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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새는 구멍은 무조건 막아라

돈 새는 구멍은 무조건 막아라

기업 회생 스토리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최악의 순간에서 과감한 조치들이 신속하게 취해졌다는 사실이다. 생존의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지옥에서 천당으로’의 대역전을 만들어 내는 비결이다. 어영부영하다가는 끝장이다. 이코노미스트는 국내외 기업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회생한 그 순간을 포착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 ‘위기의 순간, 대반전’을 연재한다.
샘 팔미사노 현 IBM 회장(왼쪽)과 루이스 거스너 전 IBM 회장.

주주총회가 열리는 플로리다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은 루이스 거스너 IBM 회장은 초조했다. 1993년 4월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잔인한 달이었다. 그때까지 IBM은 아홉 분기 연속 적자를 내고 있었고, 한때 170달러를 돌파했던 주가는 48달러로 곤두박질해 있었다.

성난 주주들은 신임 회장을 혼내주겠다고 벼르며 플로리다로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주주처럼 보이는 한 사람이 장내로 뛰어들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난 IBM에 속아 왔다!’주총에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참을 고민하던 거스너가 외쳤다.

“세상을 바라보는 장소로 책상만큼 나쁜 곳은 없다.” 그는 달력에 빼곡하게 스케줄을 써 넣은 다음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토론해봐야 뾰족한 수 없을 걸

CFO인 제롬 요크도 전 세계 사업장을 돌아다녔다. 두 달 내내 발품을 판 요크는 거스너에게 충격적인 보고를 했다. 55%에 달하던 영업이익이 45%로 떨어져 있었다. 이유는 더 기가 막혔다. 영업비용이 경쟁사보다 11%나 더 지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거스너와 요크는 즉각 11개 분야에 걸쳐 30개가 넘는 비용 절감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거스너는 이 프로젝트에 전 직원이 동참하라고 소리쳤다. 지시를 무시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 누구라도 해고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해당 부서원들이 얼마나 비용을 쓰고 있는지 발표하는 동안 요크는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렸다. 심지어 그 자리에서 비용 절감 방안을 내놓고 해당 부서로부터 그대로 실행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볼멘소리를 하는 부서장들도 있었지만, 거스너는 “3년 안에 최대 70억 달러의 비용을 줄여야 한다”며 그들의 입을 막았다. 거스너는 ‘토론은 얼마든지 하라. 그러나 아마도 이것 말고 다른 대안은 없을 것’이라는 식으로 밀어붙였다. 거스너는 나락으로 떨어진 주가를 다시 끌어올리려면 회사를 월 스트리트 기준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임원들의 출퇴근 시간부터 뜯어고쳤다. 그때까지 IBM은 오전 9시 출근 오후 5시 퇴근이었는데, 이것은 거스너가 보기에 월 스트리트의 패턴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거스너는 자신은 물론 이사들의 시간표부터 바꾸었다. 그들은 이르면 새벽 5시에라도 나와 신문을 보고, 해외지사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을 샅샅이 훑어보며 9시 반 뉴욕증시가 개장될 때까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거스너는 미국에서만 4만 명, 해외지사에서 3만5000명을 내보내기로 이사진과 합의했다. 그것은 IBM의 전통 같은 ‘종신고용 원칙’을 폐기하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엄청난 규모에 비해 결단은 빨랐다. 전임 회장 에이커스처럼 단계적인 감원이 아니라 일시에 이루어졌기에 충격이 컸다.

당시 거스너는 이렇게 위로(?)했다. “한 번 크게 얻어맞는 것이 계속 이마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고문보다 덜 고통스럽다.” 위로를 했는지 모르지만 위로금은 후하지 못했다. 고작 26주치 월급과 6개월치 의료보험료를 떠나는 직원의 손에 쥐어줬을 뿐이다.
에이커스가 2년치 월급을 주었던 것에 비하면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거스너는 에이커스의 그런 지나치게 후한 위로금이 IBM에 재앙을 가져왔다고 여기고 있었다. 너무나 빠른 속도로 이뤄진 감축이라 쫓겨나는 직원들은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임신 8개월의 한 여직원은 코카콜라 애틀랜타지사를 고객으로 유치한 성과로 포상금을 받은 지 5일 만에 해고됐는가 하면, 심지어 병원에 입원한 어느 직원은 뇌종양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해고통지서를 읽지도 못했다.

남은 직원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임금인상은 억제되고 이전의 풍족했던 복리후생비는 기대할 수 없었다. 한 순간에 IBM은 자신들이 알던 IBM이 아니었다. 떠난, 혹은 남은 직원들에게 거스너는 저승사자처럼 보였겠지만 거스너의 눈엔 이전의 IBM이 지옥으로 가는 줄도 모를 만큼 자만했던 것으로 보였다.

