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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국이 강대국 눌렀다

소국이 강대국 눌렀다


카리브해의 앤티가, 온라인 도박 허용 문제로 미국 궁지로 몰아 앤티가는 국제 무역분쟁보다는 모래 해변으로 더 유명한 나라다. 그러나 올해 10월 카리브해의 이 작은 휴양지는 한 산업 분야를 합법화하도록 미국에 강요하게 됐다. 바로 온라인 도박 산업이다. 부시 행정부가 집권 1기 초부터 근절하려 노력해온 분야다. 인구 7만 명에 국내총생산(GDP)이 10억 달러도 안 되는 초소형 국가 앤티가가 미국에 온라인 도박을 허용하도록 강제하게 됐다는 얘기다. 10월부터 시행될 예정인 세계무역기구(WTO)의 판결은 미국이 온라인 카지노를 규제해온 그간의 태도를 바꾸도록 의무화했다. 앤티가뿐만 아니라, 유럽연합(EU)·일본·호주를 비롯한 다른 많은 나라와의 관계에서도 미국은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럴 경우 현재 연간 150억 달러 규모인 온라인 도박 산업이 하룻밤 사이에 2배로 커질 전망이라고 도박업계 컨설팅업체인‘안전한 인터넷 도박 협회’ 측은 밝혔다. 미국이 이번 결정에 불복할 경우, WTO는 그동안 미국의 도박 금지법으로 피해를 본 국가들이 미국의 지적재산권법을 무시해도 된다고 허용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이번 분쟁의 파장은 할리우드, 실리콘 밸리 등으로 확산된다. 사태의 발단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앤티가는 미국의 온라인 카지노 금지법이 자유무역 원칙에 위배된다며 WTO에 제소했다. 섬나라인 앤티가에서 온라인 카지노는 관광업 다음으로 규모가 큰 산업이다. 미국에는 자국민을 상대로 온라인 도박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허용된 도박업체들이 많다. 예컨대 경마 웹사이트인 YouBet.com 같은 업체들이다. 또 인디언들이 운영하는 카지노와 일부 지역의 유람선 카지노 영업도 허용된다. 그러나 동일한 유형의 서비스를 외국 도박업체가 미국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일은 불법이다. 미국 정부는 외국의 온라인 도박업체들에 미국인 이용자들의 인터넷 프로토콜 주소를 확인해 그들의 접속을 봉쇄하라고 요구해 왔다. 그러나 이런 요구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 세계 온라인 도박 매출의 약 60%를 미국인 이용자들이 올려주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더욱 강력한 규제 조치를 발동했다. 미국인들의 해외 도박사이트 이용 대금을 미국의 은행과 신용카드 회사들이 결제해주지 못하게 하는 새로운 법안에 서명했다. 그 결과 지브롤터에 있는 파티게이밍(한때는 시장 가치가 84억 달러에 달했다) 같은 유명 도박업체들의 주가는 반토막이 나고, 매출은 70%나 급감했다. 미국 정부는 또 많은 외국인 온라인 도박업체 간부를 도박 관련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지난 3월 런던에 본사를 둔 온라인 도박업체 Sportingbet.com은 미국에서 체포된 피터 딕스 회장의 보석금으로 40만 달러를 루이지애나주(州)에 내야 했다. 그러나 바로 같은 달, WTO는 미국의 온라인 도박 규제가 자유무역에 위반된다고 결정했다. 이번 결정은 이르면 올해 10월부터 시행된다. 앤티가 정부의 소송 대리인인 미국 텍사스주의 변호사 마크 멘델(51)은 “내가 이 사건을 맡자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완전히 과소평가했다”고 말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오늘날처럼 디지털화한 세계 경제에서는 아무리 작은 국가라도 놀랄 만한 힘을 행사하게 됐다는 사실을 미국이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무역 협정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WTO는 피해를 본 나라가 협정 위반국에 수출 제재를 가하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앤티가는 미국을 상대로 의미 있는 경제제재를 가할 수단이 없다. 따라서 WTO는 또 다른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크다고 통상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앤티가가 미국의 지적재산권법을 무시해도 좋다는 조치다. 