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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 만성피로에 고사될 판

기업들 만성피로에 고사될 판

▶올 연초 노무현 대통령은 '참으로 기업은 위대하다'며 극찬했지만, 기업에 대한 선물은 건네준 것이 별로 없다. 사진은 올 3월 있었던 노 대통령의 대한상의 특별강연 모습.

출총제를 폐지해 달라’ ‘수도권 과밀억제지역 내 지방세 중과세를 폐지해 달라’ ‘주택공급 활성화를 위한 규제를 재검토해 달라’ ‘대기업 계열 사모펀드에 대한 제한을 폐지해 달라’ ‘위생관리교육 등 형식적인 법정교육을 개선해 달라’…. 기업들이 정부에 제출한 건의사항 중 아주 일부다. 정부의 대답은? ‘수용 불가’. 기업은 ‘신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소망한다. 하지만 규제의 칼을 든 정부는 그럴 뜻이 별로 없어 보인다. ‘기업을 다스리는 규제의 달콤함’ 때문일까? 지난해 기업 관련 규제는 오히려 늘었다. 규제 총수가 늘어난 것도 문제지만 규제의 질이 기업을 옥죌 만큼 심각해지고 있는 것도 문제다. 정부가 스스로 기업 규제를 개혁하고 개선할 의지나 아이디어가 없다면, 기업이 간절히 필요해 건의하는 것만이라도 충실히 들어주면 또 말은 달라진다. 전경련 관계자는 “경제 5단체가 매년 정부에 규제개혁 건의를 하는데 해가 갈수록 수용률이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출자 규제는 세계 유일 이코노미스트가 ‘경제 5단체가 참여정부 출범 때부터 지금까지 건의해 수용된 규제개혁 비율’을 조사해 봤더니, 참여정부 첫해에는 일부 수용된 것까지 포함해 54.4%였지만, 2004년에는 32.8%, 지난해에는 26.6%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갈수록 기업 할 맛이 떨어진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건의가 무시되면 규제는 남고, 기업은 만성피로에 시달리게 된다. 정부 사람들이야 “규제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하면 쉽지만, 도대체 왜 존재하는지 모를 규제는 지금도 여전하다. 출총제·금산법·비정규직법안·집단소송제·이중대표소송제와 기업지배구조·노동관련 규제 등 이런저런 ‘기업 직접 규제’는 대략 2000건을 넘는다. 기업의 사활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규제만의 얘기가 아니다. 아주 소소하지만 기업에는 피곤한 규제도 많다. 중소기업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보건·안전·위생 의무교육 부과도 그런 예다. 천안시 소재 제조업체인 A사는 직원이 20명뿐이지만, 내부에 환경 및 안전 담당자가 있다. 이 담당자들은 별도의 교육기관에서 1년에 3일 정도 보수교육을 받아야 한다.
물론 교육비도 납부해야 하고, 회사는 출장비를 지급하게 된다. 종업원이 몇 안 되는 회사에서 3일씩 중견 직원이 회사를 비워야 하는 것에 대해 대부분 중소기업들의 불평이 많다는 게 대한상의 관계자의 얘기다. 온라인 교육으로 대체해도 되는 수준의 교육을 굳이 특정 장소에 모이게 하는 것도 공무원 편의주의의 전형이다. 이런 작은 규제부터 덩어리 규제까지 기업이 ‘부디 없애주길’ 바라는 탄원이 지금도 공무원 책상 서랍 속에 잠자고 있거나 항상 ‘검토 중’이다. 재계는 ‘대규모 기업집단 지정제도’ 자체를 폐지해주길 바라고 있다. 공정거래법 제9조와 10조는 ‘자산 규모 2조원 이상 기업집단에 대해 상호 출자와 상호 채무보증을 제한하고, 6조원 이상 기업집단은 출자총액을 제한’하고 있다. 이 규정이 “대기업에 대한 차별적 규제의 시발점”(조성봉 한국경제연구원 박사)이라는 게 재계의 생각이다. 올해는 3개 기업집단 180개 회사가 대기업 규제의 테두리로 들어갔다. 기업출자를 직접 규제하는 것은 일본이 지난 2002년 폐지함에 따라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다. 하지만 ‘규제 대상 기업의 93%가 출총제 때문에 신규 사업에 제약을 받고 있다’(2006년 7월 대한상의 조사 결과)는 데도 정부는 “출총제와 투자는 직접 관계가 없고, 대안이 없는 한 출총제는 폐지할 수 없다”(이동규 공정거래위원회 경쟁정책본부장)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영용 전남대 교수는 “출총제는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로 도입된 것인데, 이는 경쟁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자와 약한 자를 차별적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경쟁억제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지주회사에 대해 부채비율을 100% 이하로 규제하고, 지주회사가 자회사 발행주식의 50% 미만을 소유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공정거래법도 문제다. 이 규제대로라면 삼성전자가 지주회사로 전환할 경우, 상장 계열사를 자회사로 편입시키기 위해선 무려 15조원 이상의 자금이 소요된다. 현재 국회에는 지주사 부채비율을 200%로 완화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공장설립 인허가에 평균 137일 대기업에 속하는 금융회사는 계열사 주식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는 규정도 시장경제 측면에서는 완전한 재산권 침해로 볼 수 있다. 또 대기업 소속 금융기관이 사모펀드에 마음대로 투자할 수 없게 한 ‘간접투자자산운용법’도 대기업에 대한 차별적 규제다.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해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가 폐지되고 주식형 사모M&A 펀드가 허용됐음에도, 정작 국내 대기업의 발은 묶어놓고 있다. 이에 대해 재계는 ‘적대적 M&A 방어장치’를 입법화해 달라고 국회에 요청해 놓은 상태다. 자기 주식을 취득하는 것 외에는 경영권 방어제도가 미흡하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다. 또 대기업 대주주 의결권은 3%로 제한하고, 계열 금융기관의 의결권 행사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면서, 소액주주는 보유주식보다 배 이상 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 집중투표제 등도 재계가 ‘폐지’를 바라는 규제로 지목되고 있다. 기존의 겨눈 ‘칼’도 쓰린데, 또 다른 칼을 들이대니 대기업들은 ‘해도 너무한다’는 반응이다. 상법을 통해 이중대표소송제와 집행임원제(28쪽 참조)가 도입되고, 임원별 보수 내역을 공시하도록 하겠다는 증권거래법 개정안이 검토되고 있다. 증권집단소송제·소비자집단소송제도 무서운데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까지 검토된다.
이 제도는 소비자가 기업에 손해배상을 받을 때 실제 배상액의 수백 배까지 배상하도록 하는 제도다. 재계가 두려워하는 것은 ‘남발’ 가능성이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징벌적 손해배상액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지만 증가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종업원이 개인적으로 불법행위를 저지르더라도 회사나 회사대표가 연대해 처벌하는 내용의 ‘양벌 조항’ 관련 법률만 300여 개에 달한다. 재정경제부가 최근 발표한 ‘기업환경 개선대책’에서 다소 완화됐다고는 하지만, 우리 기업은 그동안 공장도 제대로 못 지을 처지였다. 물론 현재도 그렇다.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하다는 수도권 이외 지역에도 공장을 설립하기 위해 인허가를 받는 데 평균 137일에 6500만원의 비용이 든다. 산업용지로 쓸 땅값이 일본·대만을 제외한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 2~6배나 비싼 것은 문제의 축에도 못 낀다. 정부가 개선하겠다고 했지만 공장설립 과정에서 문화재가 발견되면 개별 기업이 조사·발굴 비용을 부담하고, 사업 진행이 연기되는 것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는 그나마 견딜 만한 규제다. 대기업이나 중소기업 할 것 없이 수도권에는 마음대로 공장을 지을 수도 옮길 수도 없고, 전국적으로 땅값은 오르고, 토지 관련 규제가 강화되는 3중고를 겪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수도권에서 공장을 신증설하기 위해서는 수도권정비계획법의 공장 총량 규제 등 4개 법의 심의를 통과해야 한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이에 대해 ‘악랄한 4중 필터링 장치’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기업들은 수도권에서 공장 신·증축과 용도변경 등에 대해 ‘총량’을 설정하는 ‘공장총량제’의 완전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경기도 측에 따르면 현재 34개 기업이 공장총량제 때문에 55조8112억원의 투자를 미뤄놓고 있다. 기업의 지방이전 촉진이라는 애초의 정책효과는 미비하면서, 기업에 부담금 비용만 증가시켰던 ‘수도권 과밀억제권역 내 지방세 중과세 폐지’도 수차례 논의만 됐을 뿐 아직 유효하다. 내년 1월 1일부터는 복수노조가 허용된다. 재계는 이 제도를 3년만이라도 유예해 달라고 정부에 건의해 놓은 상태다. 노사 간 교섭에 관한 방법·절차에 필요한 합의가 지연돼 혼란이 예상된다는 이유다. 이에 대한 정부 반응은 ‘그대로 추진한다’는 것이다. ‘대체근로 허용’도 전투적 노조로 인해 막대한 노동손실 일수가 발생하는 기업들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시장경제 학자들은 이 법을 대표적인 ‘사용자에 대한 영업권 침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기업이 그동안 숱하게 정부에 건의한 기업환경 개선은 수백여 가지가 넘는다. ‘기업 하는 데 걸림돌만 제거해주면, 기업 하기 좋은 환경만 만들어주면 잘하겠다’는 데도 안 들어주는 정부에 대해 기업인은 야속하기만 하다.


