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스타기업 키우는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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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입주 벤처 모신바이오텍 신석봉 사장. |
1990년대 말 불어닥친 IT 열풍의 진원지는 대전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었다. 이 대학 졸업생을 중심으로 생겨난 벤처 기업들은 세계 속에 한국을 ‘IT 강국’으로 각인시켰다. 전자·기계·제어공학 등 다양한 분야의 기술과 지식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카이스트는 ‘제 2의 IT 열풍’을 꿈꾸고 있다.
한국 벤처기업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카이스트를 빼놓을 순 없다. ‘벤처’란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절, 기술 하나로 창업한 이민화(메디슨)·이해진(NHN)·김광태(퓨쳐시스템) 등 벤처 1세대가 모두 카이스트 출신이다. 카이스트의 ‘보육’을 통해 성장한 벤처로는 게임포털로 유명한 네오위즈와 디지털 영상저장장치(DVR) 제조업체인 아이디스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기업은 대부분 그 분야의 선도 정보기술(IT)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처럼 카이스트가 벤처기업의 요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연구 인력과 IT 인프라 외에도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벤처의 ‘보모’로서 카이스트가 적극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카이스트에 처음 입주한 기업들은 평당 3만원의 저렴한 임대료만 낸다. 입주 후 세 달이 지나면 그나마도 낼 필요가 없다. 전기료·수도료 같은 기본요금만 납부하면 계속 상주할 수 있다. 대신 기업은 주식 1%만 기부하면 된다. 입주한 기업들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는 카이스트가 직접 나서서 중기청이나 기술신용보증기금 등을 연결해 준다. 정부가 기업들에 의무적으로 요구하는 성희롱 예방교육·소방 안전교육이나 각종 행정업무도 입주기업들이 공동으로 해결하기 때문에 대기업 못지않은 행정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는 점도 눈에 보이지 않는 큰 장점이다. 기술력 있는 탄탄한 벤처들을 한 곳에 모아놓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너지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이에 대해 카이스트 산학협력단의 김순근 팀장은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한 탄탄한 벤처기업들이 한 곳에 모여 있기 때문에 서로 정보와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경우가 많다”며 “조만간 입주 기업뿐 아니라 졸업한 기업·동문기업까지 아우르는 협회를 조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카이스트’란 브랜드는 기업들의 마케팅에도 도움을 준다. 이곳에서 전자방명록 개발에 성공해 최근 시판에 나선 아이코리아의 김관섭 대표는 “일단 명함에 카이스트란 이름을 넣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 신뢰를 준다”고 말했다. 신석봉(62) 모신바이오텍 사장은 “대전은 연구·개발(R&D) 인프라는 뛰어나지만 지방이라는 지역적 한계가 있어 마케팅에 불리했다”며 “카이스트란 브랜드 하나로 이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카이스트는 한중 엑스포 같은 박람회를 개최해 벤처들의 해외 시장 개척에도 도움을 준다. 지난해 7월 처음 개최한 ‘한중 하이테크 엑스포’엔 이미 100여 개의 기업이 참가했다. 신 사장은 “얼마 전 다녀온 엑스포에서 호응이 좋아 현지 업체와 중국 내 제품 판매에 대한 사업의향서까지 주고받았다”고 소개했다. 현재 카이스트의 신기술창업관·동문창업관·정문술빌딩 등 연면적 4,200평의 벤처 인큐베이터에는 80개 기업이 입주해 있다. 김 팀장은 “단일 보육센터로는 국내 최대 규모”라며 “다른 대학 창업보육 센터장들과 함께 일본의 실태를 탐방한 적이 있는데 의외로 우리보다 환경이 열악했다”고 귀띔했다. 