만일 미국이 온라인 도박 문제에서 양보하지 않으면, 앤티가인들은 내년부터 온갖 미국 제품의 합법적 해적판을 수십억 달러어치나 판매해도 된다. 지적재산권법에 따른 로열티를 한푼도 지불하지 않고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소프트웨어와 디즈니 영화 등을 마구 복제·판매하게 된다는 얘기다. 미국 정부의 고위 통상 관리였던 나오 마쓰가타는 “지적재산권을 무시하는 행위는 막강한 제재 수단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앤티가 같은 약소국들에 완벽한 지렛대가 된다”고 말했다. WTO는 전에도 지적재산권 문제를 제재 수단으로 허용한 적이 있다. EU와 에콰도르 간의 그 유명한 ‘바나나 전쟁’에서였다. 지적재산권을 무시하겠다는 위협에 EU는 타협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문가들은 지적재산권을 무시하는 정책이 장차 늘어나리라 전망한다. 그들은 이번 온라인 도박 분쟁을 그런 정책의 효용성을 판가름하는 시금석으로 본다. 당연히 실리콘 밸리와 할리우드에서 고용한 로비스트들이 미국 의회로 몰려가 타협을 촉구했다. 지난 8월 미 영화협회(MPAA)는 앤티가 측과 협상해 불법 복제를 막으라고 미 무역대표부에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온라인 도박 문제에서 굴복하기를 완강히 거부한다. 미국이 제시하는 법률적 근거는 놀랄 정도로 허약하다. 1990년대 중반 서명한 WTO 의무 조항에 도박을 허용하려는 의도는 결코 없었다는 게 미국 측의 논거다. 미 무역대표부의 존 베로노 부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미국 측 협상 대표들이 이런 종류의 도박을 40년째 금지해온 형사법을 뒤엎으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웃기는 얘기다.” 그러나 WTO 측은 미국이 그래 봤자 헛수고라는 입장이다. WTO의 한 내부 인사는 “미국은 WTO 규정을 준수할 법적인 의무가 있다. 단순히 ‘저런!’이라고 말하면서 없었던 일로 하자는 태도를 취해선 안 된다. 그런 식의 선례를 남겨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진행 중인 사건을 언급하는 만큼 익명을 요구했다. 궁극적으로 이번 사건은 미국에 매우 불리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자국의 도박법에 WTO가 간섭할 권한이 없다며 계속 버틸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WTO의 전반적인 신뢰성을 손상시킬 우려가 있다. 스스로 내린 결정을 이행할 능력을 WTO가 갖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에도 안 좋은 일이다. 인터넷 검열, 짝퉁 상품의 대량 생산 같은 문제들을 놓고 중국과 힘든 싸움을 벌여야 하는 미국으로서는 협상을 중재할 강력한 WTO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EU·호주·일본 등 WTO의 다른 8개 회원국도 미국의 온라인 도박 규제로 입은 손해를 배상받으려고 벼르는 중이다. 앤티가 측 변호사 멘델은 “EU는 입맛을 다신다. 배상 금액을 모두 합하면 1000억 달러 규모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하라스와 MGM 같은 미국의 거대한 오프라인 카지노들은 이번 사건의 미국 측 입장이 발표되자마자 온라인 도박 사업에 진출한다는 계획을 수립 중이다. 조만간 그 신호가 보일 듯하다. 9월 22일은 미국이 앤티가나 여타 나라들과 협상을 타결짓도록 WTO가 설정한 첫 번째 마감시한이다. 그러나 WTO의 한 내부 소식통은 그날이 오면 마감 시한이 연기됐다는 발표만 나올지 모른다고 예측했다. 워싱턴 소재 케이토 연구소의 무역정책 분석가 샐리 제임스는 “빨리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쉽게 양보하지 않을 듯하다”면서 “그러나 나한테 내기를 걸라고 하면, 내년 이맘때쯤에는 미국이 법을 바꾼다는 쪽에 걸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온갖 도박 사업이 온라인화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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