, 거기서부터 입식부엌과 싱크대를 생각하게 된 거요.” 오리표 싱크는 71년 4월 ‘서일공업사’라는 이름으로 출발한다. 수입품과 국내 생산품을 도매로 판매하는 서일공업사 안에 싱크대 판매도 포함시킨 셈이었다. 그러다가 76년 3월 ‘(주)오리표 싱크’라는 별도 법인으로 전환했다. 원시적이고 수작업 형태였으나 싱크대를 처음 만들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34세 때인 68년 초겨울이었다. 이 무렵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무르익으면서 주택수요가 늘고 여기저기에 호텔이 들어서면서 욕조·변기·세면대 같은 각종 도기와 원자재 수요가 급증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도기사를 가지고 있던 박 회장으로서는 돈벌이만 생각한다면 생소한 싱크대 제조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특히 20대에 도기 판매시장을 석권한 집념과 사업적인 발상이나 추진력이 무섭다는 게 그를 알고 있는 ‘장사꾼’들의 공통적인 평이었다. “그건 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박유재고, 나는 야심이 따로 있었소. 지금도 제일 도기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 당시 제일도기라고 하면 서울에서 날렸지. 그렇지만 그건 유통업이오. 남이 만들어 놓은 물건을 수입해 다시 팔아먹는 장사였단 말이오. 명색이 사업을 한다는 사람이 자기 정신이 들어 있고, 혼이 들어 있고, 사상이 담겨 있는 자기 제품을 만들지 않고 유통업으로 돈 좀 번다고 큰소리 쳐봤자 성취감을 맛볼 수 있겠어요? 속이 허전해 못 견디겠더라고. 제조업을 해 보고 싶었던 거요.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었어.”

“혼이 깃든 제품을 만들고 싶었지” 말이 제조업이지 완성품만 수입해 판매하던 사람이 경험도 없이 당장 제조업을 생각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 정책은 다음 문제고, 친지들이나 친구들부터 말려요. 공장을 시작하면 세 번은 남의 손에 넘어가야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는데 왜 편한 장사 놔두고 엉뚱한 짓을 하려고 하느냐, 두고 보면 알 테지만 실컷 고생해 이제 좀 될만 하면 큰 기업들이 달려들어 주워 먹으려고 덤빌 거다, 죽을 짓을 왜 하느냐, 별소리 다 있었소. 그래도 해야겠다고 결심했는데 처음엔 기술이 있나? 그래서 60년대는 ‘곤조’라는 일본말을 자연스럽게 썼는데, 서울 장안에서 곤조가 있고 성깔이 더럽다고 소문은 나 있었지만 기술이 제일 좋다는 강춘남씨를 저녁만 되면 찾아갔어. 술도 수차례나 사고. 그 사람은 기계를 만드는 재주가 뛰어났는데 괴팍하고 얘기를 하다가도 직성에 안 맞으면 벌떡 일어나서 가 버려요. 그래도 퇴근길에 기다렸다가 붙잡아 철판을 주고는 싱크대를 만들라고 했지. 대개 방킹이라고 해서 스테인리스 철판을 잘라 망치로 두드려 그라인딩 하고 땜질해 만드는 거지만 좋게 말하면 수제품이고 지금 보면 완전히 원시적인 대장간 물건이지. 하하.” 그러나 만드는 사람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망치질을 했으니 물건이 제대로 나올 리 만무했다.

▶박유재 회장은 입식 주방을 도입해 ‘부엌 혁명’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1950~60년대 전통 부엌(위 사진)과 70년대 이후 에넥스가 선보인 입식 주방(아래)이 대조적이다.

