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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퍼스트 레이디?

준비된 퍼스트 레이디?

▶미셸은 선거전략 회의나 모금활동은 하지 않는다. 대신 남편의 현실 감각을 유지해 주는 역할을 한다.

미셸 오바마는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1980년대 프린스턴대 재학 시절엔 사회 변화에 관심이 컸지만 학생회 간부에는 출마하지 않고, 대신 짬이 나면 동내 꼬마들을 모아 읽기를 가르쳤다. 하버드 로스쿨에선 소수민족 학생과 교수를 늘리라고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그러나 미래의 남편 버락 오바마(로스쿨에서 날리던 학생으로 나중에 그 시위에 참여했다)와 달리 미셸은 교내 구성원들이 인종적으로 다양해야 한다는 주장을 화려한 언변으로 호소하진 않았다. “버락 오바마가 말하면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경청했다”고 랜덜 케네디 교수가 회고했다. “반면 미셸은 좀 더 겸허하고 조용했다.” 버락은 법률 학술지 하버드 로 리뷰(Law Review) 편집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반면 미셸은 다른 대학의 흑인 학생을 하버드 로스쿨로 이끄는 일처럼 생색이 나지 않는 일에 힘을 쏟았다. 미셸에게 정치는 영감을 주는 일이라기보다 실용적인 결과를 내는 일이었다. 미셸은 구체적인 뭔가를 실행에 옮기는 데 관심이 많았다고 그녀를 가르친 찰스 오글트리 교수가 말했다. “미셸은 절대 앞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미셸은 더 이상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사치를 누릴 수 없다. 이젠 일거수일투족이 도마에 오른다. 미셸은 퍼스트 레이디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역할과 그에 따르는 거북스러운 사람들의 이목을 기꺼이 감수하기로 결심했다. 유세 현장에서 때로는 버락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는다. 직접적이고 꾸밈 없는 말, 정치인의 배우자에게서 잘 볼 수 없는 신랄한 유머 감각으로 남편 버락의 으쓱대는 스타일을 보완해 준다. 때로는 강인한 면을 보이며, 심지어 차갑기까지 하다. 그런 면모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높은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 하던 마음에서 어느 정도 비롯된 듯하다. 미셸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번 선거에서 이기고 싶어 한다. 지금까지 너무도 많이 투자했기 때문이다. 버락이 자신의 고매한 모습으로 대중과 거리감이 있다면 미셸은 소탈한 면이 대중을 끌어들인다. 처음에는 군중 앞에 서는 일이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남편의 어떤 선거에서든 이 정도로 열심히 참여한 적이 없다”고 미셸은 지난주 뉴스위크에 말했다. “과거엔 필요할 때만 겨우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선거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미셸은 남편에게 선거운동에 모든 것을 투자하겠다고 말했다(“아직 우리가 참신하고, 마음이 열려 있고, 두려움 없이 대담한 바로 지금 시점에 우리가 출마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미셸은 지난해 12월 배너티 페어지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러나 가정생활은 절대로 희생하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미셸은 남편이 출마를 선언하기 직전 남편과 그의 참모들을 두 번 만난 자리에서 버락이 내세운 포괄적인 주제인 “희망”과 “변화”와는 무관한, 사소하고 실제적인 문제를 시시콜콜 따져 물었다. 선거운동으로 개인적인 생활이 어떤 영향을 받겠는가? 선거자금은 어디서 나오나?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힐러리 클린턴 진영에 진정코 맞서 이길 수 있겠는가? 아니면 단지 허영심을 채우려는 시도일 뿐인가? “미셸은 버락이 무의미하게 출마하길 원치 않았다”고 수석 전략가 데이비드 액슬로드가 말했다. 또 미셸은 남편의 신변 안전에 관한 우려도 제기했다. 미셸이 출마 가능성을 처음 이야기했을 때 친척들이 한 첫 질문 중 하나가 안전 문제였다. 버락은 선거운동 초기에 정부로부터 경호팀을 제공 받았다. 군중이 대규모로 운집하고 협박 e-메일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이젠 미셸 자신도 별도의 경호팀을 제공받았다. 물론 그녀는 아내로서 남편이 테러를 당할 가능성을 거론하기를 꺼린다. “경호를 고맙게 생각한다”고 미셸은 지난여름 뉴스위크에 말했다. “어쩌면 남편보다 내가 더 고마워 해야 할지 모른다. 남편은 아주 정상적인 삶을 좋아한다. 