거스너와 요크는 효율이 떨어지는 곳을 색출해 냈다. 내부거래 시스템이 딱 걸렸다. 고객서비스 부서가 부품부서에서 부품을 구입하는데 그 구입가를 매번 협상하는 식이다. 회사 전체 손익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불필요한 협상을 하느라 시간과 비용만 낭비하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지사별 실적이 왜곡되고 있는 것이었다. 예컨대 IBM 일본지사가 현지 판매에서 적자를 보았을 경우, 생산한 부품을 본사에 비싼 값에 떠넘겨 손익을 맞추는 식이다. 요크는 이런 말도 안 되는 회계 시스템을 즉각 수정했다. 당시 요크는 “실적을 못 내는 지사나 사업 부문은 그만큼 월급도 줄어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 번 크게 얻어맞는 게 낫다

거스너와 요크는 해외지사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심지어 보고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4주마다 보고해야 할 손익대조표가 6주가 지나도 도착하지 않았다. 2주는 손익이 뒤바뀌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화가 난 요크는 아무리 사소한 물건을 구매하더라도 회계부서에 다 보고하도록 했다.

거스너는 마케팅 혁신을 위해 리처드 토먼을 퍼스널 시스템스 그룹 책임자로 영입했다. 토먼은 컴퓨터는 잘 몰랐지만, 탁월한 기업 투시력으로 얼마나 인력과 비용이 낭비되는지를 간파했다. 그는 부서통합을 추진했다. 예컨대 PC사업 부문에만 여섯 개의 연구소가 있었는데 중복되는 연구로 낭비되는 돈이 매년 수백만 달러에 달했다.

토먼은 미국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연구소를 하나로 통합했다. 이어 토먼은 ‘싱크패드’라는 브랜드만 남기고 모든 PC 사업을 정리했다. 소비자가 잘 외우지도 못하고, 심지어 자동차 모델명이 아니냐는 소리까지 듣는 PS/1, 앰브러, PC300 같은 브랜드를 모두 시장에서 철수시켰다.

오스틴 사업장에서 올라온 빌 애밀리오는 PC 사업조직 재정비를 추진했다. 애밀리오는 3500개에 달하는 PC 사업 부문의 모든 제품을 깨알같이 적어놓은 홍보책자부터 전부 폐기시켰다. 거스너는 IBM에서만 30년을 근무하고 은퇴한 샘 앨버트를 만났다. 난국을 타개할 아이디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앨버트가 말했다.

“IBM은 컴퓨터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쓰던 용어를 아직도 그대로 사용한다. 그것은 최첨단 기계의 성능을 마력으로 표시하는 것처럼 어색한 일이다.”

거스너는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도 얼마 전, 연구소를 시찰하다가 한 연구원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전문용어로 한참을 설명하는 것을 예의상 듣고 왔던 터였다. 앨버트의 지적은 결국 IBM이 자만에 빠져 시대에 뒤떨어지고 고객으로부터도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거스너는 지사를 돌며 고객들과도 대화를 나누었다. 문제는 심각했다.

IBM의 영업자들은 많았지만, 정작 고객에게 신제품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업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 고객으로부터 “HP나 컴팩은 제품 흥정에서 설치까지 2주면 충분하지만 IBM은 두 달 안에 담당자와 통화만 해도 아주 운이 좋은 것”이라는 치욕적인 얘기까지 들어야 했다.

거스너는 각 사업장에 “한 달 안에 우수 고객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해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유럽의 지사들로부터 시간이 촉박하다는 답변이 들어오자 진노하며 “기한까지 내 책상에 명단을 가져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더 이상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거스너는 취임하자마자 이사진을 교체했다. 당시 이사들 중에는 전임 회장 에이커스와의 친분으로 뽑은 사람과 다른 회사 CEO로 있다가 은퇴 후 온 이들이 여럿 있었는데 대부분 IBM이 추구해야 할 첨단 기술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거스너는 전문성을 갖춘 새 이사진에게 비(非)핵심 사업 부문을 솎아내도록 했다.

이사진은 금융 자회사인 IBM 크레디트 코퍼레이션을 우선 지목했다. 고객이 하드웨어 장비를 할부로 구입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자회사인데 가뜩이나 좋지 못한 자금 흐름을 악화시키는 주범이었다. 하지만 거스너는 이를 살려두기로 했다. 나중에 IBM이 대형 고객을 유치할 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란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대신 방위사업 자회사인 페더럴 시스템스 컴퍼니는 매각을 결정했다. 이 회사는 미 연방항공국으로 25억 달러에 달하는 시스템 업그레이드 작업을 수주해 놓은 상태였지만 IBM의 장기적 성장 관점에서 비 핵심사업으로 분류한 것이다. 오히려 당시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었기에 서둘러 팔아치웠다.

