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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더 이상 설 땅이 없다

벼랑 끝 더 이상 설 땅이 없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 모든 정부가 고장 난 시계 태엽처럼 반복했던 말이다. 노무현 정권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지금 기업과 기업인들이 각종 제도적 규제와 공무원들의 부패적 무사안일로 고통받고 있다. 이 와중에 기업인들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할 이중대표소송제를 주 내용으로 한 상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기업들은 반발하는 듯하지만 제 풀에 지쳐 무기력하다. 대한민국은 기업인의 무덤인가? 이코노미스트가 들여다봤다.
벌써 잊었나. 참여정부가 내세운 주요 공약 중 하나는 ‘기업 하기 좋은 나라’였다. 경제 관련 규제를 지속적으로 손질하고 기업의 자율성을 확대해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정부가 이를 제대로 지켰나. 되레 기업심리는 갈수록 식고 있다. 큰 기업이든 작은 기업이든 기업인들은 “기업 할 맛이 안 난다”고 말한다. 큰 기업은 정부의 규제와 반기업적 정서 때문에 괴롭고, 작은 기업은 관의 무사안일과 온갖 행정규제 때문에 피곤해 한다. 경기가 안 좋아서 힘이 드는 것은 두 번째다. 정부에서 기업의 기를 북돋워주고, 격려해줘도 힘든 판에 갈수록 기를 꺾으니 도대체 기업을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이제는 말조차 하기 싫다는 표정들이 역력하다. ‘기업의 투자의욕을 고취시킬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경제학자·기업인의 끈질긴(?) 요구는 번번이 묵살돼 왔다. 결과는 보나 마나다. 투자부진이다. 지난 2001~2005년간 설비투자 증가율은 불과 연평균 1.2%에 그쳤다. 특히 1만 달러에서 2만 달러로 넘어가는 시기에 설비투자가 너무 낮다는 것은 심각하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소득 2만 달러로 가는 이행 시기의 설비투자 증가율은 미국이 4.8%, 일본이 8.8%, 싱가포르는 10.8%였지만 우리나라는 0.5%에 그친다.
투자할 돈이 없어 투자 안 하는 게 아니다. 투자자금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실제 투자하지 못한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지난 8월 뉴딜을 추진하면서 가진 중소기업인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대기업 사내 유보자금이 80조원 정도로 이 자금을 신규 투자로 끌어낼 수 있다면 국민 경제와 중소기업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뉴딜론’을 역설했다. 김문수 경기도 지사도 “수도권에 투자하려고 대기하는 자금만 50조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50조원이든 80조원이든 기업의 돈을 투자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별 게 아니다. 규제완화와 기업 하는 사람의 기를 살려주는 것뿐이다.

설비투자 없인 성장 없다 물론 투자가 부진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경기요인, 투자패턴의 변화, 경영요인, 규제요인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정작 답은 다른 곳에 있다. “투자활성화를 위한 정책적 대응은 경기요인 이외의 여타 제약요인을 해소하는 것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김용기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는 게 해법의 실마리다. 한마디로 기업 할 마음을 먼저 만들어주라는 얘기다. 가령 상호출자제한 대상 기업에 대한 부채비율을 200%로 제한하는 규제는 기업을 움츠리게 만든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투자 위축은 잠재성장률을 ‘하향 고착화’시킨다. 뛰어도 시원치 않은데 되레 주저앉는 셈이다. 이와 관련, 최근 국책기관이나 민간연구소가 내놓은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은 어둡기 그지없다. 대부분 3.9~4.3%대. 정부(재경부)가 전망하는 내년도 잠재성장률은 4.9%다. 설비투자가 향후 10년간 연평균 5% 증가하면 잠재성장률은 6%까지 가능하다. 설비투자를 안 하니 잠재성장률도 올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갈 길은 분명하다. 기업이 투자를 하고 기업가 정신을 고취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입으로는 규제를 푼다면서 규제의 칼은 놓지 않고 있다. 물론 최근 긍정적인 신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9월 말 권오규 경제부총리가 내놓은 첫 작품 ‘기업환경 개선대책’ 얘기다. 재계에서는 “미흡하지만 안 하는 것보다 낫다”는 반응이 대세였지만 ‘앙꼬 없는 찐빵’ ‘구두 신고 동상 걸린 발등 긁기’란 반응도 많았다. 미지근한 립서비스에 그친다는 것이다. 재계가 줄기차게 요구했던 출총제는 제외됐고, 다소 완화됐다고는 하나 수도권 공장 신증설과 관련된 대책 역시 거리가 멀다. 서비스 산업 규제와 토지이용 규제 완화도 미흡했다는 것이 중평이다.

