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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무이’ 양복장이 명장 전병원 “뒤늦게 경제학 전공한 이유는요”[대한민국 명장]

전병원 패션디자인 부문 명장
“다시 태어나도 양복 만드는 일 할래요”
“명장이 만든 명품…간직하고 싶은 옷 만들 것”

지난 11월 5일 광주 동구 ‘전병원양복점’에서 전병원 패션디자인 명장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신인섭 기자]
[이코노미스트 김윤주 기자] 어머니 손에 이끌려 봉제 기술을 배우게 된 중학생 소년이 있다. 또래 친구들처럼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던 이 소년은 현재 “양복 만드는 일이 천직”이라고 말하는 베테랑 ‘양복장이’가 됐다. 가을 정취가 물씬 느껴지던 지난 11월. 광주 동구에 위치한 ‘전병원양복점’에서 전병원 사장을 만나 중학생 소년이 국가가 인정한 최고의 ‘양복장이’가 되기까지의 스토리를 들어봤다. 

“기술자는 밥 안 굶는다”던 어머니 권유로 시작한 일
‘멋쟁이 신사’. 양복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전 사장의 모습을 보고 처음 떠오른 단어다. 전 사장은 이날 스트라이프 패턴의 셔츠와 재킷을 매치한 차림새로 등장했다. 60대 남성이 시도하기 쉽지 않은 청록색 넥타이로 과감한 포인트도 줬다. 양복점 사장님다운 남다른 패션 센스라고 느껴졌다. 특히 이날의 착장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양복 재킷 왼쪽 옷깃에서 반짝이는 ‘대한민국명장 뱃지’였다. 

‘대한민국명장 제586호’는 전병원 사장을 대표하는 수식어다. 전 사장은 7전8기(七顚八起)의 8번째 도전 끝에 이같은 영예를 이뤘다. 전 사장은 호남지역 최초이자 유일한 패션디자인 부문 명장(名匠)이다.

전 사장은 “처음에는 대한민국명장 양장 직종이었으나 2011년 통폐합 돼 패션디자인 명장으로 바뀌었다”면서 “2011년에 바뀌고 난 뒤 대한민국 명장 패션디자인 직종에서는 유일무이한 명장”이라고 설명했다. 

전 사장이 날 때부터 명장이었던 것은 아닐 터. 그가 처음 ‘양복장이’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궁금해졌다. 전 사장은 “전남 영광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상급학교에 갈 수 없는 가정환경이었다”면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의 권유로 양복업에 입문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어머니가 현명하셨다. 어머니 나름대로 발품을 팔아 자동차‧철공소‧자동차 정비업소‧이발소 등 어린나이의 아들이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살피다가 양복점에서 일을 배우게 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전 사장은 “당시 어머니는 ‘기술자는 부자는 못돼도 밥은 안 굶는다’고 했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전병원 명장이 기자와 만나 ‘양복장이’가 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사진 신인섭 기자]

기술 몽땅 알려준 감사한 스승님
전 사장은 좋은 스승을 만난 것도 인생에 있어 큰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봉제 기술을 터득하고, 사업체를 차리기 위해선 재단‧영업 등 수련해야할 것들이 많았다. 이에 전 사장은 군대를 다녀온 뒤 재단을 배웠다.  

전 사장은 “처음 재단을 배웠던 선생님이 저에게 몽땅 기술을 전수해줬다”면서 “그 선생님이 본인의 스승님께 배운 것들을 정리한 스케치를 줬고, 기술을 전수해준것뿐 아니라 자신의 자리까지 물려줬다”고 말했다. 

광주 충장로 메인 거리에서 재단사가 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최소 5년의 기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하지만 전 사장은 선생님의 자리를 그대로 물려받아 1년반만에 ‘충장로 재단사’라는 칭호를 얻었다.

호남지역에선 광주 충장로가 최고의 상가다. 서울로 치면 종로나 명동과 같은 중심지다. 충장로는 모두가 선망하는 지역으로, 이곳에서 일하면 최고의 기술을 가진 사람으로 통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전 사장은 “큰 나무 그늘에 큰 인물이 나온다고 생각한다”면서 “선생님들이 최고의 기술을 가졌기 때문에 저 또한 열정과 기술을 접목해서 발전할 수 있었고, 지금도 선생님들을 떠올리면 굉장히 감사하다”고 말했다. 

전병원 명장이 맞춤 양복 위한 패턴을 그리고 있다. [사진 신인섭 기자]

기술연마 자극 준 ‘울퉁불퉁 몸매’ 고객
전 사장은 1972년 처음으로 양복 관련 기술을 배웠고, 올해로 53년이 됐다. 그간 다사다난한 일이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고 한다. 전 사장이 기술연마에 더욱 정진하도록 자극을 준 고객과의 일화다. 

전 사장이 ‘충장로 재단사’ 라는 칭호로 활동한지 6개월 정도 됐을 때다. 전 사장은 보디빌딩 선수의 옷을 만들게 됐다. 울퉁불퉁한 근육과 굴곡이 많은 몸매에 맞는 옷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어렵게 양복을 만들어 냈는데, 손님의 몸에 제대로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던 전 사장에게 그 손님은 “내가 체격이 평범하면 기성복을 사 입지 왜 여기 왔겠냐, 당신은 기술자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전 사장은 충격과 함께 깨우침을 얻었다. 이에 ‘기술로서 답해야 한다’는 말을 좌우명처럼 삼고, 마음을 다잡아 실력 향상에 매진할 수 있었다.  