경호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 삶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첫 조짐이다.” 액슬로드를 비롯한 선거 참모들은 미셸의 질문 하나하나에 답했다. “요점은 만약 출마한다면 버락의 정체성과 사고방식에 부합하는 선거운동을 펼치기 원한다는 말이었다”고 액슬로드는 말했다. “절대로 그것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였다.” 미셸은 이전투구가 난무하는 대선 정치의 험악성 때문에 남편이 이상주의적인 정신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표했다. 그래서 워싱턴에서 수없이 볼 수 있는, 영혼이 없고 냉소적인 정치꾼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얘기였다. “미셸은 늘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잊지 말자’는 주의였다”고 액슬로드는 말했다. 그 대면이 끝나자 미셸은 버락의 출마에 기꺼이 동의했다. 그 이후로 미셸은 선거운동의 세부적인 일은 남편과 참모들에게 일임했다. 전략 회의에 참석하거나 연설문을 검토하거나 전화통을 몇 시간이나 붙들고 모금운동을 하는 일은 없다. “정치자금을 끌어오는 일을 진짜 혐오한다”고 미셸은 뉴스위크에 말했다. “정말 너무도 싫다. 끔찍하고 혐오스럽다.” 미셸은 진정한 정치와 정책을 좋아한다. 남편처럼 그녀도 돈벌이가 좋은 변호사직을 버리고 공직에 몸을 담았다. 민주당 당원대회가 열린 아이오와주에서 어느 날 늦은 밤 미셸은 유세 버스에서 잠을 자지 않고 뉴스위크 기자에게 정치에서 냉소주의의 위험에 관해 흥분하며 말했다. 버락은 녹초가 돼 자리에 앉아 반쯤 졸았다. 그렇다고 미셸 자신이 은근히 한자리를 원하는 건 아니다. 최근 한 기자가 버락이 대통령이 되면 그가 떠난 상원의원 자리에 출마하면 되겠다고 농담을 했다. 그러자 미셸은 가짜로 징그럽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어머나! 싫어요. 절대 사양하겠어요”라고 맞받아쳤다. 미셸 오바마의 매력 중 하나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 앞에 서는 힘든 유세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정상적인 인상을 풍긴다는 점이다(혼자서 유세할 때도 1000명 이상의 지지자가 몰린다). 정치인의 배우자치고 미셸은 약간 특이하다. 남편을 보며 멍청하게 미소나 짓고 짜인 각본에 그대로 따르는 그런 전통적인 내조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참모들을 달달 볶고 남편의 행동 하나하나에 참견하는 선거운동본부장 대리역을 하지도 않는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설을 하고 행사에도 참석하지만(집을 떠나 있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가 미셸의 아이들을 돌본다) 한 번에 하룻밤 이상은 집을 떠나 있으려 하지 않는다. 미셸과 버락은 하루에도 몇 번씩 서로 통화하지만 상승한 최근 지지도보다는 딸아이들 얘기가 주를 이룬다. 미셸은 열렬한 지지자들에 둘러싸여 끊임없는 주목을 받는 비현실적인 세계 속에 사는 남편에게 정상적인 삶이 무엇인지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맡았다. 오바마는 미셸을 “나의 반석”이라고 소개한다. 정신을 집중하도록 해 주고 흔들리지 않도록 해 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미셸 자신은 남편이 “정신을 차리도록” 해 줄 뿐이라고 말했다. 남편과 아버지로서 좀 더 평범한 책임을 수행하도록 이끄는 것도 그 한 가지 방법이다. 미셸은 버락이 어디에 있든지 딸아이의 발레 발표회와 사친회에는 꼭 참석하라고 다그친다. 시카고 하이드파크의 자택에서 정치 모임을 열었을 때 미셸은 모두에게 자녀를 데려오라고 부탁했다. 또 미셸은 딸아이들이 늘 밖으로 나다니는 아버지를 가까이 대할 수 있도록 인터넷 화상 대화가 가능한 맥북 랩톱 컴퓨터 두 대를 구입해 하나는 남편에게 하나는 딸아이들에게 줬다. 지난 14일에는 남편이 집에 와서 가족과 함께 밸런타인 데이를 지내도록 일정을 조정했다. 미셸이 선거운동의 세부적인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서 선거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절대 아니다. 미셸은 천성적으로 경쟁심이 매우 강하다. 학창 시절 미셸은 팀 경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셸은 버락만큼이나 백악관 주인이 되기를 원한다. 그녀는 선거운동의 일상적인 혼란에서 한걸음 물러선 참모들과 남편에게 평온함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한다. 한 고위 참모는 선거운동 초기에 남부 흑인 유권자들의 지지도가 생각만큼 빨리 오르지 않는다고 미셸에게 푸념했다고 돌이켰다. 미셸은 그에게 긴장을 풀라고 말했다. “걱정 마세요. 일리노이주에서 남편의 상원의원 선거운동 때도 그랬어요. 지지도는 반드시 올라가요.” 