출총제는 기업 옥죄기 오히려 옥죄는 철조망들이 두 겹 세 겹으로 기업 발목을 잡는 양상이다. 몰라서 그렇지 출총제는 대표적인 옥죄기다. 한때 출총제는 여당 내에서도 폐지론이 우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열린우리당 의원은 기자와의 사석에서 “재계가 이미 확보한 것 아니었느냐”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번 재경부 ‘기업환경 개선대책’에서는 아예 말조차 쏙 빠졌다. 정부에서는 ‘출총제’의 대안으로 ‘순환출자 금지법’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출총제는 자산 6조원 이상의 대기업 집단에 대해 순자산의 25%를 초과하는 다른 회사에 대한 출자를 금지하는 법이다. 현재 14개 기업집단 463개 회사가 규제 대상 기업이다. 정부는 그동안 “출총제가 투자와 상관없다”고 주장해 왔지만, 최근 산업연구원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보고서를 내면서 머쓱해지기도 했다. 이 법이 무엇이 문제인지는 조동근 명지대 교수의 비유를 들어보자. 조 교수는 “최근의 글로벌 경제 상황은 복잡계”라며 “가령 나이키의 경쟁자는 더 이상 리복만이 아니라 싸이월드”라고 말했다. 소비자들이 싸이월드를 하느라 밖에 다니지 않아 나이키 매출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이때 나이키는 싸이월드 같은 업종에 투자를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출총제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재계는 ‘조건없는 폐지’를 주장하고 있지만 정부는 그럴 뜻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순환출자 금지와 의결권 제한 같은 출총제보다 더욱 직접적인 대안을 생각하고 있는 실정이다. 수도권 공장 신증설 문제도 그렇다. 정부가 ‘규제의 끈을 놓기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준 사례다. 당장 급한 하이닉스 증설 문제는 또 미뤄졌다. 수도권에 공장을 짓겠다는 KCC·현대제철·한미약품 등 4개 기업에 대해서만 증설 허용을 검토하겠다고 선심 쓰듯 일부 물꼬를 틀 것처럼 말했지만 나머지는 쐐기를 박는 상황이다. 결국 기대했던 수도권 내에 공장 증설 허용 확대나, 대기업 공장 이전 업종 확대에 대한 기대는 무산됐다. 이런저런 규제로 기업들이 공장 하나 짓지 못하고, 마음대로 옮기지도 못하는 탓에 지난해 공장 설립 건수는 2004년에 비해 25%나 줄었다.

상법 독소조항에 기업 한숨 기업을 힘들게 하는 것은 비단 정부뿐이 아니다. 정치권은 한 수 더 떴다. 대한상의 한 고위 관계자는 “명분과 이상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제도와 규제가 입법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개정된 상법은 대표적인 사례다. 오래전 제정된 상법이 시대와 맞지 않고 기업 현실의 변화를 감안해 개정을 추진했다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대기업들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릴 만한 내용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특히 이중대표소송제의 경우 지분 50%를 넘게 소유한 모회사가 비상장 자회사의 경영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대기업에 과도한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비상장 계열사도 이제 시민단체나 소액주주의 소송에서 자유롭지 못한 신세가 됐다. 소송이 남발되면 어떻게 장사에 전념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집행임원제도도 마찬가지다. 등기 이사가 책임져 왔던 기업구조에서 이제 CEO나 CFO등 집행 임원들도 경영행위에 대해 ‘법적’책임을 지게 돼 있다. 배임과 수뢰 등 범죄뿐 아니라 경영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사회가 관리 감독하던 임원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부여함으로써 대리인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다. 즉 집행임원들이 주주나 이사회의 이익보다는 자신이나 종업원 눈치만 살필 가능성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집행임원들이 법적 책임을 의식해 소극적이고 보신주의적 경영을 할 가능성이 크다. 이제 이사회에서 “내가 책임질 테니 소신껏 해 보라”는 얘기도 안 통하게 생겼다. 한국 특유의 신속하고 과감한 경영은 사라질 가능성이 커졌다.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 등 10인이 ‘상장사 사업보고서에 임원별 보수를 기재하도록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증권거래법 개정안’도 문제가 많다는 것이 재계의 시각이다. 이는 주주들이 요구할 경우 기업이 자율적으로 판단할 문제지 법으로 제약할 성질이 못 된다. 기업마다 보상시스템이 다르고, 따라서 임원 보수도 다른데 이를 공개할 경우 반기업정서만 부추길 우려도 있다.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대기업들은 정부나 정치권에서 추진하는 각종 법과 추가 규제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습이다. 세계적인 굴지의 기업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도 벅찬 마당에 각종 규제에 양발이 묶여 있기 때문이다.

