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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기밀문서 빼내 박 의장 설득”

“日 기밀문서 빼내 박 의장 설득”


최고회의 경제고문 시절의 야심만만했던 김용태 전 장관. 경제재건 앞에는 거침이 없었다.

일각에서는 울산을 공업단지로 결정하는 과정에 울산이 고향인 이후락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영향력이 있었던 게 아니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그는 4·19 이후 민주당 정권에서 이른바 300호실로 불린 중앙정보위원회 책임자로 있다가 5·16 직후 혁명주체들의 성분을 은밀히 분석해 미국 측에 제공한 것이 드러나 구속됐었기 때문에 공단 결정에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물론 석방된 후 그는 미국 측 주요 인사들의 강력한 부탁으로 최고회의 공보실장이 되어 박 의장 곁에 머물게 되지만 그랬더라도 혁명주체도 아닌 인물이 국가적인 대형 프로젝트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그 시점의 상황으로도 맞지 않고 내용적으로도 거리가 멀다.

이미 언급한 대로 울산공업단지는 남궁연 사장이 제공한 자료를 김용태 고문이 받아들여 최종적으로 박 의장이 동의함으로써 결정된 것이다. 어쨌든 기공식 날 축하 리셉션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혁명정부의 경제고문이 유솜(USOM: 주한미원조사절단) 처장의 멱살을 움켜쥐고 육박전을 벌였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김용태 고문의 행동은 리셉션장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김 고문의 회고를 직접 들어보자.

“그땐 어떡하든 킬렌(당시 유솜 처장) 이놈한테서 잘못했다는 항복을 받을 생각으로 멱살 잡고 끌고 나가던 판국이니까 나도 몰랐는데 조상호씨가 화급히 달려온 거여.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만 해도 아직 경호실 제도가 확립되지 않았을 때라 박 의장의 경호는 박종규 소령이 맡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뛰어가려고 하니까 박 의장이 막아섰지. 그때 조상호씨가 의전비서관 아니여? 나중에 체육부 장관도 했지만. 박 의장이 조 비서관한테 ‘외국 사신들이 보고 있는데 자알한다, 어서 말려!’

그래가지고, 내가 킬렌을 바닥에 내동댕이쳐서 짓밟으려고 하는데 조 비서관이 달려왔단 말이여. 겨우 참았지만 킬렌이 공단 만들 돈 있으면 미국 제품이나 사먹으라는데 분이 안 솟구쳐? 물론 킬렌은 당시만 해도 정말 막강했지요. 미국 원조기관의 대장 아니오. 그 친구가 안 된다면 원조는 끝이야. 그랬기 때문에 나로서는 더 심하게 했던 거여. 어설프게 항복 받아가지고는 뒷감당하기도 어렵거든. 그럴 땐 아예 반쯤 죽여 놓을 정도로 항복을 받아야 된단 말이야, 하하하.

그런데 인연이라는 게 이상한 것이, 나중에 월남 파병되고 할 때 내가 국회 국방위원만 17년 했지만 박 대통령 특명을 받고 월남에 갔더니 그 친구가 거기서 미국 대외원조기구(AID) 처장을 하고 있잖아. 그동안 안 보인다 했더니 말이야, 하하하. 거기서 날 보고 큰절을 해야겠다고 그러데. 울산공업단지 할 때 자기가 실언한 게 지금도 죄책감을 느낀다고. 하여간 울산공단 만드느라고 참 별의별 일들이 다 있었어.”

울산공업단지가 그저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어쨌든 경제인협회 부회장이었던 이정림 전 대한유화 회장도 공단을 만든다는 계획 앞에서 넋을 놓고 있었다고 했을 정도로 시작은 아무런 대책이 서지 않더라고 했다. 자신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학자라는 사람들도 의견을 구하면 꿈같은 소리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김 고문을 만나 ‘꿈꾸지 말라고 하는데…’라고 얘기하면 ‘잠잘 시간이 없어서 꿈꿀 시간도 없다’고 되받아 고함을 지르면서 ‘불모지이기 때문에 우리가 나서는 것 아니냐, 반드시 해야 한다’며 의지를 꺾지 않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했다.



