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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바다 개척하고 하늘에 눕다

[삶과 추억] 바다 개척하고 하늘에 눕다

▶정몽준 의원이 24일 아산병원에 마련된 빈소에서 조문을 마치고 현정은 회장의 안내를 받고 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부친인 현영원 현 현대상선 고문(전 현대상선 회장)이 지난 11월 24일 새벽 서울 종로구 구기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80세. 현정은 회장은 빈소가 차려진 서울아산병원에서 24일 오후 1시부터 현대그룹 사장단들과 함께 일일이 조문객을 맞으며 부친을 잃은 슬픔을 함께했다. 이날 조문객 중엔 정문도(80) 동일기공 회장도 있었다. 정 회장은 현영원 회장이 현대상선 회장으로 재임하던 80년대 중반 현대종합상사 회장을 지냈다. 현 회장과 동갑내기인 정 회장은 현대그룹 시절 친구처럼 의지하고 지낸 터라 여든 고령에도 제일 먼저 빈소로 달려온 것이다. 정 회장은 친구를 잃은 슬픔을 묻는 기자 질문에 “현영원 회장은 참 성실하고 착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었다”며 “사업 수완도 좋아 정주영 회장과 현 회장,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내가 현대에서 함께 일할 때 의욕은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정 회장뿐 아니라 이날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은 “해운업계의 큰 별이 졌다”며 슬퍼했다. 현영원 회장은 1927년 1월 호남 최대 갑부로 불리던 현기봉 선생의 장손자로 태어났다. 현기봉 선생은 광주 농공은행과 우리나라 최초의 보험회사로 알려진 조선생명을 설립한 인물이다. 그 아들인 현준호 선생은 호남은행을 설립했다. 현준호 선생은 한국전쟁 때 타계했다. 장남인 현 회장은 서울대 상대 전문부(1948년)와 문리대 영문과(1951년)를 졸업했다. 1950년 한국은행에 입행해 5년간 도쿄지점 외국부에 신용장 담당 계장으로 근무했었다. 당시 주일대사가 바로 훗날 장인이 된 김용주 전방그룹 회장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귀국한 현 회장은 56년부터 장인의 권유에 따라 전방그룹 계열사였던 신한제분과 근해상선의 전무로 자리를 옮겼다. 60년부터 64년까지는 대한제철의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고인이 해운사업을 시작한 것은 64년 신한해운을 창업하면서부터다. 현 회장이 해운업 창업의 뜻을 품은 것은 근해상선 전무로 자리를 옮길 당시 장인이 한 말 가운데 “해양은 세계 모든 나라의 공동 소유니까 공업이 시원치 않고 가진 것이 없는 나라라도 제 3국 간 수송을 통해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말이 뇌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신한해운은 84년 해운산업 합리화 조치에 따라 현대상선에 합병될 때까지 해몽호·해금호·해정호·해수호 등 7척, 8만5172G/T의 선박과 203명의 임직원을 보유한 중견 해운업체로 성장했다.

현대 조선사업 기틀 놓아 빈소에서 만난 현대그룹 관계자는 “아산 정주영 회장이 해운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도 고인의 도움이 컸다”고 말했다. 정주영 회장이 울산 조선소를 건설할 때 고인이 그동안 해운사업을 하면서 친분이 있던 해외 굴지의 선주들을 정 회장에게 많이 소개시켜 준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조선소가 완공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세계 3대 선주로 손꼽히던 그들로부터 선박을 수주하자면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전문적 식견이 필요했다. 정주영 회장은 현 회장에게 울산까지 동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신한해운이 홍콩 선사들의 한국대리점을 하고 있어서 현 회장은 그쪽 선주들과 두터운 교분을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콩 선주들이 울산에 가보니 허허벌판에 도크를 파고 있는 중이었다. 황당해하는 홍콩 선주들에게 현 회장은 “정 회장의 눈을 보라”고 했다. 사업은 사람이 하는 것인데 저만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무슨 일인들 못 해내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현대는 두 척의 유조선을 수주했다. 이 일은 아산과 현 회장의 친목이 돈독해지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현 회장의 딸 현정은 회장과 정주영 회장의 아들 몽헌 회장 간에 혼사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오갔던 것도 이때쯤이다. 그런데 홍콩 선주가 경기가 안 좋아지자 중도에 계약을 포기하고 만다. 현대가 해운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거절한 배 두 척이 시작이었다. 배 두 척의 처리로 고민하던 정주영 회장에게 고인은 “아예 그 배를 밑천 삼아 해운회사를 차리라”고 조언한 것이다. 정주영 회장은 실제로 현대상선의 전신인 아세아 상선을 설립했고, 현 회장은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에 들었다. 84년 해운합리화 조치로 신한해운이 현대상선에 합병되면서 현 회장은 직접 현대상선 경영에 참여, 대표이사 회장으로 활동했다.

