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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서 잠자는 국제화 법안

국회에서 잠자는 국제화 법안

지난 10월 31일 방송위원회에 대한 국정감사장. 신현덕 전 경인방송 공동대표는 경인방송 대주주인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이 국내 정보를 미국에 넘겨줬다고 주장했다. 백 회장이 북한의 동향과 관련한 국내 정세분석, 미국 측이 노무현 정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등 국내 관련 정보를 정기적으로 미국에 보고해왔다는 내용이다. 신 전 대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백 회장은 미국의 스파이 노릇을 해왔다는 셈이다(얼마 후 백 회장은 사실무근이라며 신 전 대표를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하지만 신 전 대표는 백 회장을 사법기관에 고발하지는 못했다. “고발할 생각도 했으나 ‘적국’ 북한이 아닌 ‘우방’ 미국에 정보를 전달한 행위가 사법처리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간첩을 처벌하는 형법 제98조가 가진 맹점 때문이다. 형법 제98조는 “적국을 위하여 간첩행위를 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이 조항에 따르면 누군가가 국내 정치정보를 적국이 아닌, 예컨대 미국 같은 나라에 넘겨주면 죄가 되지 않는다. 헌법 정신에 따라 북한은 반국가단체다. 그러나 간첩죄를 적용할 때는 북한을 적국으로 한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다. “특정국을 적국으로 규정한 법률은 없으나 전쟁상태가 종료되지 않은 북한을 적국으로 간주하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라고 전지연 연세대 법대 교수(형법)는 말했다. 미국은 적국이라고 해석할 수 없기에 처벌이 불가능하다. 물론 군사기밀이나 과학기술 유출 행위는 군사기밀 보호법, 부정경쟁 방지 및 영업비밀 보호에 관한 법률과 같은 현행법으로 얼마든지 처벌이 가능하다. 하지만 정치 일반 정보 유출의 처벌은 입법적으로 공백상태에 있다고 변호사 출신의 최재천 열린우리당 의원은 말했다. 따라서 백 회장이 실제로 미국에 국내 정치 정보를 제공했다고 밝혀지더라도 처벌할 방도는 없다. 일본이나 중국·러시아 등 주변 국가나 미래의 잠재적 적국에 국내 현안 관련 정보를 빼돌려도 죄가 안 된다. 21세기 탈냉전과 무한경쟁 시대엔 영원한 우방이나 영원한 적도 없다. 전지연 교수는 “법대 강의실이나 형법교과서에서도 냉전시대의 유물인 형법 제98조를 국익 차원에서 개정해야 한다고 가르친다”고 말했다. 국익에 관계되는 중요 정보라면 적과 우방을 가리지 않고 처벌할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전 교수는 강조했다. 이 같은 문제점은 형법의 모법이 한국전쟁 당시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북한 하나로 충분했다. 1995년 간첩죄 대상을 확대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다른 쟁점 조항들에 밀려버렸다. 2004년 10월에야 열린우리당이 간첩죄의 처벌 범위를 ‘적국’에서 ‘외국인 또는 외국인의 단체’로까지 확대하는 형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법사위 김종두 수석전문위원은 검토보고서에서 “개정 취지는 다원화된 국제환경에 대처하기 위한 것으로 그 입법취지는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고 공감했다. 그러나 이 법은 아직도 국회 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한나라당이 법안 처리를 완강하게 반대했기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형법 개정안을 내놓았다는 이유다. 형법 개정이 곧 이뤄질 전망도 없다.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이나 문제의 형법 조문 개정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국회 법사위 열린우리당 간사인 김동철 의원은 “이 문제로 법사위 차원의 어떤 논의도 없었다”고 했다. 