실제로 그녀의 말이 맞아떨어졌다. 미셸은 뉴햄프셔주 예비선거에서 예상 외로 패한 뒤에도 그와 비슷한 위로자 역할을 했다. 여론조사에선 버락이 힐러리 클린턴을 큰 차이로 앞선다고 나왔지만 개표 결과는 달랐다. 미셸은 풀 죽은 참모들을 격려하면서 선거전문가들이나 여론조사를 너무 믿지 말라고 당부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지지자에게 어느 하나라도 당연하게 우리 것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보내야 해요.” 그런 다음 미셸은 남편 다독거리기에 나섰다. 그날 밤 버락이 패배 인정 연설을 하러 연단에 오를 때 미셸이 그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지지자들이 환호하자 미셸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장내가 조용해지자 남편의 뺨을 부드럽게 두드려 주고는 연단을 떠났다. 아직은 정치 초보자인 미셸은 모든 말을 신중하게 하지 못한다. 그 결과 남편을 흉보는 신랄한 유머가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한번은 남편이 코를 골고 아침에 입냄새가 난다고 농담을 했다). 특히 사람들이 신문이나 잡지에서 그녀의 재담을 읽으면 그런 농담이 무례하게 들리기 쉽다. 최근 위스콘신주의 연설에서 미셸을 소개하는 한 젊은 여성이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말실수를 했다. “여러분, 차기 대통령을 소개합니다!” 미셸은 환하게 웃으며 연단으로 걸어나갔다. “승진해서 기분 좋은데요. 제 남편은 아마 이 소식을 아직 모를 겁니다. 오늘 저녁 뉴스에서 발표하죠. 우리 남편이 퍼스트 레이디가 될 겁니다.” 이제는 미셸이 자기 농담이 모두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자제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어쩌다 보니 내가 남편의 남성을 무력화하는 부인으로 희화화됐다”고 미셸은 뉴스위크에 말했다. “버락과 나는 그 얘기를 하며 웃는다. ‘버락 오바마의 남성을 빼앗아갈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나?’ 말도 안 된다.” 미셸을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녀를 침착하고, 느긋하며, 자신감이 넘친다고 말한다. “공적인 미셸과 사적인 미셸 사이에 구분이 없다”고 시카고대 법학 교수 데이비드 스트라우스가 말했다. 그는 시카고대 부속 랩 스쿨(오바마 부부의 딸들이 그 학교에 다닌다)의 운영위원회에서 미셸과 같이 활동한다. “가식이 전혀 없다.” 그러나 그런 자신감이 자연적으로 생긴 건 아니다. 현재 44세인 미셸은 끊임없는 자기 회의와 불안감에 시달렸지만 잘 극복했다. 능력과 출신 배경, 그리고 어떤 삶을 살아야 기대에 부응하는지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버락은 아버지를 잘 모르며, 안정된 가정생활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미셸은 시카고의 사우스사이드에서 양 부모가 다 있는 행복한 집안에서 성장했다. 어릴 적 살던 집은 벽돌 방갈로 내부의 침실 하나짜리 아파트였다. 지금 오바마 부부가 사는 165만 달러짜리 집에서 멀지 않다. 어머니 마리안은 전업주부로 미셸을 애지중지했다. 미셸의 친구들을 자주 불러 점심을 먹이고 아이들의 잡담을 잘 참고 들어주었다. 그러나 미셸 가족의 가정생활은 조용하면서도 성격이 강한 아버지 프레이저 로빈슨이 주도했다. 한때 뛰어난 운동선수였지만 20대에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았다. 그런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시청 수도국에 일하러 나갔다. 평생 민주당원인 그는 자신이 속한 선거구의 민주당 지부장이었다. 미셸의 아버지는 자녀들의 성취를 통해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특히 미셸의 오빠 크레이그를 자랑스러워했다. 크레이그는 뛰어난 농구선수로 성적까지 좋아 프린스턴대 장학생으로 뽑혔다(현재는 브라운대 농구 수석 코치다). 프레이저는 자녀들이 잘못을 해도 절대로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그냥 차갑게 노려보며 “실망했다”고만 말했다. 그 한마디에 미셸과 오빠는 대성통곡을 했다. “아버지를 절대로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고 미셸이 말했다. “실망시켰다는 말만 들으면 눈물을 펑펑 쏟게 된다.” 미셸은 오빠가 쉽게 성공하자 겁을 먹었다. “그 애는 자신에게 실망했다”고 미셸의 어머니가 뉴스위크에 말했다. “성적이 생각만큼 나오지 않으면 만회를 하려고 무지 애썼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도, 자기 오빠는 책을 팔에 끼고 다니기만 하면 시험에 붙으니 심리적인 충격이 컸다.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자신이 어느 정도 괜찮아도 그만큼 아니면 그보다 더 잘하고 싶어 하게 마련이다.” 