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중견기업] ‘화사한 악어’3070 여성을 잡다
[파워중견기업] ‘화사한 악어’3070 여성을 잡다
크라운사는 뭐가 달라도 달라. 두고 보라고. 나중에 아주 크게 될 날이 있을 거라고.” 1982년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최병오(54) 형지어패럴(옛 크라운사) 회장은 일찌감치 스타 자리를 예약했다. 이름도 없는 옷을 팔지만 ‘최병오 표’는 뚜렷이 구별됐다. 과감하게 화려한 색상을 쓰는가 하면 태그 하나, 라벨 하나에도 마음 씀씀이가 남달랐다. ‘순면’ ‘Q마크’ 등 제품 소재나 사이즈가 내로라하는 브랜드 못지않게 깔끔하게 표기돼 있었다. 왕관을 닮은 ‘크라운’ 로고도 분명히 새겨넣었다. 소매상들 사이에선 “크라운은 믿을 수 있다” “최병오가 만든 옷은 팔기 쉽다”는 입소문이 났다. 그렇게 잘나가던 크라운사가 부도를 냈다. 93년 11월 18일 일이다. 어음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페인트 가게를 할 때도, 82년 서울에 올라와 제과점을 할 때도 ‘타고난 사업가’ 소리를 듣던 최 회장이었다. 어머니가 집을 담보 잡아 마련한 2000만원이 재기의 종자돈이 됐다. 재도전 무대는 초라했다. “다시 한번 불같이 사업이 일어나라”고 불(火)이 세 개나 들어간 등불 ‘형(熒)’ 자에 터 ‘지(址)’ 자를 썼지만 남평화시장 3층 한구석의 한 평 남짓한 가게, 그것도 남의 매장에 더부살이하는 ‘전전세(轉專貰)’ 같은 신세였다. 그러나 ‘타고난 사업가’는 달랐다. 불과 1년 만에 광희시장 지하 1층으로, 다시 1년 만에 이 시장 1층의 네 평 매장으로 옮겼다. 새벽 2시 퇴근하고 아침 7시 출근하는 억척생활을 7년이나 했다. 새벽에도, 한밤중에도, 이른 아침에도 가게를 지키고 있는 최 회장을 가리켜 시장 사람들은 ‘에너자이저’ ‘최길동’이라고 불렀다. “9년간 은행에 ‘입금’만 했습니다. 사실 부도를 낸 신세였기 때문에 대출을 받을 수도 없었지요. 그렇게 모은 돈으로 평생 바라던 브랜드 사업을 시작했지요.” 그 무렵 우연히 발견한 것이 ‘악어(크로커다일·Crocodile)’였다. ‘저거라면 잘할 수 있겠다’ 싶어 싱가포르 본사와 접촉해 한국 내 상표 사용권을 따냈다. 그는 악어에다 ‘레이디’를 붙였다. 자신 있는 여성복을 하고 싶어서였다. 서울 장안동에 ‘여성 크로커다일(Crocodile Ladies)’ 시범 점포를 열고 곧바로 대리점 모집에 들어갔다.
“최병오 표는 다르다” ‘한 평짜리 전전세’에서 시작한 형지어패럴의 날갯짓은 화려하다. 본격적인 브랜드 사업을 벌인 지 9년여 만에 여성 크로커다일 매장은 전국 362개에 이른다. 상설 할인점(54개)을 합치면 416개로 늘어난다. 지난해 여성 크로커다일 단일 브랜드로 3270억원대 매출(판매가격 기준)을 올렸다. 연 20%대 성장세여서 “올해는 5000억원에 도전한다”는 최 회장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형지가 이렇게 휘파람을 불게 된 데는 ‘브레이크 없는 출점 전략’이 주효했다. 처음엔 ‘우회 전략’을 썼다. 여성 크로커다일은 사업 초기 서울보다는 지방, 특급 지역보다는 B급 상권에 대리점을 냈다. 서울 명동, 광주 충장로 같은 특급 상업지역 대신 변두리 지역, 아파트 상가, 재래시장 인근을 파고든 것.