투자 막는 장애 너무 많다 정부와 여당 일각에서도 이런 기업인들의 처지에 동감하는 목소리도 있긴 하다. 한때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뉴딜’이란 이름으로 “경제계의 요구를 받아주는 대신 기업들도 투자에 적극 나서달라”며 대타협을 시도했다. 당시 이 정책의 주요 내용은 ▶8·15 대규모 경제인 사면 건의 ▶출자총액제한제(출총제) 개선 ▶경영권 보호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각종 규제완화 등 크게 네 가지다. 전경련도 이에 호응했다. “전경련 차원에서 출총제 대상 14개 그룹에 대해 긴급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 가운데 8개 그룹에서 출총제가 폐지되면 약 14조원을 추가로 투자할 것이라고 응답했다”고 밝혔다. 전경련 쪽은 생명과학·에너지·정보통신 등 모두 10개 분야가 추가 투자 대상이라며 구체적인 분야까지 밝혔다. 하지만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정부에서는 김 의장의 ‘뉴딜’에 찬물을 끼얹었다. 요지는 “출총제 폐지 같은 중요 정책을 정부와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하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청와대는 물론 당내 친노 직계에서도 김 의장의 이런 행보에 불만을 나타냈다. 노무현 대통령은 8·15 사면에서 재벌 총수를 배제했다. 재계에서 한껏 희망을 걸었던 뉴딜정책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다. 물론 아직까지 여권 일각에서는 출총제 등 기업규제 완화의 목소리도 있다. 강봉균 정책위 의장은 지난 19일 서울 플라자 호텔에서 한국경제연구원 주최로 열린 초청 강연에서 “글로벌 경제 시대에 대기업이 커지는 걸 막아서는 안 된다”며 출총제 폐지 입장을 다시 한 번 밝혔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정책으로 연결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내가 재경부 장관으로 있는 한 금산(금융과 산업)분리정책의 완화는 절대 안 된다" (10월 2일 재경부 간부회의에서) "내년에는 대외여건의 안정으로 체감경기와 소비는 올해보다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10월 16일 씨티그룹 회장단과의 면담에서) "올해 경기보다 내년 경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사실상 불황이다" (10월 20일 한국능률협회 주최 최고경영자 조찬강연에서)

학계에서도 기업의 투자부진 원인을 정부의 과도한 규제에서 찾고 있다. 지난 18일 한국경제학회 정책세미나에서 ‘한국경제,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제 발표에서 김병주 서강대 명예교수는 기업들이 넉넉한 자금사정에도 투자를 못 하는 이유로 ▶외환위기 직후 불건전 재무구조에 대한 쓰라린 교훈 후유증 ▶적대적 기업합병에 대한 준비 ▶노사분규 피로에 따른 국내 고용증대 기피 ▶지배구조 개선 요구에 따른 경영권 상실 우려 ▶공정거래·입지·환경 등 정부 규제 ▶시장의 불확실성 ▶미래 수익모델 발견의 어려움 등으로 분석했다. 이 중 시장 불확실성과 수익모델을 제외하면 대부분 정부의 정책적인 문제로 볼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강화된 부채비율 규제로 기업들은 투자에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은행이 발표한 2005년 국내 대표기업들의 평균 부채비율은 99.5%로 세계 주요 기업의 182.3%에 비해 절반에 가까웠다. 여기에 현 정부 들어 강화된 지배구조 개선 요구와 점증하는 적대적 기업합병 등은 남는 돈을 투자보다는 경영권 방어로 돌리게 하고 있다. 또 노사문제와 각종 정부 규제도 기업들로 하여금 투자에 쉽게 나서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김 명예교수는 주장했다.

반기업정책 줄줄이 대기 중소기업 사장들도 마찬가지다. 장사도 안 되는 판에 각종 행정규제와 공무원의 무사안일로 진이 죄다 빠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차라리 과거처럼 돈을 받고 일을 해결해 주는 게 낫지 지금은 정말 최악이다.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중소기업 사장들은 공무원들의 ‘규정타령’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얘기한다. 경기도에서 30년째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한 사장은 “공무원들은 중소기업의 현실은 보지 않고, 책상에서 규정만 되풀이하고 있다”면서 “갈수록 공무원들은 기업을 도와주겠다는 생각이 없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창업이 쉬운가. 법인 하나 세우는 데 밟아야 할 행정절차만 총 16단계. 우선 발기인을 구성하고, 상호검색, 주금납입 보관증명서 제출, 관련서류 공증, 채권 매입, 법인 설립 등기 신청과 신고 등 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 법인 하나 설립하는 데도 이러니 공장을 설립하는 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찍어야 할 도장 수는 많게는 수백 개다. 그뿐인가. 금융산업구조개선법, 증권집단소송제, 사업지주회사제(일정 기준 이상의 기업을 사업지주회사로 규정해 계열사 지분을 정리하도록 하는 내용)의 도입 검토, 산별노조, 소비자 단체소송법,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 검토 등 현 정부의 국정 기조인 ‘반대기업 정책’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그저 기업은 울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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