미셸은 성적이 좋았다(초등학교 2학년을 월반했다). 하지만 1등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수 학생들의 명문대 진학을 돕는 상담관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프린스턴 같은 아이비리그는 크레이그 같은 학생들을 낚아채 간다”고 미셸이 말했다. “농구도 잘하고 똑똑한 시카고 사우스사이드의 흑인 학생 말이다. 오빠는 어느 대학이든 붙었다. 하지만 난 오빠를 잘 알았다. 공부하는 습관도 알았다. 그래서 ‘나도 할 수 있어’라고 생각했다.” 몇몇 교사는 미셸에게 내신도, 수능 점수도 아이비리그에 들어가기는 무리라고 말했다. 그래도 미셸은 프린스턴에 지원해 합격했다. 백인과 특권층 자녀들이 즐비한 프린스턴은 빈민가 출신의 흑인 여학생에게는 쉬운 곳이 아니었다. 공식적인 인종 장벽이 있지도 않았고, 흑인 학생들이 공식적으로 배제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백인 학생 중 다수는 흑인 급우들이 제 실력으로 합격한 게 아니라 어퍼머티브 액션(소수인종 배려 정책)의 수혜자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숨기지 않았다. 미셸과 프린스턴을 같이 다닌 앤절러 애크리는 학교도 그런 생각을 없애는 쪽으로 노력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흑인과 히스패닉계 학생들은 신입생 첫 학기가 시작되기 전 몇 주간 특별 수업을 들었다. 학교 측은 프린스턴 캠퍼스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는 학생들을 돕기 위한 수업이라고 말했다. 애크리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미국 동부의 명문 사립고를 나왔고, 미셸은 시카고에서 성적이 좋은 학생이었다. “학교 측이 우리가 정말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흑인 학생들을 한데 모으자’고 생각했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고 애크리는 말했다. 애크리, 미셸, 그리고 또 다른 흑인 학생 수전 애릴리는 단짝이 됐다. 그들은 교내 인종 격차를 자주 이야기했다. 특히 백인 급우가 잔디밭에서 마주쳐도 모르는 체하는 행동이 불쾌했다. “‘저기 흑인 아이가 오는군’이라는 식이었다”고 애크리는 말했다. 흑인 학생들은 교내 사교 클럽인 제3세계 센터에 모여 놀곤 했다. 반면 백인 학생들은 프린스턴의 식당에서 주로 놀았다. 미셸은 인종 간의 긴장을 예민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졸업반 사회학 리포트의 주제로 잡았다. ‘프린스턴 출신 흑인들과 흑인 사회’가 제목이었다. 현재 그 논문은 공개되지 않는다. 그러나 시카고 선타임스지에 따르면 미셸은 프린스턴이 “그 전의 어떤 곳에서보다 나의 ‘흑인 정체성’을 훨씬 더 많이 인식하게 했다”고 적었다. 또 편견이 없어야 할 캠퍼스에서 자신이 마치 외부 손님처럼 느껴졌다고도 썼다. “어떤 상황에서든 교내에서 백인들과 대화하면 그들은 늘 나를 먼저 흑인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는 생각은 그 다음이다.” (지금 미셸은 그 논문에 무엇이라고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는 듯했다.) 미셸은 그런 문제를 부모와 상의하지는 않았다. 부모는 대학에 간 자녀를 자랑스럽게만 생각했다. “그 이야기는 거의 꺼내지 않았다”고 어머니 마리안이 말했다. “얼마 전 기사에서 미셸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이 다르다고 느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미셸은 잘 극복했다.” 미셸은 자신이 어떻게 프린스턴에 입학했든 그럴 자격이 있다는 점을 입증하겠다고 결심했다. 결국 미셸은 과수석으로 졸업했고 하버드 로스쿨에 합격했다. 하버드에서도 똑같은 인종 격차를 느꼈다. 버나 윌리엄스와 미셸은 로스쿨 첫해에 친구가 됐다. 윌리엄스는 흑인 학생 중에 백인 급우들이 자신들을 자선 받는 학생으로 생각한다고 우려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돌이켰다. 그러나 미셸은 그런 학생이 아니었다고 윌리엄스가 말했다. “미셸은 자신이 어퍼머티브 액션의 특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미셸의 기억은 좀 다르다. 오바마 선거운동본부의 대변인은 미셸이 어퍼머티브 액션 때문이 아니라 오빠가 프린스턴의 장학생이었기 때문에 프린스턴에 들어가는 데 유리했다고 말했다. 프린스턴에 가족이 다닌 지원자들을 우선적으로 입학시키는 학교의 정책을 말한다. 또 참모들은 미셸이 하버드 로스쿨에 합격한 것은 프린스턴에서 성적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셸은 하버드에서 좋은 성적을 얻어 시카고의 저명 기업법 전문 법률회사 사이들리 앤 오스틴에 취직했다. 고액 연봉에다 승진이 보장된 상태였다. 