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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보다 베짱이가 되겠다

개미보다 베짱이가 되겠다

▶한 방을 노리는 데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사진은 로또를 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취재차 탄 택시기사에게 “노후자금으로 10억원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나.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미친 ×들”이라는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40대 후반의 개인택시 기사인 그는 “하루종일 일해봐야 한 달 수입이 200만원 안팎이다. 자식 둘 공부시키느라 허리가 휘는데 10억은커녕 당장 쓸 돈도 없다. 도대체 10억 얘기하는 ×들 어느 나라 ×들이냐”며 열을 올렸다. 요즘 TV에선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주먹보다 돈이 가깝다”고 외치는 ‘쩐의 전쟁’이 한창이다. 국내 드라마 사상 사채업자가 주인공으로 전면에 등장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돈을 둘러싼 전쟁은 드라마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치열하다. 이른바 ‘10억 만들기’ 열풍이 그것. 인터넷에는 ‘10년 10억 만들기’ ‘10억 클럽’ ‘1억으로 10억 만들기’ ‘10억 모으기 10계명’ 등 카페가 넘쳐나고 10억을 향해 열망을 불태우는 네티즌들로 북적인다. 50만 명이 넘는 회원을 확보한 카페도 있다. 5년 전 배우 김정은이 모 카드회사 TV 광고에서 “부~자 되세요!”라고 외친 후 우리 사회는 부자 되기에 열광했다. 이후 ‘파란만장 미스김 10억 만들기’ 드라마가 공전의 히트를 하면서 10억 만들기 열풍을 불렀고 3년 전부터 금융기관들이 “집을 뺀 노후자금으로 10억원 안팎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잇따라 발표하면서 부채질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백만장자’는 일반인들이 평생 이루기 힘든 꿈에 불과했다. 미국의 경우 지금도 주택을 제외하고 순자산이 50만 달러를 넘으면 ‘보통 부자’로 꼽힌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느 순간 10억원이 마치 ‘강아지 이름’처럼 회자되고 있다.

“국민들 기 꺾고 불안감 조성” 20년째 은행에 근무 중인 김영희(44)씨는 맞벌이 부부다. 남편 역시 은행에 근무하고 있는데 부부 합산 소득이 연 1억2000만원이다. 두 아이가 있는 이들 부부가 쓰는 월 생활비는 500만원. 김씨는 “산술적으로는 연간 6000만원을 저축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중간에 목돈 쓸 일이 자주 생기기 때문이다. 퇴직 때까지 10억원 모으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단순 계산해도 월 100만원씩 30년간 은행에 저축해봐야 이자를 4%로 계산하면 3억5000만원에서 4억5000만원을 안 넘는다.


케세라세라(Que sera sera)族
1956년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에서 가수이자 배우 도리스 데이(Doris Day)가 불러 히트했던 노래 제목. 원래 스페인어로는 ‘무엇이 될까, 될 대로 되라’의 뜻을 담고 있다. 케세라세라족은 ‘될 대로 되라’며 자포자기 혹은 막무가내 심정에 빠진 사람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노후자금으로 10억원이 필요하다니까 후유증이 큰 것 같다. 사람 심리가 부풀어서 돈을 우습게 알고 한편으로 불안해 하는 사람도 많다”고 우려했다. 노후자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공포와 불안감으로 증폭되자 대한은퇴자협회(www.karpkr.org)는 두 차례에 걸쳐 성명서를 발표했다. 협회는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에 노후자금으로 12억원이 필요하다는 등 억대 숫자가 난무하고 있다. 우리나라 인구의 25%가 소외계층으로 이 중에는 국가가 주는 월 40여만원의 돈으로 생활하는 사람도 있다. 금융계 마케팅도 중요하지만 현실성 없는 광고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해 국민의 기를 꺾지 말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0억 만들기 인터넷 게시판에서 네티즌 ‘공개안해’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회사에 다니며 적지 않은 월급을 받았다. 그런데 부부가 합쳐 25년을 근무하면서 알뜰히 모은 돈이 2억5000만원이다. 이 돈으로는 집 한 채도 장만할 수 없다. 너무 허무하다. 10억 모으기란 죽었다 깨나도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은 나 혼자 직장에 다니고 있는데 맞벌이 때처럼 외식도 하고 씀씀이를 줄이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 해보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을 느끼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네티즌 ‘cho8233’은 “10억원을 모으기 위해 가족도 외면하고 모든 것을 다 버리면 나중에 그 돈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궁금하다. 오직 10억원을 위해 그렇게 사느니 쓸 것 쓰면서 1억원을 모으겠다”는 글을 남겼다. 몇 년 전 ‘10억원 만들기 신드롬’에 빠져 전 재산을 주식과 복권구매에 탕진한 부녀가 동반자살을 시도한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아버지는 딸의 자살을 방조한 죄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딸이 허황된 꿈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을 깨우치고 설득하기는커녕 딸과 함께 주식 투자나 로또복권 구입에 거액을 낭비해 결과적으로 딸의 자살을 권유하거나 방관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노후자금 10억원’이 불러온 광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부작용과 후유증이 확산되고 있다. “죽어라 모아봤자 10억원은커녕 1억원 모으기도 힘든데 일단 쓰고 보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의 ‘케세라세라족’이 양산되는가 하면 ‘인생 한 방’에 올인하는 사람도 많다. 네티즌 ‘네모돌이’는 “나는 개미보다 베짱이가 좋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과 행복을 찾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주장했다.

