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몰래 땅 문서 훔쳐다 줘”
“아버지 몰래 땅 문서 훔쳐다 줘”
▶생전의 최종건 회장. 오른쪽은 수원시 평동에 있는 선경직물 공장 터. 조만간 용인 SK아카데미로 옮겨질 예정이다. |
지금이야 SK㈜·SK텔레콤 등 쟁쟁한 기업을 둔 굴지의 재벌로 성장했지만 SK는 말 그대로 ‘잿더미’ 속에서 시작한 기업이다. 그룹의 모태인 선경직물(현 SK네트웍스)은 고 최종건 회장이 한국전쟁 당시 잿더미가 된 공장 터에서 찾아낸 ‘선경의 불씨’ 같은 회사다. 그 도화선에 열정의 불을 붙여 SK는 오늘날 국내 3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래서 SK를 이해하는 첫 번째 길이 최종건을 읽는 것이다. ‘최종건 신화’는 약관 18세의 나이에 시작된다. 1944년 4월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직후 선경직물에 3급 기사로 취직한 다음부터다. 당초 인천시 부평에 있는 육군 조병창에 근무하기로 작정한 최종건의 마음을 돌린 것은 그의 부친인 최학배 공이다. “내가 주선할 터이니 집에서 가까운 선경직물에 들어가라”고 권유했던 것. 마침 최종건의 고향인 수원 벌말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선경직물(鮮京織物) 공장이 들어섰다. 선경직물은 1941년 일본인이 조선에서 만주 일대를 대상으로 직물을 수출하던 선만주단과 일본의 교토직물이 합작해 세운 회사다. 교토직물은 직기를 현물 출자하고 선만주단은 공장부지와 공사비용을 댔다. 회사 이름도 선만주단의 ‘선(鮮)’자와 교토직물의 ‘경(京)’자를 딴 것이다.
견습기사 4개월 만에 조장 발탁 ‘견습기사 최종건’은 스스키 사브로(鈴木三郞) 공장장이 입사 4개월 만에 생산 2조장으로 발탁할 만큼 돋보이는 존재였다. 생산조장은 제직을 담당하던 여공 100여 명을 통솔하는 자리. 18세 소년에게, 더욱이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에게 그런 일을 맡긴다는 것은 직물공장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그만큼 그의 리더십이 남달랐다는 얘기다. ‘황소 주먹’으로 불리는 큰 체구였지만 그는 천성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특히 ‘작은 배려’의 힘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100여 명의 여공을 통솔하는데도 ‘볶은 콩’이 큰 역할을 했다. “조장님 오늘은 볶은 콩 안 줘요?” 휴식 시간이 되면 여공들이 으레 최종건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시 최종건은 집에서 콩을 한 말씩 볶아다 여공들에게 간식으로 나눠주었다. 값으로 치면 별것 아니지만 이것이 나이 많은 여공들에게 퍽 감동을 줬다. 쉬는 날엔 인근 서호천으로 남자 직원을 데리고 나가 잉어·메기·쏘가리 매운탕을 해먹기도 했다. 당연히 최종건을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45년 광복 이후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선경직물은 적산(敵産), 즉 귀속재산으로 분류됐다. 새롭게 공장의 경영인이 된 사람은 황청하와 김덕유였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에 새로 회사를 세우려면 명목상으로 조선인 주주가 있어야 했고 두 사람이 각각 100주씩 갖게 된 것이다. 전체 50만 주 가운데 두 사람은 200주밖에 없는 ‘소액주주’였지만 일본인이 철수하고 난 다음엔 ‘최대 주주’였다. 미군정에서 두 사람을 선경직물 관리인으로 임명하면서 그들 역시 공장을 방치할 수 없었다. 대표취체역에 황청하, 취체역 전무에 김덕유가 취임하고 생산부장에 최종건을 기용했다. 사실상 공장장 같은 자리에 오른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선경직물이 생산을 재개한 것은 46년 2월이다. 그러나 최종건은 결혼하면서 회사에 사표를 낸다. 49년 봄의 일이다. “평생 월급쟁이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버지와 아내가 극구 만류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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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살 전날 기적적으로 풀려나 옷감 장사부터 시작했다. 인견사 매매에 손을 댔다. 최종건은 생산부장 시절 인견사 때문에 고생이 심했다. 