하지만 업무가 따분했다(저작권과 상표 관련 사건을 맡았다). “그런 일이 좋아서 하는 사람이 회사에 별로 없었다”고 미셸은 말했다. “좋은 직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잠을 깨자마자 일하러 달려 나가는 직장이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 1989년 미셸은 버락 오바마라는 인턴사원을 배정받았다. 오바마가 아주 유능한 하버드 로스쿨 학생으로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하와이 출신이라는 소문이 사내에 떠돌았지만 별 관심이 없었다. 단지 “입바른 소리를 하는 흑인 청년”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오마바의 자신감에 미셸은 완전히 무장해제 당했다. 하루는 그가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데이트나 좀 합시다.” 미셸은 직장 상사로서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느 교회 지하실에서 열린 지역사회 조직화에 관한 자신의 강연에 초대한다는 말을 듣고는 경계심을 풀었다. 거기시서 버락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이상적인 세계”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데 관한 멋진 연설을 했다. 미셸은 홀딱 반했다. “‘아, 이 사람은 다른 남자들과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미셸은 돌이켰다. “친절하고, 재미있고, 멋지기도 하지만 정말 다른 남자들과 달랐다. 보기 힘든 진지함과 헌신적인 정신이 엿보였다. ‘무언가에 그처럼 깊이 느끼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셸은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 “사실 ‘결혼’이라는 말은 잘못됐다. 지워 달라. 그이가 청혼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두 사람은 자라면서 부족했던 점을 서로 채워주었다. 오바마는 미셸에게 자유롭게 생각하는 인생관을, 미셸은 버락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얼마 후 미셸은 버락을 가족에게 소개했다. 가족들은 버락이 마음에 들긴 했지만 결혼까지 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미셸은 아주 까다로웠다. 툭하면 남자들을 차 버렸다. 집안에서는 미셸이 버락도 곧 차 버릴 거라는 농담이 오갔다. “첫 걱정이 ‘이 친구가 과연 미셸에게 신랑감이라는 확신을 줄 수 있을까’였다”고 오빠 크레이그가 말했다. “이 친구가 과연 얼마나 버틸까?” 어머니 마리안은 버락이 조용하고 정중한 청년이었다고 기억했다.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하버드 로 리뷰지 편집장 선거에 출마했다는 얘기도 우리에게 하지 않았다. 그러니 버락이 실제로 얼마나 똑똑한지 알 길이 없었다.” 미셸은 버락을 만난 지 얼마 못 가 개인적으로 위기를 맞으면서 인생을 어떻게 살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1991년 아버지 프레이저가 다발성 경화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그 즈음 절친했던 대학 친구 수전 애릴리가 임파종으로 사망했다. 미셸에게는 애릴리의 자유로운 정신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부모의 뜻에 착실히 따르는 미셸과 달리 애릴리는 삶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세계를 널리 여행했다. 애릴리의 장례식이 끝난 뒤 미셸은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넉 달 뒤에 죽는다면 그동안을 이렇게 살고 싶을까?” 미셸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직장생활의 “자동화된 길”에 그냥 올라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류 대학을 나왔는데 도대체 뭘 하고 싶은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미셸은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화가 났다. ‘이게 교육이 아니다. 돈을 벌고 일류대 학위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 무엇을 돌려주고, 열정을 찾고, 그 열정이 자신의 삶을 이끌도록 하는 점에 관해선 뭘 배웠나?’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미셸은 법률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이 자란 동네 청소년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돈을 못 벌어 거금의 학자금 융자금을 갚지 못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버락은 결혼해서 소득을 합친다면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미셸을 안심시켰다. 