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 수출’로 중동시장 열어
해방 후 건설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에서 새로운 건설의 역사를 쓰기 시작하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1970년대에 독보적인 수주실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소전(素田) 김용산(金用山) 전 극동건설 회장이 지난 7월 14일 8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일본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김 전 회장은 해방 직후인 1947년 4월 대영건설(극동건설 전신)을 설립하고 당시로는 신공법의 토목공사를 건설 현장에 전파하면서 70년대가 됐을 때는 현대, 삼환, 삼부, 대림과 함께 ‘건설 5인방’으로 불리며 건설 업계를 리드해 나갔던 히어로였다. 1953년 상호를 대영건설에서 극동건설로 변경하고 줄곧 장수기업으로 60년의 역사를 써오는 동안 한때는 도급순위 5위까지 오르는 선도 건설업체의 영광을 누렸지만 IMF 사태라는 불운이 겹쳐 끝내 회생하지 못했다. 김 회장은 2005년 4월, 항소심인 서울고법에서 분식회계를 통해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 등이 문제가 돼 실형을 선고 받음으로써 끝내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기업가로서의 무수한 업적들은 지금도 건설 현장에서, 또는 건설인들의 가슴속에 살아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한때 산업 영웅으로 추앙 받았던 정주영 회장도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극동건설 공사현장을 보고 김 회장을 가리켜 이론과 실무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평가했다. 극동건설은 아산만 방조제, 부산항, 방화대교 같은 도로와 항만공사 등에서 빼어난 시공능력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창업 1세대들이 얼마 남아있지 않은 경제계에서는 김 회장이 타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인에 대한 추모의 덕담들이 줄을 이었다. 그중에서도 김 회장이 남긴 ‘건설도 수출이 된다’는 신념은 중동시장을 열었던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돋보이는 추억담이었다. 대한민국이 건국 후 수출을 시작해 처음으로 총액 1억 달러를 돌파했다고 해서 1964년도에 ‘수출의 날’을 제정한 이후 웃음이 별로 없던 박정희 대통령이 그나마 흡족하게 웃었던 날이라면 71년 11월, 수출의 날 기념행사를 마치고 청와대에서 가졌던 경제인들과의 만찬자리에서였고, 그것도 김 회장 때문이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기업인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담소하던 중에 좌중을 둘러보며 건의사항이 있으면 얘기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최종환 삼환기업 사장(삼환그룹 명예회장)이 김용산 극동건설 사장(당시)을 치켜세우면서 “용산에서 용이 났으니 김용산 사장께서 한 말씀 하시지요”라면서 분위기를 돋우었다. 좌중에 웃음이 번졌고 박 대통령도 “이름 때문에 용이 났다는 거요? 김 사장 고향은 시흥인데 시흥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해야지?”라고 되받아 또 웃음이 터졌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그러고 보니 서울과 경기권에서 태어난 기업인들이 드문데 김 사장이 선두주자가 된 건가?”라고 해서 갑자기 출생지를 따져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김 회장이 건의한 내용이 훗날 건설업계의 위상을 높였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많은 기업이 정해년(丁亥年) 돼지띠(1947년)에 간판을 내걸고 태어나서 식성이 좋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이 나라 바깥에 많이 있습니다. 나가서 먹이를 많이 구해올 수 있도록 정부와 은행들이 적극 도와주시고 특히 건설도 수출업종에 포함시켜 수출의 날에 훈·포장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시면 용기백배해서 더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박수가 나왔고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관계관에게 지시하겠다고 약속했다. 건설업이 수출 업종이 될 수 있다는 인식 변화를 가져온 것이 바로 김 회장의 건의에서부터였고 수출의 날에 ‘건설 수출’이 본격적으로 심사된 것도 김 회장 덕이었다는 것이다. 고인은 비록 건설로서 대망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변화가 필요한 시대에는 언제나 한가운데 서서 어디로 가야 옳은 길인가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남긴 인물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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