주로 홍콩을 통해 이탈리아산 인견사를 들여왔는데 구하기도 어렵고 값도 들쭉날쭉했다. 일부 원사 도매상들은 매점매석으로 폭리를 취하기도 했다.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최종건은 작은 직물공장을 상대로 인견사를 대주고 그 원사로 짠 직물을 인수해 동대문 시장 포목상에 넘기면서 제법 목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직물공장을 세우겠다’는 생각에 하룻밤에도 몇 번씩 직물공장을 짓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시련은 이때부터였다. 50년 6월 24일, 최종건은 “비수기 때 인견사를 사야 한다”며 서울에 올라왔다. 인견사 열한 고리를 구입해 서울 창신동 창고로 옮겼다. ‘잘만 하면 올 가을에 곱절 장사를 할 수 있겠군’이란 계산도 잠시, 다음날 한국전쟁이 터졌다. 죽을 고비도 겪어야 했다. 수원까지 점령되자 최종건은 팔달면 내무서로 잡혀갔다. 광복 직후 ‘수원태백문화동지회’‘평동대동청년단’ 같은 우익단체에서 활동한 전력을 문제 삼아 인민군이 그를 잡아 가둔 것이다. 내무서원은 조서철을 내려치면서 최종건을 신문했다. “나는 천성적으로 남한테 못할 짓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무 잘못 없습니다.”(최종건) “변명하지 마라. 증거가 있다.” “모두 날조된 내용입니다. 누군가의 모함입니다!” 내무서원도 만만치 않았다. “반동분자는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한다”며 목청을 높였다. 그때 팔뚝에 붉은 완장을 두른 사람이 “최종건 이리 나왓”하면서 그를 불러냈다. 자세히 보니 붉은 완장을 두른 사람은 이성길이었다. 이성길은 광복 직후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남로당에 가입했다 경찰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신원보증을 서서 그를 빼낸 인물이 바로 최종건이었다. 이렇게 평소 안면이 있던 이성길이 눈을 부라리면서 “넌 당장 총살감이다”라며 따귀를 올려붙이는 것이었다. 왼손으로 따발총을 들고 최종건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다. 이성길은 최종건을 데리고 내무서 밖으로 나왔다. ‘죽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성길이 “이발이나 하고 어서 가”하면서 100원짜리 지폐 몇 장을 쥐여주는 것 아닌가! “아니?”(최종건) “아무 말 말고 여길 빠져나가. 지금 유치장에 있는 사람들은 오늘밤 모두 죽는단 말이야. ”(이성길) 최종건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날, 유치장에 갇혀 있는 ‘우익’들은 안양천 변에서 모두 총살됐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성길의 도움이 없었으면 그 역시 죽은 목숨이었던 셈이다. 신원보증서 하나가 그의 목숨을 살린 것이다.
“선경 불하받을 사람 자네뿐이네” 어쨌든 전쟁 통에도 그의 사업욕은 식지 않았다. 유흥사업과 석유 유통업, 비료 판매업 등에 손을 댔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잔뜩 손해만 입고 말았다. 하릴없이 아버지 친구가 운영하던 동광정미소에 다시 취직을 했다. 이때가 53년 3월이다. 그런데 이즈음 최종건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출근한 지 사흘째 되던 날, 관재청을 들락거리던 방구현으로부터 선경직물을 일반인에게 불하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관재청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을 관리하는 곳이었다. “내가 보기에 선경직물을 불하받을 사람은 자네밖에 없네. 자네가 아니면 공장을 다시 일으키지 못할 걸세. 불하자금이 모자라면 내가 지원해줄 수도 있네.”(방구현) 내친김에 공장 터로 달려갔다. 선경직물은 폭격으로 완전히 잿더미가 된 상태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검은 재만 이리저리 휩쓸려 다닐 뿐이었다. 그 엄청난 폭격 속에서 기숙사 건물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최종건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반드시 공장을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 다음날 아침부터 최종건은 그 잿더미 속으로 달려갔다. 나사 못 하나가 나와도 일일이 추려서 모아두었다. 