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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예술은 없다

새로운 예술은 없다

사람들 특히 미국인들은 해가 바뀔 때마다 항상 전해보다 좋은 일이 더 많이 생기리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하지만 거의 언제나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대통령 후보들은 항상 밝은 세상을 약속해야 하고, 장사꾼들은 항상 새롭고 더 좋은 제품을 내놓아야 하며, 첨단기술의 마법은 이미 완벽해진 수준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한다(윈도 비스타를 구입한 사람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리라). 예술만큼은 이처럼 천한 지속적·상향적인 혁신주의와는 다르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대다수 작가, 화가, 음악가, 영화제작자 역시 계속적인 혁신이 의무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필수불가결하다고 믿는다. 회화는 르네상스에서 사실주의, 인상주의, 큐비즘, 초현실주의, 추상 표현주의, 팝 아트 그리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진행되는 사조로 ‘발전’해 간다. 바흐는 모차르트에게 밀려나고 모차르트는 베토벤에게, 베토벤은 와그너, 그리고 계속해서 숀베르크, 스티브 라이히, 필립 글래스에게 자리를 내준다. 문학에서는 신사실주의와, 그 자매 격인 스스로 진화하는 마법의 사실주의에 사뮈엘 베케트의 미니멀리즘이 나가떨어졌다. 그 전에 미니멀리즘은 조이스의 맥시멀리즘을 하야시켰다. 맥시멀리즘은 그 전에 재래 소설을 눌렀었고 재래 소설은 서사시를 굴복시켰다. 이제 속박을 원치 않는 예술가들이 규칙, 전통 또는 금기로부터 완전히 풀려났으니 앞으로 어떤 사조가 등장할까. 목하 작업이 진행 중이다. 그래야만 한다. 딴지를 걸기는 싫지만(혁신가와 정반대되는 악마니까) 새로운 게 나와 봤자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물론 몇몇 새로운 면모는 있겠지만 이제 커다란 혁신이 또 남아 있을 법하지 않다. 이미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고 타진했다. 작곡가들은 1909년 쇤베르크 이후 장조와 단조를 무시하고 곡을 만들었다(서양 화음이여 안녕). 덕택에 우리는 음조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얼마간 그것을 갈고닦는다. 그 다음엔? 전자음악은 1920년께 테레민(전자악기를 개발한 러시아인 과학자) 이후에야 등장했다. 아니면 아프리카나 아시아 쪽으로 방향을 틀어 긴장과 이완의 서양음악 기본 양식을 버리고 반복 양식을 택하면 어떨까. 라이히와 글래스는 1960년대부터 그 방법으로 효과를 봤다. 오늘날의 개념·차용 미술(예술의 개념 자체를 뒤엎는다니 한심하지만) 중 마르셀 뒤샹이 이마를 치며 감탄할 만한 내용은 하나도 없다. 뒤샹은 1913년 나무 받침대에 자전거 의자를 올려놓은 조각 작품을 만들었다. 1919년에는 모나리자의 얼굴에 콧수염을 그려넣었다. 몇몇 작가도 자신의 장르 뒤집기를 즐긴다. 그들은 문장 속에서 그것이 글에 불과하며 독자와 함께 ‘픽션’이라는 게임을 즐긴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이를 메타픽션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1759년에 이미 ‘트리스트램 섄디’가 그랬고 1610년께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The Tempest)’가 그랬다. 1939년작 ‘피네간의 경야(經夜)’의 복잡성과 불가해성(게다가 불평도 별로 들리지 않는다)을 능가할 만한 현대 작가는 없다.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모더니즘의 부산물일 뿐이다. 용어에서부터 그들이 혁신주의 이념을 지지한다는 냄새를 풍긴다. 실제로 비평가이자 시인인 랜달 재럴은 모더니즘이 낭만주의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듣고 보면 일리 있는 말이다. 커다란 패러다임 전환이 불가능해 보인다고 해서 작은 추세 전환이 잇따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중 일부는 흥미로우며 역사를 모를수록 더 흥미진진하다. 전통 문학의 사실주의는 1970년대에 부활해 그후 줄곧 픽션 시장의 터줏대감 노릇을 해왔다. 하지만 또다시 따분하고 후진적이며 심지어 억압적이라고 공격받는다. 잠시 전진을 방해하는 마지노선이라는 인식이다. 2005년 벤 마커스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하퍼스지(誌) 에세이에서 그런 주장을 펼쳤다. 그는 조너선 프랜전을 “예술적 포부의 개념을 송두리째” 부정한 주범으로 거론했다. 1922년 제임스 조이스가 존 골즈워디나 W 서머셋 모옴을 거론하며 한 주장과 같은 식이다. 이 논쟁에서 어느 쪽이 이기든 패자에게는 재대결 기회가 주어지며 그런 식으로 계속된다. 이제 동유럽,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인도와 남아시아의 작가들이 모두 영어권 세계에 ‘발견’되거나 사실상 그 세계에 진입했으니 이미 존재하는 구성을 더 다양하게 만들 만한 다른 민족을 찾아보자. 주노 디아스는 2007년작 소설 ‘오스카 와오의 삶(The Brief Wondrous Life of Oscar Wao)’에서 표준 영어, 힙합 사투리, 스페인어를 혼합해 훌륭한 목소리를 엮어냈다. 하지만 과거 T S 엘리엇과 에즈라 파운드도 ‘황무지’와 ‘캔토스’에서 바로 그런 목소리를 기대했다. 여러 언어를 섞는 작가들, 장-미셸 바스키아나 제프 쿤스의 계승자들은 앞으로 더 늘어날 듯하다. 그런지 또는 힙합, 펑크, 루츠 록, 메탈이나 레게톤도 한층 세련되게 발전해 나간다. 그러나 완전한 혁신은 앞으로 어떤 모습을 할까. 