미셸은 자선단체와 구호기관에 구직 편지를 보냈다. 그중 하나가 리처드 데일리 시카고 시장의 비서실 차장 밸러리 재릿의 책상에 떨어졌다. “미셸을 면접했는데 자기 소개에만 한 시간 반이 걸렸다”고 재릿이 뉴스위크에 말했다. “면접이 끝난 뒤 같이 일하자고 제의했다. 사실 그 결정은 시장의 몫인데도 내가 월권을 했다. 미셸은 자신감과 헌신적인 생각, 열린 마음을 갖고 있어서 놓칠 수 없었다.” 미셸은 즉석 제안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는 게 올바른 결정인지 회의가 들었다. 미셸은 먼저 버락에게 재릿을 만나 상의해 보라고 했다. 현재 오바마 선거운동본부의 수석 보좌관으로 일하는 재릿은 미셸의 정신적 스승이 됐다. 시청 부서 간의 관료주의 때문에 교착상태에 빠진 일들을 미셸에게 맡겼다. 흥미진진한 일은 아니었고, 법률회사보다 급여도 훨씬 적었다. 그래도 미셸은 공직에서 새로운 경력을 시작하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다. 시청에서 약 2년을 일한 뒤 미셸은 버락의 인도로 지역사회 운동에 한걸음 더 다가갔다. 버락은 ‘공공연맹’이라는 신생 단체에서 활동했다. 청소년들에게 공무원이 되도록 장려하는 비영리 기관이었다. 미셸이 자신은 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런 도움이었다. 그래서 그 단체의 시카고 지부장을 맡았다. 시청에서 일할 때보다 급여도 더 적었다. “아주 불안한 일자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소명의식을 느꼈다. 나는 처음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헌신해야 할 분야야. 반드시 내가 해야 해.’” [미셸은 직장을 옮길 때마다 감봉을 당했다고 농담했다. 오바마 부부는 버락의 자서전 ‘담대한 희망(Audacity of Hope)’이 베스트 셀러가 된 뒤 겨우 빚더미에서 벗어났다.] 그 뒤 미셸은 시카고대 메디컬 센터의 의사들을 지역사회 병원과 빈민 지역 진료소에 내보내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시카고대의 일은 연봉 약 27만5000달러로 공공 서비스 일자리보다 급여가 훨씬 나았다). 지난가을 미셸은 휴직을 하고 선거운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퍼스트 레이디가 되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 요즘 미셸이 늘 받는 질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구체적으로 답변할 엄두를 못 낸다. 미셸은 직장과 가정 사이의 균형을 잡아야 하는 여성들의 문제, 경제적 여유가 없는 학생들의 대학 진학을 가로막는 장벽 낮추기 등에 관심이 있다.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일은 끝이 없다”고 미셸은 말했다. “그러나 백악관에 가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얼마나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미국의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어떤 일에 집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말이다.” 만약 대선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딸아이들이 워싱턴에 잘 정착할 수 있을 때까지는 자신은 아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버락이 상원의원에 당선됐을 때는 워싱턴으로 이사하지 않았다). “딸아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할까?”라고 미셸은 자문했다. “아이들이 백악관과 공적인 생활, 새로운 학교와 새로운 도시에 잘 적응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만약 그 아이들이 잘 적응하지 못한다면 내 일을 줄이겠다. 딸아이들이 새로운 생활에 안정되게 적응하도록 하는 일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미셸은 선거운동본부에서 정책과 관련해 맡은 공식적인 역할이 없다. 그러나 버락이 잘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흑인들의 두려움을 직접적으로 어루만지는 데 곧잘 동원된다. 올해 초 버락의 참모들은 일부 흑인 유권자가 흑인 대통령이 나올 수 있다는 데 확신을 못하는 듯하다고 걱정했다. 그러자 미셸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로 내려가 그들을 안심시켰다. 