쓸 만한 부품은 골라서 직기를 조립하고 불에 녹은 것은 고철로 팔아 모자라는 부품을 사오겠다는 뜻에서였다. 최종건의 이런 ‘기행’을 보자 옛 직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구부러진 것은 펴고 끊어진 것은 이어서 4대의 직기를 재조립했다. 여기에 16대의 직기를 새로 조립했다. 공장엔 다시 생기가 돌았다. 그러는 동안 4개월이 후딱 지나갔다. 선경직물 인수까지는 걸림돌이 많았다. 당초 회사 부지는 1만2000평이었다. 8000평은 회사 소유로 돼 있었지만 ‘나머지 4000평은 다시 매입한다’는 조건으로 땅주인인 차철순과 일본인이 공동 명의로 해 두었던 것이다. 공장 매입 우선권은 차철순에게 있었다. 돈이 문제였다. 최종건은 수원의 거상 임명한에게 사업자금을 빌리기로 작심한다. 날이 밝기 무섭게 큰누나인 최양분에게 달려간다. “내 부탁 좀 들어줘. 아무 소리 말고 아버지가 땅문서 어디다 두는지 알지. 그거 훔쳐다 줘.”(최종건) “그게 무슨 소리니?”(최양분) “그냥 나만 믿고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라니까.” 동생의 성격을 잘 아는 최양분은 결국 친정으로 달려가 아버지 방에서 몰래 땅문서를 훔쳐다 동생 손에 쥐여주었다. 최종건은 그렇게 빼돌린 땅문서를 임명한 앞에 내놓았다. “자네가 최학배 의원의 장남인가.”(임명한) “네, 인사 올리겠습니다. 여기에 땅문서가 있습니다. 200만환만 빌려주십시오.”(최종건) “알겠네. (땅문서는)도로 집어넣게. 자네 어른과 나는 전부터 왕래하던 사이네. 내가 자네 어른을 만나보지.” 임명한을 만나고 나온 그는 덜컥 겁이 났다. 집에서 아버지 몰래 땅문서를 가져온 것을 아버지에게 얘기할 것은 당연한 순서 아닌가. 그날부터 그는 공장 기숙사에서 숙식을 했다. 도저히 아버지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기숙사에서 먹고 자기를 여러 날, 그날도 역시 늦게까지 일하다 잠자리에 들었는데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뭔가 기분이 이상해 눈을 퍼뜩 떴는데 아버지 얼굴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앗, 아버지.” “일도 일이지만 거지 꼴이구나.” 최학배 공은 주머니에서 100만환짜리 돈뭉치 두 개를 꺼내놓았다. “아버지….” 아들의 강한 의지를 꺾지 못한 것이다. 다음날로 최종건은 선경직물 부지 1만2000평 중에서 4000평을 매입한다. 53년 7월 27일 관재청으로부터 선경직물의 ‘귀속재산 매각 통지서’를 받아 쥘 수 있었다. 매각 대금은 130만환이었다. 다시 돈이 부족하자 차철순에게 돈을 빌려 매수 계약금 13만환을 지가증권으로 내고 선경직물 50만 주 중 49만9800주를 받았다. 사실 130만환이면 터무니없는 거액이었다. 시가 감정이 잘못된 데다 그동안 체납된 임대료 때문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매각 대금 130만환 가운데 10분의 1만 먼저 납부하고 나머지는 분할 납부해도 된다는 조항이었다.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인수 비싼 매각에 최종건은 당황했다. 당장 직원들 봉급 줄 돈도 수중에 없었다. 공장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여름철이었지만 그는 쉬지 않고 공장을 가동했다. 대목은 추석 장. 추석을 앞두고 선경직물은 그동안 비축해두었던 인조견 400필을 한꺼번에 내놓았다. 인조견 한 필에 900환이었으니 일시에 36만환이라는 거금을 마련했다. 이 돈으로 차철순에게 빌린 돈을 갚았다. 그리고 다음날인 53년 10월 1일 최종건은 선경직물 창립을 선포했다. 직기 20대, 종업원 60명이었다. 그날로 최종건은 박윤환을 데리고 수원시 매산동 선일직물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고철로 팔려고 내놓은 직기들이 공장 한 쪽에 가득 쌓여 있었다. 그중에 성한 것으로 10대를 골랐다. 다시 세류동에 있는 동흥직물로 가서 똑같은 방법으로 낡은 직기 50대를 주문했다. “이 많은 것을 어찌하려고요?” 박윤환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천연덕스럽다. “제1공장 재건하면 직기 60대는 돌려야 하잖아.” “아직 공장도 짓지 않았는데 직기부터 들여놓으면 어떡해요?” “기계 조립하는 데 한두 달 걸리잖아.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지.” 최종건의 열정이 막 날개를 다는 순간이었다. <계속>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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