“싱크라는 단어 자체가 수입된 말 아니오. 지금은 누구나 다 알지만 결과적으로 70년대가 돼서 그나마 싱크대라는 단어를 내가 토착화시킨 셈인데, 좌우간 기능과 용도는 설거지통이니까 무조건 그림을 그려주고 만들라고 했더니 역시 소문난 기술자야. 엇비슷하게 만들어내요. 그러다가 제조업을 제대로 하려면 대량으로 찍어내야 되겠단 말이오. 그래서 일본에 ‘선 웨이브’라는 최고의 싱크대 전문회사가 있는데 찾아갔지요. 거기서 눈도장을 찍어 와서는 내가 직접 공장 레이아웃을 하고 금형도 발주하고 유압기계 프레스도 만들어 시작을 한 거요.” 하지만 사업성이 있느냐 없느냐, 시장이 있겠느냐 없겠느냐 하는 것은 기술 문제와 별개였다. 성공할 가능성을 내다볼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박 회장은 그때 30대에 불과했지만 미래를 예측하는 감각이 유난히 뛰어났던 것 같다. 기업들마다 정부의 대기업 육성정책을 등에 업고 경쟁하다시피 백화점식 경영으로 모든 업종에 진출하려는 상황인데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싱크대에 도전하겠다는 야심을 가졌던 것부터 특이했고, 그와 함께 일본의 건설 경기를 주목한 것도 예사롭지 않은 판단력이었다. “내가 일본을 여러 차례 갔거든? 거기서 말이오, 우리나라 경제는 일본의 경제발전 수순을 그대로 밟고 있다는 감을 강하게 받았다고. 그게 뭐냐? 정부가 일자리 때문에 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으니까 국내의 유휴 노동력을 흡수하려면 가장 손쉬운 방법이 건설경기를 활성화시키는 건데, 일본도 그랬지만 틀림없이 우리나라도 아파트를 건설할 거다 하는 생각을 한 거요.” 아파트라는 개념도 전혀 일반화되지 않고 있던 무렵이었다. 아파트라는 단어 자체가 국민에게는 생소했고 그나마 아파트에 대한 인식을 조금씩 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보다 10여 년이 지난 78년도에 이른바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이 터지면서였다. 에피소드이지만 국회의원들한테도 아파트는 유식한 단어였다. 그 당시 9대 국회가 열리자 야당의 모 국회의원이 특혜분양 사건을 추궁하면서 보좌관이 ‘현대 APT’라고 써준 원고를 가지고 ‘현대 에이피티 아파트’라고 읽어 폭소가 터질 정도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박 회장은 68년 무렵에 이미 아파트 건설을 내다보고 주방기기산업과 아파트 시대를 연계시켜 예측을 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 “아파트를 연구하라” 그런데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박 대통령이 김현옥 서울시장을 호출한 게 그 무렵이었다. 박 대통령은 대뜸 ‘아파트에 대해 연구해 본 적 있소?’하고 김 시장에게 하문했다. 이것은 아파트가 주방기기산업하고 직결된다는 점에서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김현옥 시장에게 지시한 내용의 요지는 이랬다. “서울시가 시유지를 웬만큼 확보하고 있고,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전에 우선 서울시에서 시범적으로 검토를 해 보는 게 좋겠다. 파월장병들이 속속 귀국하고 있는데 조사를 해 보니 단칸방이라도 내 집을 마련하고 싶다고 한다. 장병들뿐 아니라 서민들 꿈도 내 집을 갖는 게 아니겠나? 한정된 땅에서 많은 주택을 지을 수 있다면 그것이 아파트가 지니고 있는 최고의 장점인 것 같은데 싼값으로 공급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 보라.” 이것이 부엌문화의 개혁이 시작되는 배경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검토 지시가 아파트 건설과 주방기기산업이 궤를 같이하도록 만드는 셈이기도 했다. “분위기는 참 좋았어. 사회적으로 변화가 일어났단 말이오. 근데 박유재가 싱크대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니까 싱크대를 보지도 못한 친구들이 덤비더라고. 잘 해 보라고 했지. 사업하는 사람한테는 항상 경쟁자가 있게 마련이거든. 그걸 사람에 따라서는 적이라고도 하겠지만 나는 경쟁자라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진짜로 여기저기서 군소업체들이 싱크대를 만든다고 난리야. 