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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민족과 싸우며 힘 키웠다

다른 민족과 싸우며 힘 키웠다


뉴욕 한인 중에는 청과물 가게 등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이 많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은 전 세계 어느 소방서에서나 금기어로 통한다. 물론 예외는 있다. 뉴욕시다. 뉴욕시 퀸즈보로(區) 소방서는 올 3월 화재신고 접수와 동시에 소방차를 출발시키는 방법을 써서 출동시간을 24초나 줄였지만 돌아온 것은 소방공무원노조의 비난이었다.

그 기간 발생한 화재 2건이 인명사고로 연결된 게 소방차가 빨리 출발했기 때문이라는 것. 100여 개국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온 이민자들이 영어에 능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방관들이 이를 잘못 알아들어 엉뚱한 곳을 향했다는 게 노조의 주장이었다. 그만큼 뉴욕시에서 이민자들은 중요한 인적 자원이다.

그러나 그동안 뉴욕 이민자들의 특성에 대한 연구는 극히 적었다. 그나마도 특정 국가나 민족의 특성을 미국의 특성에 접목하는 선에 그쳤다. 뉴욕타임스는 9월 5일 메트로섹션 2면 대부분을 할애해 민병갑(66) 뉴욕 시립 퀸즈칼리지 사회학과 교수의 신간 『경제적 생존을 위한 민족 결속(Ethnic Soli darity for Economic Survival)』을 크게 소개했다.

민 교수는 서울대 사학과를 1970년 졸업, 코리아헤럴드 기자를 거쳐 72년 도미했다. 민 교수는 조지아주립대 연구원 생활을 거쳐 87년 퀸즈칼리지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민 교수의 신간이 주목 받은 이유는 이민자들의 사업형태로부터 이들의 경제적 성공요인과 정체성 확립 과정을 설명한 독특한 논리 때문이다. 이번 저서는 흑인들의 폭동이 한인과 흑인 간의 유혈사태로 번진 1992년 ‘LA 폭동’을 추적한 『가운데에 낀 한인(Korean cut in the Middle)』의 후속편이다.



다른 민족과의 갈등이 성공요인

민병갑 교수가 꼽은 재미동포 성공요인
■ 단점을 장점으로 바꾼 강한 생존력
■ 언어장벽이 오히려 자영업자들 양산
■ 도매상인 백인과 고객인 흑인과 갈등하며 단결
“뉴욕의 한인은 생업을 이어가는 와중에 건물주이자 도매상인 백인들과 갈등하면서 성장했고 고객이던 흑인들과의 갈등을 거쳐 이제는 종업원인 히스패닉과의 갈등을 겪고 있다. 이런 민족 간의 갈등을 통해 한인들은 경제력 신장과 정체성 확립을 일궈냈다. 이런 과정에서 민족적 정체성이 확립됐고 업종별 협회를 조성해 앞서 나갔다.”

민 교수는 뉴욕 한인사회의 대표업종인 청과상들의 성장과정을 통해 이러한 이론을 도출해 냈다. 민 교수는 설문 대상 한인 277명 가운데 자영업자 66명을 심층 인터뷰했다고 밝혔다. 재미동포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가장 큰 발판은 공동체의 강한 결집력이다. 민 교수는 이런 결집력의 원인을 자영업을 하면서 부닥치는 인종 간 갈등에서 찾는다.

민 교수 이론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 이후 한인과 흑인 간 갈등이 깨끗이 사라진 것은 ▶기타 아시아 이민자의 청과업계 진출이 늘어 한인들이 표적에서 벗어났고 ▶한인 2세가 가업 대신 전문직을 택해 청과상 수가 줄어든 데다 ▶시 정부가 할렘 등 흑인 거주지역에 대형 식품점을 허용하면서부터다.

그러나 이와 정비례해 한인 공동체의 결속력도 2000년대 들어 급속하게 약해지고 있다는 게 뉴욕타임스의 분석이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한인 2세들이 공동체에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민 교수는 “청과협회가 매년 한가위 잔치에 50만 달러(5억5000만원)를 들이고 공동체 장학금이 수십 개에 달하는 것이 한인 공동체의 장점이었다”며 “1965년 이후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세의 54%가 타 민족과 결혼하는 것에서 보듯 공동체 약화 조짐이 뚜렷하다”고 말했다.

1960년 뉴욕의 한인 동포는 불과 400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이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컬럼비아대학 유학생이었다. 그러다 65년 미 정부가 이민규제를 완화하면서 점차 늘어났다. 한국인의 미국 이민은 87년 크게 늘었지만 92년 LA폭동 여파와 한국 경제력 신장으로 점차 하향세를 보였다. 다시 이민자가 크게 증가한 계기는 98년 한국은 물론 아시아 전체를 덮었던 외환위기였다.