‘너 미친놈 아니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전용비행기가 없어 군용 ‘비바’를 타고 다녔다. 박 의장이 타고 서울로 가는 비바를 향해 참모들이 인사하고 있다.
사실 혁명정부의 계획은 야심적이었고 당시로는 거대했다. 더구나 공업단지 건설은 공업화의 모든 기술을 집약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간단히 여길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의 피츠버그, 영국의 맨체스터, 독일 서부의 루르 같은 공업도시 건설이 주목을 받는 이유도 성장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기술력이 공업단지에 집약돼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박 의장이 훗날 대통령이 되어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을 위로하고 서부지역 주요 산업중심지를 돌아본 것도 계속되는 울산공업단지 건설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곳의 루르 계곡은 석유제품, 압연강철, 시멘트, 화학약품, 기계류, 농기구, 그리고 차량과 선박까지, 한국이 꿈꾸고 있는 산업들이 모두 뜨겁게 굴뚝을 달구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 울산공단 건설은 계획대로 불이 붙는다. 그러나 의욕만 가지고 될 일은 아니었다. 사실상 박 의장부터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다. 더구나 서울과 인천 같은 수도권이 아닌 울산을 예정지로 하고 있다는 김용태 고문의 보고에는 ‘너 미친놈 아니야?’라는 핀잔까지 들어야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박 의장과 김 고문은 장소 문제에서부터 자금 문제에 이르기까지 또 한바탕 격돌했다. 김용태 전 장관의 육성이다.

“그때만 해도 박 의장 이 어른의 집념이 농업만으로는 안 되니까 공업을 해가지고 빈곤을 없애겠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고 열의가 굉장히 높았어요. 그런데 뭐가 있나 말이여. 현실적으로 정부가 빈 항아리란 말이여. 그래가지고 내가 의견을 낸 것이, 경제인들 석방시킬 때 주장했던 대로 외자를 유치해야 한다는 것과 장소는 울산이 좋겠다고 보고를 했어.

그랬더니 대뜸 최고위원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느냐고 물어요. 김용태 미친놈 얘기에 빠져서 들러리가 돼서는 안 된다고 건의가 올라왔다는 거야. 그러시면서 ‘미친놈이 될지 애국자가 될지 결과는 국민이 평가할 테니 잠자코 있으라’고 눌러놨는데, 외자유치 문제는 나중에 듣고 울산은 왜 울산이냐고 그래요. 그래서 설명을 드리려니까 그 어른이 어느 땐 성격이 급해요. 잔소리 말고 당장 김해로 내려가라는 겁니다.”



>> 갑자기 왜 김해가 등장합니까?

“하하 그게 박 의장이여. 누구한테 보고를 받았는데 낙동강 700리 하류가 김해인데, 거기 모래 속에 철이, 사철이 숱하게 많다 이거지. 그것만 파내도 큰돈 들이지 않고 철을 얻을 수 있다니까 나보고 직접 현지답사를 하라는 겁니다. 하하하. 환장하겠어. 사철이라는 건 큰 강의 하류에는 다 있거든?

지남철을 모래 밑으로 끌고 가면 새카맣게 묻어 올라온단 말이여. 그렇다고 그걸 가지고 철을 어떻게 만듭니까. 그렇지만 확실한 증거가 나타나고 희망이 보인다 싶으면 막 밀어붙이는 게 그 어른의 장점이에요. 그런 장점이 있는데 거역할 수 없잖아요. 그래가지고 낙동강까지 일단 내려갔다가 올라와서 사철로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설명을 드리고 울산에 대해서 처음으로 자세하게 말씀을 드렸지요.”



>> 박 의장을 설득할 수 있는 근거 자료가 있었다는 말씀이군요.

“그게 사실은 남궁연씨가 일본의 기밀자료를 가지고 와서 눈이 확 뜨인 겁니다. 혁명을 했으니 우리 국민이 기대는 하고 있고, 우리가 공업입국을 하자면 아무리 연구를 해봐도 공업단지를 만들지 않고는 길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는데 그렇다면 장소부터 어디로 해야 하느냐, 이 문제로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외국에서도 보듯이 공단의 성공 여부는 입지 조건이 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말이여. 그럴 때인데 남궁연씨가 이거 한번 보라면서 가지고 온 거여. 보니까 2차 대전 말기에 동경이니 뭐니 일본 열도가 폭격을 당하니까 일본이 울산에 대단위 공업단지를 만들어 거대한 군수공장을 세우려고 온갖 조사를 다 했어요.

정말 기겁할 정도로. 수심에서부터 태화강 강물을 하루 얼마나 끌어댈 수 있다는 용수 문제까지 싹 조사를 하고 수송로도 구상을 해놨어. 눈이 확 뒤집어져요. 그래가지고 이게 진짜냐 뭐냐 해서 당시 김정렴 상공부 차관하고 안경모 부흥부 차관을 불러놓고 검토를 시켰더니 수심은 우리가 조사를 한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계획서 내용은 현실성이 높다는 거라. 당장 정보부장 JP한테 보고를 하니까 그런 보물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빨리 밀고 나가라고.”



>> 최고회의 경제고문실이 정보부 지시를 받았습니까?