입주를 원하는 벤처기업들이 늘고 있는 만큼 입주 경쟁률도 높다. 그는 “입주 경쟁률이 최고 3대 1에 달한다”며 “하지만 막상 입주 후에 그만두는 벤처는 15%에 불과할 정도로 벤처들의 성공확률이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카이스트 산학협력단의 화두는 지방 스타기업 육성이다. 카이스트는 최근 대전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벤처 5개사를 뽑아 ‘스타기업’으로 선정했다. 선정된 기업에는 기술과 디자인 개발을 지원하고 홍보와 내수·해외 판매 지원도 강화할 방침이다. 김 팀장은 “이젠 기업도 양이 아니라 질이 중요하다”며 “실력없는 기업을 균등하게 지원하는 것보다 알짜 지방 벤처 기업을 적극 지원해야 스타기업을 키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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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에는 제법 규모가 큰 ‘종합병원’이 하나 있다.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중소 벤처기업을 치료하고 재활에 도움을 주는 일종의 기술클리닉센터다. 카이스트 산학협력단에 위치한 이 ‘종합병원’은 IT·바이오·나노·환경·경영·디자인 등 전 과목에 걸쳐 카이스트 교수진과 박사 과정 연구원으로 구성된 100여 명의 전문가가 ‘진료’를 맡고 있다. 이곳에선 환자가 병원에서 의사에게 치료받는 것처럼 중소 벤처기업이 상담 신청을 하면 상담분야 기술진이 나서서 기업의 애로 사항을 파악해 컨설팅해 준다. 진료진 내부에서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이나 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면 기술 이전을 해주고, 장기적인 과제는 공동 연구를 진행한다. 상담 위주로 이뤄지기보다는 실제 기업이 겪는 어려움의 원인을 분석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고 사후 관리도 맡는다. 김순근 팀장은 “개별 벤처들이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각 분야 전문가를 찾아 처방을 의뢰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며 “기술종합병원이 제공하는 종합 서비스를 활용한다면 기업들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교수와 연구진 역시 컨설팅으로 일정 비용을 받기 때문에 서로 윈윈하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최근 카이스트의 종합병원을 찾는 벤처기업이 늘고 있다. 탈모 예방 샴푸와 토닉 등 모발관리 제품을 생산하는 모신바이오텍이 대표적인 사례. 이 회사의 신석봉 사장은 늦깎이 창업자다. 일본 오사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태평양엔지니어링 부장을 비롯해 한화그룹 종합연구소 이사, 춘천생물산업 벤처기업 지운센터 소장 등을 지낸 연구원 출신이다. 그는 은퇴 후 60세에 느긋한 노후생활 대신 창업을 선택했다. 그가 창업에 나선 이유는 특이하다. 나이가 들면서 모발 관리에 고민이 많았던 그는 시중 제품을 거의 다 사용해 봤지만 뚜렷한 효과를 보여주는 제품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화학을 전공한 과학자로서 호기심이 생긴 그는 직접 제품 개발에 나섰다. 호르몬 불균형이나 혈액순환 등에 초점을 맞춘 기존 제품들과 달리 두피 안정성을 향상시키는 제품 개발에 초점을 맞췄다. 자본금 3억원으로 시작한 창업이었지만 2년 동안 수익이 없었기 때문에 곧 재정적인 난관에 부딪혔다. 이때 그에게 구세주처럼 나타난 곳이 바로 카이스트. 까다로운 입주 기업 심사를 통해 2005년 4월 카이스트에 입주한 그는 곧바로 모발 관련 특허를 두 건이나 등록하는 쾌거를 올렸다. 그 해 12월엔 벤처기업인증을 받았고, 이듬해엔 중소기업청이 주관하는 이노비즈 인증까지 획득했다. 지난해 7월엔 중기청 개발 프로젝트까지 따낸 그는 11월 서울 시내 특급호텔에서 제품 론칭 행사를 가졌다. 지난 12월엔 카이스트의 산학협력단과 중국의 칭화대(淸華大)가 함께 주관하는 ‘한중 하이테크 엑스포’에도 참가했다. 그는 “모두가 카이스트를 통해 제품 개발은 물론 카이스트 브랜드로 마케팅을 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며 “앞으로 카이스트 화학과 교수진들의 ‘처방’을 통해 더욱 다양한 모발관리 제품을 선보일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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