2000년 센서스 조사에서 한인은 17만500명으로 집계돼 30년 새 크게 늘었다. 뉴욕을 제2의 고향으로 결정한 한인 이민자들은 대개 자영업을 하거나 현지 한인 업체에 취업하게 된다. 특히 자영업자 비율이 24%로 크게 높다. 이는 그리스계, 이스라엘-팔레스타인계(27%)에 이어 3위다.



영어 서툴러 자영업 비율 높아

“아시아 국가에서 오는 이민자들이 영어에 능통한 비율은 필리핀이 70%로 가장 높고 인도와 기타 국가 출신도 상당히 높은 편이지만 한인 이민자의 영어 능통 비율은 19%에 불과하다. 미국에서 영어를 못하면 찾을 수 있는 직업의 범위가 좁혀지는 것은 상식이다. 한인 업체가 아니면 자영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중반까지 뉴욕에서 한인들이 주로 종사한 업종은 청과업, 가발업, 피혁업이었다. 그중 가장 일반적이었던 청과업은 우리가 생각하는 도매상이 아닌 소매업이다. 매장도 대부분 한국의 일반 과일가게 정도 크기로 비교적 영세했다. 그러나 뉴욕의 비싼 임대료와 생활비를 놓고 보면 작더라도 자영업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자본력이 필요하다.

현재 미국의 투자이민 액수는 100만 달러(11억원)다. 뉴욕시에서도 경제력이 위축된 브루클린 일부를 포함해 정부가 지정한 일부 지역의 경우 50만 달러(5억5000만원)로도 가능하지만 이 또한 적지 않은 액수다. 뉴욕 한인 청과상들은 도매상을 선점한 유대계와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의 노골적인 인종차별과 텃세를 딛고 일어서야 했다. 결국 1974년 뉴욕 한인 청과상들은 한인생산협회(Korean Produce Association)를 만들었다.

협회는 80년 브롱스 도매상가 헌츠포인트마켓에 서비스센터를 열어 소규모 청과 및 식품점 운영자들과 대형트럭 운전사들의 쉼터를 조성하기도 시작했다. 82년 뉴욕시는 KPA를 비영리단체로 인정했다. 한인이 자영업을 통해 다른 아시아계(일본 제외)보다 비교적 빨리 아메리칸 드림을 거머쥔 데는 한민족 특유의 성실함이 큰 힘이 됐다.

이들은 가게 문을 오전 7시30분에 열고 밤 11시까지 일했다. 가족 외에 종업원도 없었다. 휴일도 없었다. 가게를 7시30분에 열려면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우범지대로 손꼽히는 브롱스의 도매상가인 헌츠포인트마켓에서 물건을 떼 와야 했다. 뉴욕타임스는 청과상을 노동집약적 사업이라고 정의하며 “한인 청과업자들은 아이들의 자는 얼굴밖에는 볼 수 없었다”고 표현했다. ‘잠든 아이 얼굴 보기’는 세계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는 한민족 부모들의 숙명이다.

전화 인터뷰 민병갑 교수
“한인들도 부동산·금융업 진출해야”


-집필 계기는.
“이민자들의 발전은 민족 단결력의 문제라기보다 업종 형태에 따라 겪는 타 민족과의 갈등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요지다. 단순히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가 이민자 사회 단결력의 원천이라는 얘기를 한 것이다.”



-그리스계나 이스라엘계 미국 이민자의 자영업 비율이 더 높은데 왜 이들은 민족 간 갈등을 통해 성장하지 않은 건가.
“먼저 통계에 잡히지 않는 한인이 많다. (한인은) 3%포인트 차이로 3위인데 설문대상에서 부부가 함께 사업을 하는 부분까지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자영업자 비율은 43%가 맞다. 센서스(인구통계)에 아예 등록되지 않은 숫자도 많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타 민족을 대상으로 영업하기 때문이다. 건물주나 물건을 공급받는 도매상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중국계를 예로 들면 건물주, 도매상, 고객 모두가 중국계인 경우가 많다.”



-최근 뉴욕시가 저소득층도 신선한 청과를 살 수 있도록 가판대를 늘리는 ‘그린카트 조례’를 제정했다. 청과협회는 이를 반대하고 로비도 벌였는데 이는 집단이기주의로 비칠 수도 있지 않나.
“물론 그런 부분도 있다. 하지만 법안의 뒤편에서 부동산업자와 개발업자인 유대계가 이득을 보고 있다. 해당 지역 이웃도 반대했다. 지역마다 특유의 문화가 있는데 이것이 깨지는 것 아닌가. 대형 유통업체들이 들어설 때 영세상인들이 반대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뉴욕 한인들의 주력 사업이 네일살롱과 세탁소로 이동했다. 이후에는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것으로 보는가.
“우리가 중국계보다 떨어지는 것이 부동산 투자다. 우리는 가게를 먼저 열고 중국계는 부동산을 먼저 산다. 이 부분도 최근 10년 동안 놀랍게 성장했다. 부동산을 비롯해 이와 연관된 보험, 금융 같은 서비스 업종으로 나가야 한다. 미국 사회가 그렇게 움직여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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