▶1992년 현대상선의 4411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한 개)급 컨테이너선 ‘현대 듀크’호 명명 취항식에서 내외빈과 함께한 현영원 회장(왼쪽에서 둘째)

해운 실무에 해박했던 고인은 95년까지 회장직에 있으면서 사위이자 오너 경영자인 당시 정몽헌 사장의 조언자이자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현 회장은 2003년 정몽헌 회장의 사망 소식 이후 한때 지인들에게 심적 괴로움을 호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96년 현대그룹 경영이 정몽구 회장-정몽헌 부회장 체제로 전환되면서 창업 1세대 경영인들이 대거 경영일선에서 퇴진했는데 현 회장도 당시 현대상선 회장직에서 물러나 상임 고문직을 맡았다. 고인은 현정은 회장이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한 뒤에는 일선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지난 9월 현대상선 지분 162만2000여 주(1.22%)를 영문학원에 넘기면서 경영권 승계작업도 사실상 마무리 지었다. 현재 현 전 회장이 보유하고 있는 지분은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4만4240주로, 전체의 0.6%에 불과해 현 전 회장의 별세가 그룹 경영권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전망이다.

정몽준 의원도 빈소 찾아 현 회장은 해운회사를 경영하면서 해운업계 발전을 위한 대외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신한해운을 경영하던 1970년부터 한국선주협회 부회장을 맡아 1992년까지 22년간 재임했다. 2000년 2월에는 제22대 한국선주협회 회장에 선임됐다. 이어 2001년 1월 현 회장은 제23대 한국선주협회 회장에 회원사 만장일치로 재추대돼 2003년까지 재임했다. 고인은 선주협회 회장 재임 시절 제주 선박 등록 특구 지정, 각종 세제지원 제도 정착 등 선박의 등록과 금융제도 아이디어를 많이 내 선박 제도 개선에 기여했다는 평을 받았다. 빈소에서 만난 한국선주협회 김영무 상무는 “현 회장이 선주협회 회장으로 재임했던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해운업이 불황이었을 때였다”며 “고인이 해운업계 개선을 위해 적극 활동을 펼친 덕분에 지금은 우리나라 해운 제도가 세계에서 가장 좋은 곳으로 꼽힌다. 일본에서도 우리를 벤치마킹하러 올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고인의 빈소엔 현대그룹 전인백 사장 등 현대그룹 사장단과 이계안 의원 등 국회의원 등의 조문행렬이 줄을 이었다. 24일 오후 3시20분쯤엔 현정은 회장의 시동생인 정몽준 의원이 현대 일가 중 처음으로 빈소를 찾기도 했다. 올 초 현대상선 경영권 분쟁과 다가올 현대건설 인수 건으로 불편한 심기가 있어서일까? 정몽준 의원과 현 회장은 별다른 말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현 회장은 정 의원을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배웅했다. 이날 오후엔 현 회장의 시조카인 기아자동차 정의선 사장 내외와 정일선 비앤지스틸 대표, 시동생인 정몽윤 현대해상 화재보험 회장 등 현대 일가가 줄줄이 조문했다. 현 회장은 생전 아버님에 대한 추억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심적으로 경황이 없으니 나중에 하자”고만 말했다. 그는 언젠가 모 매체에 아버지를 회상하는 말을 했었다. “집안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딸만 넷이었지만 남녀차별 같은 것은 전혀 모르고 자랐다. 아버지는 밖에서 일어난 일을 집에 와서 자상하게 이야기하는 스타일이었다. 무슨 일을 결정할 때 반드시 어머니의 의견을 물었다. 저녁밥은 늘 온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먹었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 있는 현정은 회장에게 고인은 아버지 이상의 의미였을 것이다. 북한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여파로 금강산 관광 사업도 어려운 때 아버지의 타계는 현 회장에게 큰 시련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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