열린우리당도 한나라당의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개정할 의향은 없다. 한나라당이 동의하지 않는 형법 개정은 불가능하다고 최재천 의원은 말했다. 글로벌 경쟁시대에는 모든 나라가 치열한 정보전을 펼친다. 아무리 우방이라 해도 정보 싸움에서는 양보가 없다. 미국이나 독일·프랑스 등 대부분의 나라가 자국에 해가 되거나 외국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간첩죄로 다스린다. 우방일지라도 예외가 없다. 2004년 6월 22일은 이라크 무장단체에 김선일씨가 참변을 당해 온 나라가 충격과 비탄에 빠진 날이다. 해외를 여행하는 국민의 안전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국회에서는 이런 불상사의 재발을 막고자 그해 8월부터 10월까지 이성권, 권영길, 김성권 의원이 잇따라 ‘재외국민보호법’을 발의했다. 재외국민이 해외에서 사고나 위난 상황에 처했을 때 국가의 보호를 받도록 하자는 취지다. 더구나 2005년엔 내국인 해외여행객 수가 1000만 명을 넘어섰다. 또 동남아 등 외국에서 은퇴 이후의 삶을 설계하는 국민도 급증 추세에 있다. 국력 신장과 함께 국민이 지구촌 곳곳으로 뻗어나가면서 각종 재난이나 테러에 맞닥뜨릴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졌다. 우리 헌법엔 국가의 재외국민 보호의무를 명시(제2조 2항)했지만 그 내용을 자세하게 규정한 법률은 없다. 따라서 국회에 의원 발의된 3건의 재외국민보호법 제정안과 함께 국가의 재외국민 보호문제가 다뤄지리라고 기대됐다. 하지만 1년 이상이 지나도록 이들 법안은 통일외교통상위 법안심사소위에 계류 중이다. 대부분 법안이 그렇듯 취지는 수긍하지만 인력과 예산이 문제가 됐다. 한정된 현지 공관 영사 인력으로 법이 정하는 긴급구조 요청을 감당해 내겠느냐고 정부가 난색을 표했다. 현지 교민이 기소되거나 사고가 날 때마다 한두 명의 영사 인력으로 다 대응하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재외국민보호법이 시행되면 상당한 비용이 발생한다고 외교통상부는 주장한다. 정부 일반회계에서 외교통상부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 0.65%선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1%)에 못 미친다. 그런 상황에서 해외 긴급 구조 요청 비용까지 떠안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다는 얘기다. 따라서 재외국민보호법은 제자리걸음만 한다. 게다가 통일외교통상위는 11월 29일 위험국가 또는 지역에서의 여권 사용을 제한하는 여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정 여권법이 국민의 위난지역 여행을 차단하는 기능을 하니까 우선 급한 불을 껐다는 표정들이다. 외교통상부는 또 세계 어디서든 24시간 외교부 본부와 전화로 상담하는 영사콜센터를 통해 위급한 상황에 처한 국민에게 도움을 준다며 재외국민보호법 제정에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권영길 의원 측은 “국민이 해외에서 겪는 사건 사고의 90% 가량이 위난지역이 아닌 중국·미국·일본 등 보통 국가에서 일어난다”고 했다. 위난지역 출입을 통제하는 여권법만으로는 해외에서의 사건 사고 발생시 제대로 도와주기 어렵다. 또 영사콜센터 역시 사후 조치에 그칠 뿐 사전 예방기능은 없다. “해외에 있는 국민이 정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해주는 게 정부의 역할”이라고 권 의원 측은 강조했다. “일본은 우리 안을 본떠 3년 전에 관련법을 만들었는데 우리는 10년째 논의만 한다.” ‘법학전문대학원 설치 운영에 관한 법률’이 한나라당 일부 의원의 반대로 국회에 묶여 있는 현실을 두고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으로 있는 박세일 서울대 교수(국제대학원)가 이른 말이다. 박 교수는 김영삼 정부 시절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도입을 추진했다. 청와대 정책기획 수석 비서관 시절 1995년 시행을 목표로 로스쿨 법안을 준비했으나 법조계의 반발에 부닥쳤다. 결국 사법시험 합격자 수만 1000명까지 늘리는 선에서 절충을 봤다. 