‘한탕’ 노리다 자멸하는 사람도 방송국에 근무하는 이재상(40)씨는 “내년 초 아파트에 입주하는데 맞벌이를 하면서 지금까지 모은 돈 다 긁어모아도 9000만원이 모자라 대출을 받았다. 한동안은 빚 갚는 데 매달려야 한다. 월급만으로 평생 10억원 모으기는 불가능하니까 새롭게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데 장사를 해볼까, 땅을 살까 고민하느라 머리가 아프다. 10억원 벌었다고 책을 낸 사람도 있는데 괜한 환상만 갖게 한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10억원을 모을 수도 없고 돈을 쓸 만할 때 병들어봤자 ‘꽝’이라며 건강할 때 쓰고 보자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고 했다. 이씨에 따르면 10억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에 대출받아 주식에 투자했다 망해서 월급을 차압당한 사람도 있다. 그는 “어떤 사람은 제일 빠른 10억 모으기 지름길이 부동산이라며 대출받아 투자했다 결국 빚을 못 갚고 집이 경매로 넘어간 경우도 봤다”고 밝혔다. 통계청의 ‘2006 가계자산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정의 평균 재산은 부동산과 저축, 기타 소득 등을 모두 합쳐 2억8112만원이다. 상위 10%가 가진 평균 재산은 12억5000만원이다. 2004년부터 최근까지 노후자금으로 7억~13억원이 필요하다는 여러 금융기관의 발표는 집을 뺀 금액을 말한다. 다시 말해 상위 10% 부자보다 더 많은 돈이 보통 사람들의 노후자금으로 필요하다는 얘기다.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노후자금 10억원’은 어떻게 해서 나왔을까. 일반 직장인이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노후자금 액수에 대한 공방으로 사회가 혼란에 휩싸이자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그룹 이철용 연구위원은 지난해 초 ‘노후자금 4억~5억원이면 충분하다’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놨다. 이에 따르면 노후자금 10억원은 금융회사들의 마케팅 전략과 관련이 있다. 금융회사들은 우리 사회 양극화 흐름을 재빨리 포착하고 구매력 있는 상류층을 주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 자연히 노후자금 설계는 골프, 해외여행, 중형차, 가사 도우미 등으로 상징되는 웰빙형 생활패턴을 전제로 이뤄진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접어둔 채 ‘10억’이라는 숫자에 매달려 불안감에 빠진 사람들이 ‘인생 한 방’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있다. 결혼 후 6년간 전세를 면치 못했던 유모(41)씨는 10억 열풍이 불면서 마음이 초조해졌다. 최소한 집 한 채라도 장만해야겠다는 마음에 그는 월급의 절반을 아내 몰래 주식에 투자하고 사채에 회사 공금까지 손을 대다 결국 4000만원이 넘는 빚을 지고 회사에서도 쫓겨났다. “200만원 조금 넘는 월급으로는 저축조차 불가능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10억, 10억 하니까 뾰족한 수는 없고 불안했다. 마침 주식시장이 호황이라 한 방이면 될 것 같은 마음에 시작했는데 너무 후회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자포자기에 빠진 그는 지금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다. 최근 구인구직 포털사이트 ‘일자리천국’과 ‘아르바이트천국’이 공동으로 남녀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방 인생을 꿈꿔본 적이 있는가”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87.15%가 “꿈꿔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 가운데 95%는 “로또를 비롯한 복권을 구매해 본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노후자금 부풀리기 자제해야 이철용 연구위원의 분석에 따르면 은퇴 나이 60세, 부부 2인 가구, 통계청의 고령 가구주 연평균 생활비, 물가상승률 등을 감안해 연 2000만원이 필요하다고 가정할 때 현재 50대는 3억원, 40대는 4억원, 30대는 5억원이면 평균 수준의 노후생활을 할 수 있다. 그는 보고서를 낸 배경에 대해 “시골 혹은 도시 거주, 나이, 물가 등 어디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따라 필요 자금이 달라지기 때문에 노후자금에 대한 특별한 정답이 없다. 누가 봐도 직장인이 10억~12억원을 모으기는 쉽지 않다. 정 가진 게 없으면 기초생활보장비로 최소한의 생활을 하며 살 수도 있다. 그런데 10억원 이상 노후자금이 필요하다는 발표가 쏟아지면서 좌절을 겪거나 자포자기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노후를 어떻게 살 것인지 질이 문제지 돈 문제가 전부인 양 걸고넘어지는 것은 누가 봐도 과장”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는 복지 선진국처럼 국민이 실업 상태에 있거나 은퇴 후 기댈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와 노인복지제도가 충분히 마련돼 있지 않다. 공교육의 부실을 사교육으로 채워야 하는 현실에서 국민은 월수입의 20~40%에 달하는 돈을 교육비로 매달 지출하고 있다. 더구나 자녀의 결혼비용과 전세금까지 책임지는 부모가 대부분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자신의 미래 생활은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과도하게 부풀려진 노후자금이 속속 발표되면서 사람들의 이상 심리를 부채질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지금보다 더 내고 덜 받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되면서 사람들은 더욱 미래를 불안해 하고 있다. 주명룡 대한은퇴자협회 회장은 “국민연금 수혜자가 200만 명을 넘어섰다. 또 공무원연금 등 특수 연금 수혜자도 많고 퇴직연금 수혜자도 앞으로 늘어날 것이다. 이 외에 개인적으로 저축하거나 투자한 것, 보험 등을 고려하면 노후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또 오는 7월부터 주택을 담보로 은행에서 매달 일정 금액을 받아 쓸 수 있는 역모기지론이 실시된다. 이뿐만 아니라 선진국이 되면 20~30년 후 은퇴하는 젊은이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복지혜택을 누릴 수 있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10억원에 매달려 허황된 욕심을 부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충고했다. 그는 “무엇보다 노년층의 은퇴를 지연시켜 경제적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년제를 연장하고 노년층을 위한 일자리 창출이 뒷받침돼야 한다. 또 일부 기업에서 실시 중인 임금피크제도 보다 넓게 확산되어 정년을 늘릴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것들이 뒷받침돼야만 노후에 대한 불안감과 공포감이 줄어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후자금 이렇게 준비하라 4억~5억원의 노후자금 준비를 위해 30~50대가 60세까지 매월 투자해야 할 금액은 서울 등 광역시를 기준으로 70만~92만원이다. 이것도 만만한 액수가 아니다. 통계청의 전국 가계조사에 따르면 2005년 전 가구 평균 흑자액이 30~54세 연령층에서 59만~64만원에 불과했다. 따라서 안정적으로 노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몇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여유자금 분산 투자 = 분산 투자로 총 투자 수익률을 10% 정도로 높인다. 현재 4%대인 은행 이자율보다 수익이 높으면 매월 필요한 투자금액을 낮출 수 있다. 다만 기대 수익률이 높은 투자처는 실패 확률 역시 높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소비지출 구조조정 = 낭비적 요소를 없애 노후 대비 투자 규모를 늘려야 한다. 특히 퇴직 전 지출의 20~40%를 차지하는 자녀교육 비용을 과감히 낮출 필요가 있다.