그래도 내버려뒀어요. 품질로 승부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러면서 68년 초에 매입한 신정동의 1500여 평 부지에 공장을 짓기로 하고 기술자들을 모집했다. 당연히 강춘남씨도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박 회장이 세우는 공장으로 찾아왔다. 그동안은 과외시간으로 틈틈이 박 회장이 요구하는 싱크대를 만들어 왔지만 아예 사표를 내고 직장을 옮기려고 온 것이다. 그런데 박 회장의 태도가 돌변했다. 대여섯 차례나 박 회장이 직접 찾아가서 같이 하자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돌변이었다. 강춘남씨가 오히려 당황했다. “수차례 도와 달라고 하더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이리로 오겠다니까 돌아가서 기다리라는 건 도대체 뭡니까?” “내가 통사정을 하면서 도와 달라고 할 때는 내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 거고, 이제는 나한테 오겠다고 한 이상 내 사람 아니오. 내 사람이면 내가 하라는 대로 하시오. 가서 기다리시오.” 이것이 사람을 다루는 박 회장의 특유한 스타일이었다. 자기 사람은 자기가 책임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마치 대통령이 주방가구산업을 지원이라도 하는 것 같은 일들이 연속해 일어났다. 68년에는 서울시에 아파트 건설을 지시하더니 69년 12월에는 소위 ‘도둑촌’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고급주택들이 모여 있는 동빙고동의 일명 도둑촌에 대한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이 심야에 서울시장과 당직 경호원만 대동하고 현장을 기습 시찰했고, 실제로 집권 공화당의 고위 인사를 포함한 K그룹 김 회장의 집안에서 에스컬레이터와 실내 수영장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수입 대리석으로 꾸며진 바닥과 화려한 주방 등은 대통령도 처음 목격하는 것이었다. “청와대보다 비교할 수 없이 좋구먼. 대문에다가 ‘순찰함’이라고 달아놓은 것은 뭐야? 파출소에서 지켜드릴 테니 두 다리 뻗고 주무시라는 뜻이야?” 당장 불호령이 떨어지고 12월 30일까지 호화주택 소유자들을 조사해 보고하라는 엄명은 해당자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서민주택의 기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수도권에서 대지 150평 이상을 일단 호화주택으로 규정한 것이 이 무렵에 나왔다. 그런데 이때 죄 없이 놀란 사람이 김현옥 시장이었다. 이미 착공한 마포구 소재 서민아파트 공사 현장으로 달려간 김 시장은 첫 아파트라는 점을 감안해 다소 고급스럽게 주문한 실내가구와 싱크대 설계부터 서민용으로 화급히 바꾼 것이다.

‘도둑촌’ 사건으로 주문 쇄도 “하하하. 난리가 났어. 그리고 나서 70년 1월 5일인가? 그땐 시무식이 5일이었잖소. 신문에 보니까 박 대통령이 시무식 끝나자마자 특명을 내려 장·차관을 비롯해 고급공무원, 국영기업체장, 여당 간부 등 전부 300명이 넘는 사람의 재산조사를 지시하고 호화주택·호화묘지까지 조사하라고 했단 말이야. 국민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경제건설에 피땀을 흘리는데 뭐냐 이거지. 그러니까 그게 호수에 돌 던지는 것과 같은 거거든? 소문이 쫙 퍼져 전부 이사 가거나 집안을 고치는데 그때 싱크대 주문이 막 들어오는 거요. 초기 때니까 지금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품질이지만 문제는 그런 변화가 시작됐단 말이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70년 1월 23일, 정부는 남서울계획을 발표했다. 결과적으로 부동산 투기로 졸부를 만들어 내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기도 했지만 서울의 비대화를 막고 인구 분산책의 하나로 강남지역을 개발하겠다는 발표는 곧바로 아파트 대단지가 건설되는 것을 의미했고, 이것은 일본에서 보고 온 박 회장의 예측이 적중하는 것이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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