반면 일본은 1995년 한국의 로스쿨 시안을 기초로 연구에 들어가 3년 전부터 선진적인 사법제도를 운영한다고 박 교수는 전했다. 국회에 계류 중인 로스쿨 관련 법안은 법조인 선발 양성 제도인 사법시험과 사법연수원을 폐지하고,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법률전문가를 키워내자는 게 골자다. 국가가 주도하는 획일적인 법조인 양성구조 대신 민간 주도의 자율 경쟁으로 국제경쟁력을 갖춘 법률가를 양성하는 구조로의 전환을 목표로 한다. 국내 법률시장의 개방 일정은 아직 확정되진 않았다. 하지만 세계무역기구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이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도 법률시장 개방은 항상 살아있는 쟁점이다. 게다가 무역·통상, 국제결혼, 외국인 노동자 권익 등 국가 간 인적·물적 교류 증가는 필연적으로 법률시장 개방문제로 이어진다. 법조계에서도 전면 개방은 아니더라도 단계적 개방은 불가피하다고 인식한다. 국제화·개방화로 인해 전문변호사 수요는 증가하고 변호사 업무도 국내로 국한되지 않는다. 학계에서는 국내 법제도를 학습하고 이해한다고 해서 법조인의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전망한다. 국제법과 외국의 국내법 제도까지 이해하고 분석하는 능력을 요구하는 시대가 이미 왔다는 얘기다. 법학전문대학원을 도입해 법학교육과 법조인 양성의 틀을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모아졌다. 따라서 올 4월 국회 교육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법안 조문별 쟁점사항은 거의 합의에 도달했다. 하지만 사립학교법 재개정 문제로 한나라당이 국회 등원을 거부하면서 기류가 급변했다. 게다가 한나라당 의원 중 일부는 아예 법안 반대로 돌아섰다. 교육위 소속 한나라당 주호영 의원, 국회 법사위 안상수 위원장 등 변호사 출신 국회의원들이 주축이다. 주 의원은 “로스쿨이 된다고 지금보다 나아진다는 보장이 없다”고 했다. 비용도 더 많이 들고 법조인의 질도 떨어지는 등 개악이 우려된다는 이유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찬반 의견이 엇갈려 당론을 정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로스쿨 법안의 연내 처리는 불투명하다. 교육부는 당초 2008년 개교를 목표로 추진해온 로스쿨 도입 시기를 2009년으로 이미 연기했다. 언제 생길지 모르는 로스쿨 유치를 겨냥해 시설·인력 보강에 2000억원을 쏟아 부은 40여 개 대학들만 애가 탄다. 로스쿨 진학을 목표로 준비해오던 학생들도 허탈해졌다. 국회 교육위원 중에는 이 법의 취지에 공감하는 의원이 많아 표결에 부쳐진다면 가결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 법안을 심의할 법안심사소위가 아예 구성되지 않아 법안 심의가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다. 교육위에 계류 중인 나머지 179개 법안 상당수도 심의(11월 29일 현재)가 덩달아 중단됐다. 법률시장 개방과 법조인 양성제도 변화는 시대의 한 조류다. 이창용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육법전서만 달달 외우게 만드는 사법시험 체계를 경쟁력 있는 율사를 키워내는 로스쿨 제도로 전환하는 개혁 시도를 법조계 스스로 좌절시켰다”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저소득층인 농민을 희생하면서까지 국가 이익을 위해 농업개방을 허용한 마당에, 농민보다 사정이 좋으면서 개혁에 소극적으로 일관해온 이해집단을 보호한다면 도덕적으로도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국회의 입법 지원 기능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도 아직은 미지근하다. 참고 대상 기관은 미국 의회조사국(CRS)이다. 미 의회조사국은 의원들이 법률안 또는 정책과 관련해 궁금해하는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조사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의회조사국 보고서는 북핵문제나 전시작전통제권 이양,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정보의 통로 구실을 한다. 