◇투자기간 늘려 잡아야 = 40~50대에 뒤늦게 노후대비를 시작하면 성공 가능성이 낮다. 따라서 일찍 노후 대비를 시작하면 그만큼 매월 투자 필요 금액을 낮출 수 있다. 이 세 가지 방법이 여의치 않다면 은퇴 이후 생활수준을 낮춰 잡는 것도 방법이다. 예를 들어 집 크기를 줄이거나 도시생활을 벗어나면 여유자금을 확보할 수 있고 지출 규모도 줄일 수 있다. 이철용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제2 사춘기’ 노후 인생 설계는?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은퇴 이후를 ‘제2의 사춘기’라 부른다. 제1의 사춘기에 신체적 성장이 수반된다면 제2의 사춘기는 자연스러운 노화현상을 인정하면서 인생을 새로운 부흥기로 보는 것이다.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앞두고 미리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라=개인적인 고민과 소망, 가족 간의 교류와 관계, 가족 외 사회적 공간에서의 활동 등 개인ㆍ가족ㆍ사회적 관점에서 나를 바라보고 그 속에서 균형 있게 만족할 수 있는 노후 삶이 어떤 것인지를 미리 파악하는 것이 좋다.

◇‘여생 계획서’ 만들라=사업에도 계획서가 필요하듯 여생에도 계획이 필요하다.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실행계획을 짠다면 함께 아름다운 노후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은퇴 후 하고 싶은 일 리스트 작성하라=직장생활 동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막연히 꿈꾸었던 일에 대한 리스트를 미리 만들어두면 좋다. 막상 은퇴하고 나면 뭘 해야 할지 모른 채 좌절감에 빠져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적지 않다. 리스트가 있다면 시간 낭비와 쓸 데 없는 고민을 줄일 수 있다.

◇은퇴 후 재취업 공부를 미리 하라=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80세 안팎임을 감안할 때 은퇴 후 20~30년을 휴가 상태로 보내는 것은 개인이나 사회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노후에 원하는 일자리를 손쉽게 구하기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 적당한 노동과 책임감, 여유 있는 생활은 건강한 장수의 필수조건이다. 주명룡 대한은퇴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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