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석유회사들 그들만의 개성 경영
거대 석유회사들 그들만의 개성 경영
엑손모빌은 석유 사업에 전념, BP는 태양열 기술 제품 3대 기업 거대한 석유 업계(Big Oil)는 하나의 단일체로 보일 때가 많다. 막대한 석유 달러를 거둬들이는 대부호들이 움직이는 한 덩어리의 산업으로 보인다. 개별 석유회사들의 정체성은 풍자적으로만 묘사될 뿐이다. 예컨대 엑손모빌은 지구 온난화를 부인하는 근육질의 호랑이로 그려진다.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은 녹색과 노란색의 해바라기로 묘사된다(BP는 대규모 석유 유출 사고와 치명적인 정유소 화재 사건으로 이미지가 나빠졌다). 로열더치셸은 원유 재고량을 부풀린 일이 폭로된 뒤부터는 회사 명처럼 근엄해 보이지 않게 됐다. 이들 석유 업계의 ‘빅3’ 외에도 몇몇 회사는 이름이 알려지긴 했어도 독특한 개성이 있다고 인식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대 석유 업계는 다양한 개성을 지닌 기업체들의 집합체다. 물론 지배적인 기업이 가장 많은 찬사와 비난을 받는다는 사실은 어떤 산업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이크로 소프트(MS)와 월마트가 그렇고, 그 점에서는 엑손모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엑손모빌은 숱하게 많은 비판을 받을지라도 “의심의 여지 없이, 석유 업계의 모든 기업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는 황금 기준”이라고 석유 업계 분석가 대니얼 예르긴은 말했다. 최근 은퇴한 최고경영자(CEO) 리 레이먼드 회장 밑에서 엑손모빌은 1990년대 로열더치셸을 제치고 업계 1위가 됐다. 엑손모빌의 시장가치는 4270억 달러로 추정된다. 업계의 차상위 민간 석유회사들인 로열더치셸과 BP의 시장가치를 합친 금액과 맞먹는다. 엑손모빌의 투자 자본 수익률은 29.9%, 매출은 3282억 달러로 전 세계 상위 6개 에너지 회사 중 1위다. 분석가들은 엑손모빌이 2005년 기록적인 361억 달러의 이익을 거둔 요인으로 끊임없는 비용 관리와 효율성 제고 노력을 꼽는다. 그리고 이 회사가 장기적 안목에서 경영 전략을 수립한다고 찬양한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 시큐러티스의 석유 분석가 대니얼 바르셀로는 이렇게 말했다. “엑손모빌은 10개년 전략을 운용한다. 벌써 2015년을 대비한 작업을 추진 중이며, 그에 필요한 시간과 예산을 배정한다.” 다른 석유 회사들이 대체 에너지 분야에 진출하는 시대에도 엑손모빌은 오로지 석유 사업에만 전념한다. CEO 렉스 틸러슨은 지난 3월 미국 상원의 한 토론회에서 “우리 회사는 전통적인 석유와 천연가스 부문에 대규모로 투자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셰브론·BP 같은 기업들의 관심을 끄는 생물연료·풍력·태양열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그런 사업 분야에는 손대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엑손모빌은 또 철저히 보수적인 기업이기도 하다. 예컨대 몇 년 전 본사에서는 금요일의 평상복 차림 복장 규정을 철폐했다. 또 거대 다국적기업 중에선 유일하게 미국 내 동성애 부부 직원들에게는 보건 혜택 제공을 거부해 왔다. 엑손모빌에서는 미국 연방법의 규정대로 ‘배우자’의 개념을 적용한다는 방침 때문이다. 미국 석유 업계에는 존 D 록펠러를 비롯해 전설적인 인물이 많다.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 제국을 건설한 냉혹한 독점자본가였다. 스탠더드 오일 제국이 붕괴한 뒤 거기에서 분화된 회사들은 오늘날 대다수 메이저 석유회사의 씨앗이 됐다. 그러나 석유 업계의 한 고위 간부에 따르면 오늘날의 문제는 개성이 남아 있는 석유회사는 엑손모빌뿐이라는 사실이다. 투자자들과 정치인들이 무엇을 시끄럽게 요구하든 엑손모빌은 여전히 장기적인 사업 계획을 고수하는 배짱을 지녔다는 점에서 “록펠러의 DNA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고 그 익명의 간부는 말했다. 다른 모든 거대 석유회사들은 컨설턴트들의 재촉에 따라 분기마다 자사 주가를 올리는 데만 중점을 둔 사업 구조로 재편성되면서 “개성을 잃었다”는 지적이다. 그는 엑손모빌이 지금은 고유가 시절인 만큼 과다한 재투자를 자제한다는 점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엑손모빌 측의 태도는 ‘원유 재고량이 당분간은 줄어들겠지만 개의치 않겠다’는 얘기다. 그러다가 기름값이 폭락하면 다시 재빨리 덤벼들어 원유를 사들이겠다는 자세다. 록펠러가 취했을 만한 행동이다.” 업계 내부자들은 엑손모빌을 고집불통으로 보며 그 점을 결함으로까지 생각한다(예를 들어 지구 온난화의 위험에는 세계적인 합의가 형성돼 가는데도 엑손모빌은 이에 역행하는 외롭고 지는 싸움을 벌인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많은 소식통은 BP에도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BP는 한때 이란의 문호를 열어젖혀 석유 탐사에 나서도록 만들 정도로 석유 사업을 중시했다. 그러나 CEO 존 브라운경(卿) 밑에서는 그런 태도가 다소 약화되고 이미지 관리에 치중했다. 내부 소식통들은 BP의 브라운경이 ‘석유를 넘어(Beyond Petroleum)’라는 현명한 구호를 내걸었지만 회사 자체는 여전히 석유 사업에서 이익의 대부분을 만들어낸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옹호자들은 브라운이 대체에너지 부문에도 많은 돈을 투자했다고 반박한다. 