대리점 1호도 경기도 시흥이다. 그러나 “가격은 동대문시장급이지만 품질은 백화점급”이라는 입소문을 타면서 수도권, A급 상권에도 상륙했다. 지금은 서울에만 100개, 수도권에 170개 점포를 확보했다. 한편으로 최 회장은 출점 드라이브를 ‘세게’ 걸었다. 대리점 주인들이 “그러다 부도나는 것 아니냐”며 항의했고, 사내에서조차 “150개 이상은 무리”라고 만류했지만 최 회장은 ‘무조건 다점포’ 전략을 고수했다. “브랜드의 목표를 30대에서 70대까지 선호하는 ‘국민 여성복’으로 정했습니다. 그러려면 시골 읍내, 지하철 입구마다 악어가 한 마리씩 들어가야 해요. 적어도 500개 대리점은 확보해야 합니다. 그래야 양파 떨어지면 당연히 동네 수퍼마켓 가듯이, 나들이 갈 때면 으레 여성 크로커다일 매장에 가게 되지요.” 물론 품질이 받쳐줘야 가능한 얘기다. 여성 크로커다일의 첫 번째 품질 경쟁력은 ‘색(色)’이다. 최 회장은 업계에서 ‘색의 귀재’로 통한다. 형지는 90년대 초반만 해도 골프 의류에 주로 쓰던 핑크·연두·바이올렛 같은 화사한 계열의 색을 도입해 ‘3070 여성’을 사로잡았다. 최 회장은 “특히 형광 느낌이 나도록 해 주부부터 할머니까지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설명하면서 “페인트 장사 7년 경력이 색감을 익히는 데 보약이 됐다”며 껄껄 웃었다. 그러나 최 회장이 꼽는 “결정적인 성공 비결”은 전산 투자다. 형지는 90년대 후반 15개의 대리점을 운영할 때부터 최신의 전산 시스템을 깔았다. 여기에다 고객관계관리(CRM), 전사적자원관리(ERP) 등 전산 업그레이드라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대기업도 엄두를 내지 못하던 일을 ‘동대문 출신 회사’가 망설임 없이 결정한 것이다. “대리점 15개면 팩스로 주문서를 보내도 전혀 문제가 없어요. 주위에서 왜 5억~6억원대 투자를 하느냐고 갸웃거렸지만 사실은 정반대지요. 전산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으면 대리점 사업을 체계적으로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전산실에서 올라오는 결재서류는 가장 먼저 사인해줬습니다.”
2011년 매출 1조원 올릴 것 과감한 입점 전략, 화사한 색깔 마케팅, 적기(適期)에 갖춘 전산 인프라가 형지어패럴이 ‘거침없이 하이킥’을 할 수 있었던 삼박자가 된 셈이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10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성장통(痛)은 없었을까? 여기서 최 회장은 사람 얘기를 꺼낸다. “결국 사람 문제지요. 일단 인재가 좋았어요. 법인 설립을 한 것이 마침 외환위기 때였습니다. 제일모직·코오롱 같은 대기업들이 구조조정을 하는 바람에 어렵지 않게 ‘특급 인재’를 모실 수 있었습니다. 틈날 때마다 남들이 열 걸음 달릴 때 우리는 ‘반(半)의 반 발자국’만 더 뛰자고 했는데 모두 그 이상 해줬습니다. 저는 ‘감사합니다’하는 인사하기에 바빴어요.” 형지의 다음 목표는 ‘2011년 매출 1조원’이다. 최 회장은 “가을께 새로운 저가 브랜드를 내 대형 마트 시장에 진출하겠다”며 “여기에다 신규 론칭한 ‘샤트렌’ ‘끌레몽뜨’가 선전하고 있어 2011년까지 매출 1조원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반의 반 발자국만 더 뛰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때쯤 되면 동네 편의점처럼 여성 크로커다일이 가까이 다가갈 것입니다. 그러면 회사의 비전인 ‘여성 행복’도 그만큼 고객과 가까워지겠지요.”
최병오 회장은 1980년대부터 ‘동대문표 의류’의 라벨, 태그 하나에도 사이즈나 품질 표시를 정확히 했다. <사진> 동대문시장에서는 드물게 Q마크를 받기도 했다. “‘최병오 옷’은 믿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난 것은 당연했다. 의류 사업을 시작한 지 올해로 26년째. 아무리 급해도 최 회장이 직접 챙기는 일들이 있다. 인터뷰가 있었던 5월 10일에도 입술이 부르터 있을 만큼 피곤했지만 그는 ‘어머니 날 실적’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머니날 형지에선 5월 8일은 어버이날이 아니라 ‘어머니 날’이다. 5월 1일부터 8일까지가 최대 피크. 올해 여성 크로커다일은 이 여드레 동안 130억원어치를 팔았다. 어지간한 여성복 1년 매출과 맞먹는다. 기획상품 판매가격 9900원짜리 티셔츠도, 8000원짜리 사은품도 절대 허투루 기획할 수 없다. 최 회장이 직접 결재하기 때문이다. “작은 아이템까지 충분히 배려해야 큰 손님이 온다”는 게 그의 영업론이다. 직원식당 서울 포이동 형지어패럴 사무동은 네 개로 분산돼 있다. 최 회장은 이곳을 ‘에너자이저’처럼 달려 다닌다. 무엇보다 직원식당을 자주 찾는데 “일단 잘 먹어야 좋은 실적이 나온다”는 믿음에서다.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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