“직제상으로는 최고회의에 소속돼 있지만 JP가 최고위원들이 전부 군인들이니까 민간인인 내가 활동하기에 어렵지 않겠느냐고 배려해서 사무실을 정보부 안에 만들어줬어. 내가 경제인들하고 막 만날 때는 필동 사무실을 쓰고. 그러니 JP한테 보고를 해야지. 그러고 그 당시는 실제적으로 정보부에서 거의 모든 걸 관장했잖아요.

물론 정부 정책으로 진행을 하게 되면 관련부처와 협의도 하고 직원들 차출도 받고 하지요. 그때 정래혁씨가 군복을 입고서 상공부 장관을 했어. 이것 좀 보라고 갖다 주니까 의외로 시큰둥해. 아까 박 의장이 얘기한 대로 최고위원들이 김용태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하면서 저항감을 보이고 있다는 걸 정래혁씨가 듣고 있었단 말이여.

그러면서 방해도 하지 않겠지만 나서서 지원하기도 어렵다고 그러네? 말은 열심히 해보라고 하면서 말이야. 확 박으려다가 그때 최고회의 상공위원이 박태준 회장(현 포스코 명예회장)인데 박 회장은 보여주니까 벌떡 일어나더니 박 의장한테 빨리 보고를 해서 재가 받고 밀어붙이라는 거야. 하여간 그렇게 자료가 좋았어요.”



>> 그 자료를 그대로 박 의장께 보여드린 겁니까?

“증거나 물증이 확실하면 누구보다 의욕이 강한 어른이니까 자신 있게 보여드렸지요. 솔직히 내가 더 흥분을 했으니까 말이여. 틀림없이 박 의장도 보통이 아닌 어른이니까 이런 게 어디 있었느냐고, 역시 미친놈이 아니구나 하실 거라는 확신도 있었고. 그런데 보시더니 밋밋하게 ‘직접 가봤어?’ 이러시네? 하이고…. 그렇다고 물러설 수 있어요?



섣달 그믐날 재계 주역들 대거 울산행


만약에 가보고 이 서류대로 여건이 양호하다면 각하께서 직접 가주시겠느냐고, 잠시 생각하시더니 가시겠데. 그래가지고 나는 이미 울산에 공업센터를 세워야겠다고 작심을 했기 때문에 기업을 해본 사람들이 봐야 더 정확할 거 아니여. 그때가 61년 12월 31일이야. 새해가 어디 있어. 경제인협회 회장 이병철, 부회장 이정림, 남궁연, 정재호, 조성철 이런 분들을 불렀어요.

연휴에 박 의장을 모시고 내려갈 테니 당신들이 먼저 내려가서 공장 입지 요건이 아주 적격지다, 공업용수는 태화강을 끌어대고, 단지를 조성하고, 항구 조건도 수심이 깊어 큰 배도 들어올 수 있고 좋다, 이런 걸 요새로 말하면 차트를 만들라고 했지요.”



>> 61년 마지막 날인데 그분들이 흔쾌히 응했습니까?

“열정도 대단했지만 그런 분들이 사실 우리나라 경제 재건의 주역들이여. 싫은 소리 한마디 없이 내려갔어요. 오히려 서류만 봤지 현장을 보지 못해 궁금했는데 잘됐다고, 박 의장이 정말 내려오신다면 그동안 기업했던 경험으로 충분하게 브리핑을 하겠다고 열의가 굉장했어요. 그땐 교통편도 좋지 않았지만 도로 사정도 엉망이었는데 말이지. 참 고마웠어요.

더구나 그날 눈이 굉장히 왔는데 당대의 거물들이 눈길을 헤치면서 간다는 걸 생각해봐요. 경제를 살리겠다는 진짜 애국심이 아니면 어려운 거지. 그래가지고 지체 없이 떠났는데 자정쯤 됐나? 천안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어. 그분들이 전부 경찰한테 잡힌 거야. 신문에 부정축재 거두들이라고 났었던 사람들인데 밤중에 야반도주를 하고 있어서 체포했다 이거야, 하하하.

그러니 뭐라고 해.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는 분들이니까 눈도 오고 시간도 늦었으니 그분들을 온양온천에 잘 모시라고 그랬지. 그때부터는 또 에스코트를 해가지고 온천으로 막 달리는 거라, 하하하. 결국 설도 못 쇠고 초하룻날 울산에 도착해서 현지답사를 다 하고 차트도 정말 잘 만들었어요.”

그러나 경제인들의 첫눈에 들어온 태화강변은 천지가 눈에 덮여 있고 아무리 둘러봐도 가물거리는 불빛 하나 없고 강아지 발자국 하나 없는 이곳에서 과연 공단이 되겠느냐는 심정이 앞서더라고 회고했다. 그러면서도 푹푹 빠지는 눈 속에 발을 담그며 샅샅이 살폈던 것은 공단이 들어서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현실 때문이었다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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