비행기를 타고 가던 중 연설문을 검토하면서 한 가지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신이 잘 아는 흑인이 돈을 모아 새 가구를 샀지만 아까워서 플라스틱으로 싸 두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자멸적이다. “가구를 둘러싼 플라스틱이 누렇게 변색되고, 때론 거기에 다리를 긁히게 됩니다”라고 미셸은 청중에게 말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우리가 현실의 벽에 부닥쳐 실망할까 봐 우리를 보호해 주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또 미국의 현실이 버락 같은 멋진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택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두려워합니다. 때로는 시도해서 실패하기보다는 아예 시도를 하지 않는 게 나은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셸은 흑인 청중에게 위험을 감수하라고 촉구했다. 미셸이 참모들에게 불쾌감을 표한 적도 있다. 후보자 토론회 중 한 회가 끝난 뒤 오바마의 참모들이 회의실에 모여 전략을 논의했다. 미셸이 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러 말은 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좋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전했다. 힐러리 클린턴이 자신의 지지자들로 청중을 채워 버락이 힐러리를 공격할 때마다 야유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미셸은 전략가들에게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명했다. “전략가가 최고의 전술이 무엇인지 말해 주는 것 이상이었다”고 그 회의에 참석한 한 고위 참모가 말했다. “아내로서 ‘내 남편이 그런 일을 다시는 겪지 않도록 하라’는 명령이었다.” 선거운동이 오랫동안 계속되면서 미셸의 일거수일투족이 도마에 오른다. 이제 미셸도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어서는 곤란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특히 기자들 앞에서 그렇다. 최근에는 ABC 뉴스의 인터뷰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관련해 모호한 입장을 밝혀 빈축을 샀다. 당시 미셸은 힐러리가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면 그녀를 지지할지 묻는 질문에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미셸은 그 인터뷰가 힐러리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을 삭제하고 그 부분만 방송됐다고 주장했다). 사실 미셸은 힐러리가 퍼스트 레이디로서 이룬 업적에 경의를 표한다고 칭찬한 적이 있다. “이건 내가 여태껏 배우지 못한 것”이라고 미셸은 말했다. “생각을 그대로 입 밖에 낼 수 없다는 말이다. 두서 없이 이야기했다가는 앞부분만 잘라내 왜곡해 버린다.” 뭔가를 아는 정치인처럼 미셸은 자신의 이야기를 언론을 거치지 않고 직접 유권자들에게 호소하려고 한다. 유세를 할 때 미셸은 자신과 남편이 아직 백악관 주인이 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반박하려고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활용한다. 한번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미용실에서 만난 열 살짜리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했다. 그 아이는 미셸에게 만약 버락이 대통령이 된다면 “내가 어떤 일도 상상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라고 말했다. 그 이야기가 바로 자신의 삶과 같다고 미셸은 말했다. “그 아이가 나였을 수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기 이 자리에 서 있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통계학적으로 볼 때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시카고 사우스사이드에서 성장한 흑인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프린스턴에 갈 수 있었을까?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버드 로스쿨은 내겐 올라가지 못할 나무니 쳐다보지도 말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해냈습니다. 그것도 아주 잘. 그럼에도 나는 이 자리에 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그럴까요?” 미셸 오바마에게 어떤 의구심이 남아 있든 일단 백악관에 들어가면 그 회의를 잠재우는 데 큰 도움이 될 듯하다.

With SARAH KLIFF, KAREN SPRINGEN and ROXANA POPES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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