경제학 전공한 독특한 이력…양복시장 접목 
과거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있던 전 사장은 뒤늦게 통신고등학교와 방송통신대학교를 졸업했다. 특히 눈길이 가는 이력은 대학에서 경제학과를 전공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이 같은 이력을 외부에서 말하면 ‘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전 사장은 어린나이에 막연히 돈을 벌고 싶었고, 부자 되는 것이 꿈이었다. 이에 경제학과를 전공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경제변동론 배우면서 어려울 때 어떻게 대처해야하고, 장사가 잘 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터득했다. 덕분에 양복점 운영을 하면서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헤쳐 왔다고 말한다. 

과거 전 사장이 처음 양복점을 오픈했을 때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한 달에 주문량이 180벌, 하루에 제일 많이 맡을 때가 35벌까지 였다. 당시 전 사장은 오전 7~8시에 출근해 자정이 넘어 퇴근하기 일쑤였다. 현재는 주문량이 많이 줄었다. 한 달에 15~30벌 정도 주문을 받는다. 

양복 주문이 줄어드 것은 맞춤양복에 대한 선호도가 과거와 달라졌기 때문이다. 전 사장은 우리나라 경기 상황에 따라 국민들의 신체 변화가 생기고, 이에 따라 양복 시장도 변화하기에 기술 연구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해방 이후 1960년~1970년대는 신체 노동을 하다 보니 등이 굽은 사람이 많다”며 “국민소득이 1만 달러 이하일 때는 신체적 노동을 많이 필요로 해, 등이 굽은 체형이 많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1970년~1980년대 가면서는 조금 여유가 생겨 등이 굽고 배가 나온 S자 체형이 나온다”며 “국민소득이 1만~1만5000달러부터는 양복을 입기 시작하며, 1만5000~2만 달러면 중산층이 생기고 백화점이 생기고 맞춤복에서 기성복으로 트렌드가 바뀐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 시기가 1990년대로, 기성복이 대중화가 되고 맞춤 양복이 쇠퇴기로 빠졌다”고 설명했다. 

전 사장은 그 시대 경제 상황와 생활양식에 따라 소비습관과 체형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에 맞는 패턴도 기술 연구를 해야만 따라갈 수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를 위해 경제학을 공부가큰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전 사장은 이어 다시 맞춤양복의 시대가 다가올 것이라고도 전망했다. 전 사장은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에 간다고 하는데, 이때는 남들과는 차별화가 시작된다”며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가 오면 맞춤 양복이 개별화되는 시대가 서서히 돌아오고 있다”고 했다. 
전병원 명장이 양복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 신인섭 기자]

패션디자인 명장이 말하는 옷 잘 입는 노하우
어머니 손에 이끌려 봉제일을 배웠던 중학생 소년은 2014년 국가가 인정한 ‘대한민국명장’이 됐다. 전 사장은 이 과정에서 희생할 수 밖에 없었던 가족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전 사장은 “내가 명장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희생했던 가족들이 있었던 덕분”이라며 “명장이 되고 나니 딸·아들도 ‘우리아빠 명장이야’라고 자랑을 하더라, 명장 칭호는 가족들 희생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패션디자인 분야 최고에 오른 전 사장이 말하는 옷 잘 입는 노하우에 대해서도 궁금해졌다. 이에 대해 전 사장은 “옷 잘 입는 방법은 딱 한 가지, 거울 앞에 매일 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요즘 젊은 사람들은 ‘퍼스널 컬러’에 따라 자기 피부와 자기에게 잘 맞는 색상을 찾아가려고 한다”며 “그런 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포즈와 표정을 지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 사장은 아직도 양복 만드는 일이 재밌다고 말한다. 그는 “예전에는 백화점 쇼핑을 많이 했고, 최근에는 충장로를 거닐면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거리에 가서 요즘 옷 트렌드를 살핀다”며 “TV에 나오는 패션쇼, 패션 전문 프로그램 등으로 트렌드를 읽는다”고 했다. 

이어 전 사장은 “양복 만드는 일이 적성에 잘 맞고 다시 선택하더라도 양복 만드는 일을 선택할 것”이라며 “상상력이 많은 편이라, 창의적으로 생각한 아이디어를 옷에 접목 시키며 트렌드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재밌다”고 했다. 이어 “고객들이 내가 만든 옷을 입고 만족하는 모습에서 보람을 느끼며, 다시 태어나도 양복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는 앞으로 전병원양복점에서 만들어진 양복은 ‘명품(名品) 양복’이라고 불렸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전했다. 전 사장은 “내가 만든 양복이 ‘명장이 만든 명품’이라고 불렸으면 좋겠다”면서 “유명 브랜드의 옷이 아니라도 사고 싶고, 입고 싶고,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옷이 명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병원 명장이 전시회 때 출품한 시대별 양복들. [사진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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