예컨대 BP는 세계에서 태양열 기술 제품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3대 기업 중 하나가 됐으며, 탄산가스 배출을 줄이는 수소 에너지 프로젝트에도 15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90년대 말 석유 업계의 기업합병 붐을 촉발해 업계 판도를 바꿔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든 장본인도 브라운이었다. 당시 BP는 모빌을 인수하려 시도했으나 오히려 엑손의 대항 입찰만 촉발시킨 채 실패했다. 그러자 브라운은 이번에는 아모코 인수에 나서서 성공했고, 그것은 당시로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이었다. 그 뒤 곧바로 엑손과 모빌, 코노코와 필립스, 셰브론과 텍사코, 토털과 엘프 등의 합병이 뒤따랐다. BP의 아모코 인수는 매우 적합하고 대담한 공격이었음이 입증됐다(아모코의 정유·천연가스·화학 사업부는 BP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보강해줬다). 컨설팅 회사인 PFC 에너지의 J 로빈슨 웨스트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브라운이 CEO로 취임할 당시 BP는 난파선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는 원대한 전략적 사고를 지닌 사람이다. 곧바로 BP의 면모를 일신했다. 아모코 인수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메이저 석유 회사 중 홀로 가겠다고 선택한 기업은 로열더치셸뿐이었다. 그러나 이 영국과 네덜란드의 합작회사 간부들은 그런 전략을 오래도록 후회했다. 한때 석유 업계 제왕이었던 로열더치셸은 메이저 회사들 중 3위로 전락했다. 자사의 원유 재고량을 부풀려 공시한 사실이 폭로되면서 치명타를 입었다. 이 회사의 영국 측과 네덜란드 측 직원들은 공식적으론 2005년 통합됐지만 아직도 문화적 갈등과 ‘정신분열증’을 겪는다고 널리 알려졌다. 엑손모빌, 혹은 제임스 멀바 회장이 이끄는 코노코필립스와는 대조적이다. 이들 두 회사에선 지휘 계통에 아무런 혼란도 없다. 투자회사 오펜하이머의 에너지 분석가 파델 가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코노코필립스 같은 회사는 CEO가 일사불란하게 지휘한다. 반면 로열더치셸은 이중적 정체성 때문에 영국과 네덜란드 측 간부들은 결코 상대방을 좋아해 본 적이 없다. 강요된 결혼 같았다. 그래서 90년대 말에 이뤄진 합병에 적응하는 데도 매우 소극적이었다.” 메이저 회사들의 대조적인 기업문화는 주주총회에서도 드러난다. BP는 다년간 런던의 오페라 극장을 빌려 주총을 열었다. 그리고 연단 뒷부분의 영사기 화면에는 BP가 제3 세계 빈국들에 건립 중인 학교와 병원 사진이 등장한다. 환경단체 시에라 클럽의 토지 보호국 책임자로 21년간 환경운동을 해온 아산 마누엘은 이렇게 회상했다. “마치 빈민들을 위해 기아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한 유엔 기구의 회의장 안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었다. 주총에서는 BP가 훌륭한 기업이 되려고 노력하면서 추진하는 많은 사업에 늘 역점이 두어졌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엑손모빌의 레이먼드 전 회장은 퉁명스럽기로 유명했고, 심지어 질문하는 주주들을 울리기까지 했다. 후임자인 틸러슨은 그에 비해 좀 더 외교적이긴 하지만 지배하려는 태도에서는 뒤지지 않는다. 산유국들이 서방 다국적 기업들에 석유자원 개방을 꺼리는 추세가 점차 강화되면서 이들 석유회사에는 외교가 중요해졌다. 이런 면에서 가장 흥미로운 기업은 이탈리아의 에니(ENI)다. 에니는 초대 회장인 엔리코 마테이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마테이는 50년대 이란·리비아와 여타 산유국들과의 투자협정을 성사시키면서 (앵글로색슨계 다국적기업들이 지배하던) 세계 석유산업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겠다고 위협했다. 당시는 이들 산유국의 탈(脫)식민지 시대 지도자들이 서방 다국적기업을 추방하던 시절이었다. 마테이의 석유 외교술은 이런 방식이었다. 즉 산유국들과 새로운 협정을 체결하되, 상대국 정부에 석유 개발 수익의 75%(당시의 표준은 50%였다)와 합작법인에 더 많은 통제권을 주는 식이었다. 62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마테이가 살아 있다면 요즘의 유전 개발권 접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해진다. 에니는 오늘날 세계 9위 규모의 민간 석유회사로 성장했지만, 외교적으로 이단아보다는 집단의 일원처럼 행동한다. 스타일도 중요하다. 예컨대 엑손모빌이 석유산업을 독점한 세상을 상상해 보자. 그러면 소비자들은 석유를 보다 풍부하고 효율적으로 공급받으면서 가스와 탄화수소도 보완적으로 제공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만일 BP가 그런 위치에 서게 된다면, 풍력과 태양열 같은 대체에너지 쪽에 좀 더 큰 비중을 둘 듯하다. 가장 흥미로운 시나리오는 이렇다. 즉 다국적기업들이 석유 자원 접근권을 얻으려고 분투하는 상황에선 규모가 클수록 좋다. 따라서 시장에선 BP와 로열더치셸의 합병 같은 초대형 기업합병에 관한 소문이 무성해진다. 그렇게 된다면 석유 업계에는 완전히 새로운 개성을 지닌 기업들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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