피카소나 뒤샹, 조이스, 또는 밥 딜런, DJ 쿨 허크 또는 지금은 표준으로 인정받은 이단아들이 마리화나를 끊기 전에도 사람들은 분명 같은 말을 했을 듯하다. 하지만 이단적인 예술가가 뛰어넘을 담장과 말썽을 일으킬 만한 여지가 남았을까. 그렇다면 어떤 담장, 무슨 말썽이 있는가. 진정으로 새로운 예술 장르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진과 활동사진은 각각 1820년대와 1890년대 등장했다. 어쩌면 1879년에 선보인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의 영사기도 포함될지 모른다. 뭔가 새롭게 떠오르는 움직임이 느껴지는가. 냄새의 서사? 촉감의 교향곡? 안 될 이유도 없다. 또 반면에 왜 그래야만 하나?. 하지만 잠깐, 디지털 시대가 있잖은가. 지금까지 우리의 상상을 불허한 미래가 아니었나. 기업과 광고주들이 인터넷을 계속 좌지우지해도 활동할 만한 사이버공간이 남았다고 가정할 때 이것이 마법과 같은 혁명의 정원, 더 나아가 완전히 새로운 예술형태가 되지 않을까. 온라인 쌍방향 소설이 유행이었지만(x, y 또는 z의 줄거리 구조를 따르며 그후 x.1, x.2, x.3 등으로 전개한다) 비디오게임이 더 탄탄하고 인기 있는 쌍방향 서사 형식이 됐다. 게임이 예술 장르가 될까.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말하면 그러리라 본다. 사진을 놓고도 비슷한 논쟁이 있었다. 그리고 멀티미디어 예술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음악과 영상이 혼합돼 어쩌면 음악 재생기의 고동치는 그래픽 이미지가 그때 가면 골동품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2007년의 혁신적인 웹사이트/비디오 블로그/TV 프로그램인 ‘쿼터라이프’는 분명 더 쌍방향성이 강화되고 개선된 통합 기반 엔터테인먼트의 본보기가 된다. 그리고 디지털화에 힘입어 짜깁기(음악 샘플링, 그리고 포토샵 같은 사진편집 도구)는 녹음 기술자의 면도날, 콜라주 전문가의 조각칼과 아교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축음기로부터 셸락 음반, 비닐 LP에 이르기까지 아날로그 녹음은 모두 조작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MP3 파일은 원하는 대로 개조해도 된다. 디지털화로 무엇이든 조작이 가능해졌다. 이게 패러다임 전환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기술적으로는 물론 그렇다. 문화적으로는 그 정도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예술적으로는? 매체는 그 자체가 메시지라는 마셜 맥루한의 통찰은 기술이 개인과 사회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예술작품에 적용될까. 컴퓨터 합성 사진이라도 분명 사진이며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로 작성해도 시는 시다. 아크릴 그림도 그림인 이치와 같다. ‘쿼터라이프’도 여전히 ‘위대한 유산’이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청소년기의 아픔을 그린 성장 이야기다. 음악에서는 드럼으로부터 평균율, 전자 기타, 신시사이저, 디지털 샘플러에 이르기까지 수천년 동안의 혁신을 거치며 음향이 개선되고 가능성이 크게 다양해졌다. 하지만 이제 어떤 음향이든 디지털 기술로 재생하고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음향(그중 일부는 음악적 가치가 있다)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됐으니 새로운 음정, 음조, 음질, 리듬이 갈수록 바닥나지 않을까. 요컨대 우리 두뇌에 컴퓨터 칩을 심어넣지 않는 한 말이다. 어쩌면 그것이 혁신 중의 혁신일지도 모른다. 예술, 첨단기술, 신경외과술의 결합이다.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음악이 머릿속에 새겨진다는 말은 비유 표현일 뿐이다. 뮤지컬 ‘오클라호마’에 나오는 곡 ‘캔자스시티’가 최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그들은 갈 데까지 갔어”). 우리 선조들의 특이한 상상력 부재를 악의 없이 패러디한 내용이다. 그러나 앤트 엘러처럼 들릴 위험은 있지만 우리는 이제 예술적 진보 행진의 막바지에 가까워진 듯하다. 디지털 음악합성과 배급 체제를 갖춰도 매체는 매체일 뿐이다. 디지털화는 예술가의 작업방식과 일반인의 소비방식을 바꾸었지만 예술의 본질을 어찌 바꾸겠는가. 말, 소리, 이미지, 그리고 우리의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를 상징하고 재결합하고 재해석해 만든 물체 말이다. 담장은 헐렸고 선택은 무한하며 기술은 거의 전능하다. 우리가 항상 원하던 바 아니던가. 이제 모두 만족하는가. 물론, 예술의 영웅적 순교자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힘든 일이다. 인습타파로 박해를 받으려면 실제로 뉴욕, 로스앤젤레스, 베를린 또는 도쿄를 벗어나야 한다. 그조차 효과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인터넷의 존재 때문에 어떤 도시든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게 됐다. 따라서 우리가 생물 디지털 액체로 용해되지 않는 한, 또는 방사성 입자의 폭풍 속으로 날려 가지 않는 한 새로운 것(항상 새로웠던 것)은 개개인뿐이다. 개인들의 감수성,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으려는 의지 또는 충동만이 새롭다. 다행히(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불행히) 해가 바뀔 때마다 그런 사람들이 끊임없이 새로 배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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