참여정부 대선공약 돌아보니


대기업 꽁꽁 묶는 것만 잘 지켜 대기업 입장만 놓고 본다면, 현 정부의 반(反)대기업 정책이 놀랄 일도 아니다. 20개 정책목표로 이뤄진 대선공약 중 하나가 ‘재벌 개혁’이었으니 말이다. 이코노미스트가 참여정부의 대선공약 중 재벌 및 기업 관련 공약 이행 여부를 조사해보니, 대기업을 규제한다는 공약은 대부분 성실히(?) 약속을 지킨 것으로 확인됐다. 참여정부는 공약을 통해 ‘재벌 계열사 간 상호 출자, 채무보증 금지 및 출자총액 제한’을 유지하겠다고 선언했었다. 집단소송제와 상속·증여세 완전포괄과세 도입도 공약이었다. 재벌 금융회사가 보유한 계열사 주식에 대한 부당한 의결권 행사를 엄격히 제한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정부로서는 약속한 공약을 이행한 것이지만, 덕분(?)에 기업들은 투자를 주저하고, 경영권을 보호하는 데 주력하고, 나라 경제는 잠재성장률을 밑돌고 있다. 7% 성장을 이루겠다는 약속은 애초에 물 건너갔다. 250만 개 일자리 창출도 공염불이 됐다. 노사화합으로 사회경제 손실비용을 최소화하겠다는 외침도 오히려 불법파업이 늘면서 헛구호가 됐다. 준조세를 대폭 정비하겠다, 수도권 지역 토지 이용·거래제도를 대폭 정비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경제의 맏형 역할을 하는 대기업을 공격하면서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외쳤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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