의회조사국이 밝힌 현안의 분석과 전망 자료는 미국 내 동향과 정보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미 의회조사국은 분야별 전문가(변호사·학자·행정가) 등 700명으로 구성돼 있으며, 60% 이상이 분석요원이다. 그래서 정보력과 영향력에서 행정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인정받는다. 의회조사국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는 국회의원과 위원회가 요구하는 자료 조사와 정보 분석이다. 2004년 한 해 동안 의회조사국이 의원과 상임위에 제공한 회답 건수는 약 90여만 건에 달한다. 의회조사국의 2004년도 예산은 대략 900억원에 달했으며 이 중 88%는 인건비로 지출됐다. 이 의회조사국과 마찬가지로 입법기능을 강화하고 정부 정책의 판단을 도와줄 ‘입법조사처’ 법안이 국회에 제출돼 있다. 김원기 전 국회의장을 비롯해 열린우리당 전병헌·이상경 의원, 한나라당 유기준 의원이 지난해 제각기 법안을 발의했다. 제17대 국회는 늘어난 입법수요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할 입법지원 체계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국회 사무처 의안과에 따르면 개원(2004년 5월 30일) 후 3년차인 올 10월 31일 현재 의원 발의 법안은 3990건이다. 16대 국회 4년간 1912건보다 2배 이상 많다. 그런데도 입법 지원조직인 예산정책처(90명), 법제실(50명)의 인원은 거의 제자리걸음이다. 의원들이 마련한 법에 따르면 입법조사처는 100명 정도의 직원으로 구성되며, 입법조사처장은 정무직 차관급으로 국회의장 직속기구로 편제된다. 미국 의회조사국처럼 입법과 정책조사 연구와 정보 수집, 중장기적인 입법과 정책에 관련된 연구를 지향한다. 의원들은 1년 예산으로 100억원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다. 법안을 제출한 의원들은 입법조사처가 설립되면 국회의원들에게 입법활동에 필요한 조사와 연구 자료들이 보다 원활하게 제공된다고 말한다. 또 국내 기존 연구기관들이 못하는 중장기적인 입법이나 정책 관련 전략적인 연구도 이뤄질 전망이다. 박찬표 목포대 교수는 “외국의 사례를 참고할 때 국회 지원 조직의 전반적인 조정을 통해 전문 입법 지원 조직 중심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이 법안을 심의하는 국회 운영위원회는 11월 28일 법안심사소위를 열어 4개 법안을 심의했으나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국회 입법 지원 체계를 대대적으로 손보는 작업인지라 각 당의 당론을 먼저 수렴한 뒤에 법 세부적인 조문 조정작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특히 한나라당은 입법조사처 하나만 뚝 떼어 논의하지 말고 국회 전반적인 개혁 방안의 하나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국회 개혁특위를 만들어 논의해 보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 법안이 앞으로 만들어질 국회 개혁특위로 넘겨진다면 법안 처리는 더욱 지연될 게 분명하다. 국제화 관련 법안으로서 격렬한 논쟁을 예고하는 사례도 있다. 국회 제출을 앞둔 열린우리당 이상경 의원의 ‘국가안보에 반하는 외국인 투자법안’이 그렇다. 국제화·세계화 시대를 맞아 주요 국가들은 자국의 안보에 위협을 가하는 외국인들의 자국 기업 인수합병을 제어하는 법적 수단을 갖게 마련이다. 미국은 1988년 ‘방산물 생산에 관한 법(Defense Production Act)’을 발전시킨 ‘엑손-플로리오법(Exon-Florio Act)’법을 제정했다. 외국인들의 미국 내 기업 인수합병 기도에 맞서 투자철회 명령 등 통제권을 행사하는 권한을 정부에 부여했다. 영국·프랑스·일본 등도 국가안보, 국익보호, 공공질서 유지 등의 목적에서 외국인 투자를 규제하는 수단을 보유했다. 한국은 전기, 통신, 방송 등 공공성이 강한 일부 분야에서 외국인 투자를 전부 또는 일부를 제한한다. 이상경 의원의 이 법안은 사기업 중에서도 군수 기업이나 원자력, 정유, 철강 등 에너지 원자재 관련 기업 등은 국가 안보에 위해가 된다고 판단될 경우 외국인 투자를 제한토록 한다. 