거스너는 이처럼 장기적으로 IBM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사업들로 구조조정의 가닥을 잡았다. 거스너는 IBM의 브랜드 이미지가 실추되고 조롱당하고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거스너는 애비 컨스탬을 부사장으로 임명하고 전 세계에서 진행되던 광고를 혁신하라고 지시했다. 컨스탬은 특단의 해결책을 제안했다.

각각의 제품에 대한 광고를 수십 개의 광고대행사에 맡겼던 것을 하나의 광고대행사에 전담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광고업계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컨스탬은 IBM의 모든 광고를 도맡아 줄 대행사를 조용히 수소문했지만, 이미 내로라하는 광고대행사들은 이미 수 주 전에 돌입해 있었다. 결국 마이크로소프트의 광고를 맡고 있던 오길비 앤 매더가 낙점됐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까

오길비는 마이크로소프트와 계약을 파기해야만 했다. 경쟁사 광고를 맡을 수 없도록 돼 있었기 때문이다. 오길비가 잘나가는 마이크로소프트를 포기하고 추락한 IBM을 선택한 이유는 5억 달러라는 엄청난 수주 금액 때문이다. 실제로 ‘뉴욕타임스’ 1면에 ‘광고업계 최대 계약’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오길비의 북미지역 총괄책임자인 셸리 레저러스가 빌 게이츠를 만나 “더 이상 마이크로소프트의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빌 게이츠는 “혹시 우리 회사와 무슨 문제가 있었느냐”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반문했지만, 그것은 ‘IBM 같은 회사의 일을 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를 버리느냐’는 의아함을 표시한 것이었다.

빌 게이츠가 불쾌했던 만큼 거스너에겐 통쾌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광고를 한 대행사에 몰아주겠다는 파격적인 아이디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광고 제작에 앞서 시장조사를 한 결과 IBM의 이미지는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나빴다. 심지어 조사기관에서 “응답자들의 IBM에 대한 반감이 너무나 커 조사를 더 이상 진행하기 힘들다”는 얘기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그럴수록 국면을 확실하게 바꾸어 줄 파격적인 광고가 절실했다. 거스너가 정해둔 마감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이렇다 할 대안을 못 내놓던 오길비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IBM의 인지도 자체가 아닌 ‘IBM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자는 것이었다. 수녀들을 등장시켜 영어가 아닌 체코어로 IBM PC를 소개하는 파격적인 CF는 바로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이 CF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특히 광고 마지막 부분에 들어간 문구는 이전의 ‘잘난 체하고 오만한’ IBM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처음엔 ‘컴퓨터로 세계가 좁아지고 있는 시대에 컴퓨터 사용자들이 겪는 고통을 해결해 주는 기업이 되겠다’는 의미를 담아 ‘작은 세상, 그 해답’이라는 문구를 광고에 덧붙였다.

그것을 거스너가 ‘세상의 해답’으로 최종 수정해 내보냈다. 기술이 뛰어나다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겸허한 기업정신으로 일한다는 느낌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IBM은 4년 후인 1997년 미국 내에서 매출액 기준 6위에 랭크됐고, 주가는 사상 최고치인 177달러를 넘어서기도 했다.

숫자로 본 IBM 위기탈출 순간


48
달러 = 한때 170달러를 돌파했던 IBM 주가는 1993년 4월 주총 당시 48달러로 폭락했다.


2300
명 = 주주총회장엔 평소의 3배가 넘는 주주들이 무능한 경영진을 벼르고 있었다.


45
% = 55%에 달하던 전 세계 IBM 사업장의 영업이익률은 무려 10%나 빠져 있었다.


11
% = 영업비용이 통제되지 않아 경쟁사보다 11%나 과다지출되고 있었다.


30
개 = 거스너 회장은 11개 분야에 걸쳐 30개가 넘는 비용절감 프로젝트를 즉각 추진했다.


70
억 달러 = 3년 내 70억 달러의 비용을 절감한다는 목표를 잡았다.


5
시 = 거스너는 오전 9시 출근하던 임원들을 새벽 5시에 출근하도록 했다.


8
만 명 = 미국 내 4만~5만 명, 해외 사업장 3만5000명 이상을 정리해고하기로 했다.


26
주치 = 2년치 월급을 주던 퇴직 위로금을 26주치로 삭감해 지급했다.


6
개월 = 직원 업무평가 등급을 상·중·하로 나눠 ‘하’를 받은 직원은 6개월 정직에 처했다.


20
일 = 전 세계 사업장에 20일 내에 우수고객명단을 작성해 제출토록 했다.


5
억 달러 = 전 세계 수십 개 광고대행사에 맡겼던 광고를 오길비에 몰아줘 경쟁사 MS를 따돌렸다.
플러스

3억8200
만 달러 = 92년 4분기 54억 달러의 적자를 냈던 IBM이 93년 4분기에 흑자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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