그뿐만 아니라 비교 우위를 점하는 첨단기술 보유 기업, 국민 생활에 필수적인 물품 제조기업, 자본 금융시장에 중대한 영향을 줄지 모를 기업 등까지 투자규제 대상을 확대했다. 따라서 법안에는 투자적격 문제를 심의하기 위해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고, 재정경제부 장관, 외교통상부 장관, 법무부 장관, 과학기술부 장관 등 주요 국무위원들이 참여하는 외국인 투자조사위원회를 신설하자는 조항이 있다. 조사를 통해 외국인의 투자가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는 결론이 도출되면 대통령은 투자철회를 명령하게 된다. 외국인이 명령이행을 거부하는 경우 취득한 유가증권, 자산 등 투자 관련 일체를 몰수한다. 이상경 의원은 “비록 사기업일지라도 국가 안보를 저해하는 외국인 투자는 막아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본다”고 법안 취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학계 일각에서는 규제대상이 너무 광범위해 국제기준에서 벗어난다는 반론을 제기한다. 김기홍 부산대 교수(경제학)는 “비교 우위를 점하는 첨단기술 보유 기업은 결국 삼성이나 LG를 말하는데 이들 기업에까지 투자를 막는다면 주식취득 자체를 금지하겠다는 말”이라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김 교수는 나아가 국민 생활에 필수적인 물품 제조기업, 자본 금융시장에 중대한 영향을 줄지 모를 기업까지 규제범위에 포함시킨 것은 전혀 비현실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법안이 규제하는 대상이 명확하지 않아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국가 이미지를 실추시킬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반면 이 의원 측은 “미국만 해도 기업을 불문하고 업종 자체에 따라 외국인 인수를 막는 법안이 있으며, 스웨덴 등 유럽에서도 외국인이 자국의 기업을 인수할 때 심사를 엄격하게 한다”고 반박했다. 선진국에서도 다 하는 외국인 투자제한을 한국만 과도하게 금기시한다는 말은 국제화, 개방화의 원리를 잘못 이해한 결과라고 강조한다. 이 의원은 국내 법안과 국외 사례를 다 참조하고, 용역의뢰까지 마친 다음에 이 법안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의 상법, 증권거래법 등 관련법들에선 기업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수단이 거의 강구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주요 전략산업마저 외국의 투기자본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다고 열린우리당의 이 의원은 말한다. 전경련과 함께 이 문제를 연구했다는 이 의원은 “미국도 민간기업에까지 투자제한을 하며, 자본 자유화 협약에 따라 외국인 투자를 개방하는 OECD 회원국들도 특정 업종은 개방을 유보했다”고 말했다. 논쟁성이 강한 이 법안의 국회 심의 과정이 주목된다. 국가와 사회의 국제화, 세계화에 기여하게 될 법안들이 국회에 묶여 있다. 국회가 장기 파행된 탓에 법안 처리가 지체되는 경우도 있지만 속전속결로 결론이 나는 사례도 있다. 열린우리당 양형일 의원이 지난 11월 9일 발의한 ‘한국지방자치단체국제화재단 육성법안’은 20일만인 28일 국회 행자위를 통과했다.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하는 해외 교류협력 사업에 국고를 증액 지원하는 내용이다. 지방자치단체의 해외활동이 더욱 증가할 테니 국가가 안정적인 재정지원을 하는 편이 바람직하다는 데 의원들이 뜻을 같이한 결과다. 논란의 소지 없이 생색을 내는 법이기 때문에 쉽게 통과됐다. 한국은 국력이 세계 10위권에 들 정도로 세계화된 국가다. 하지만 너무 빨리 성장하다 보니 국제사회에서 국력에 걸맞게 처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경실련 김혜경 국제위원장은 그 사례로 대외원조와 700만 재외동포 지원 문제를 들었다. 김 위원장은 “세계화, 국제화 조류에 맞춰 우리 국회도 이런 의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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