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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화대출 ‘키코 판박이’ 우려 확산

엔화대출 ‘키코 판박이’ 우려 확산

엔화대출 기업이 시름시름 앓고 있다. 엔고(高) 현상으로 대출원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데다 이자율(금리)까지 치솟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중고(苦)다. 문제는 은행이 엔화대출 상품을 판매하면서 엔고·금리인상 등 위험성을 구체적으로 고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의류 수출업체 A사는 내실 있는 중소기업이었다. 수출액만 해도 연 450만 달러를 훌쩍 넘었다. 영업이익은 10~15% 선을 꾸준히 유지했고, 미국·남미·호주·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수출처도 다양했다.

1999년 90만 달러를 투자해 만든 6000㎡ 규모의 베트남 생산공장 역시 술술 돌아갔다. 다른 중소기업과 마찬가지로 이 회사도 4억원 규모의 대출액(원화)이 있었다.

금리는 대략 6%대. 매월 200여만원의 이자를 내야 했지만 영업이익으로 갚을 수 있었다. 그래서 만기 연장 때 가슴앓이를 한 적도 없다. A사는 그야말로 우량고객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운명의 수레바퀴가 어디로 구를지 모른다는 말은 맞다. ‘태산을 집어삼키려는 듯’ 쾌속 질주하던 태산LCD가 ‘키코(KIKO) 태풍’에 휘말려 흑자 도산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A사도 어쩌면 그런 경우다. 이번엔 엔화 대환대출이 문제였다. 때는 2006년 5월. A사 대표에게 주거래 B은행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엔화대출로 갈아타면 상당한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솔깃한 내용의 전화였다.

‘금리는 원화대출의 20% 수준인 1~2%이고, 동일한 조건으로 10년 연장이 가능하다’는 달콤한 유혹까지 이어졌다. A사는 기존 4억원 대출에 1억3000만원 더해진 총 5억3000만원(6500만 엔)을 금리 1.3%에 대출(엔화) 받았다. 그래 봐야 이자는 월 66여만원. 대출액은 늘었지만 이자는 줄어든 셈이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A사의 사정은 그야말로 형편없다. 이 회사가 갚아야 할 원금은 10억원을 훌쩍 넘었다. 원화 대비 엔화가치가 급등했기 때문이다.



알짜 중소기업, 엔화대출로 위기

2006년 1월 100엔당 800원에 불과했던 엔화는 2월 12일 현재 1550원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엔화 환율은 외환위기 시절에도 1150원을 넘지 않았다. 엔화 대출자는 요즘 외환위기보다 어려운 ‘시련의 계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고통은 이뿐 아니다. 엔화가치만 떨어진 게 아니라 엔화대출 금리도 훌쩍 뛰었다.

2006년 1.3%에 불과했던 A사의 엔화대출 금리는 현재 7%에 육박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엔화가 안전자산으로 통하면서 엔화 조달비용이 높아진 까닭이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원금에 금리 상승까지…. A사로선 이중폭탄을 맞은 격이다. A사는 현재 폐업 수순을 밟고 있다. 2배 가까이 늘어난 원금은커녕 이자를 갚는 것도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A사 대표는 “곧 있으면 만기가 오는데,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다”며 “이번 주에 폐업신고를 할 예정”이라고 한탄했다. 비단 A사만 어려운 게 아니다. 엔화대출자모임(엔대모)에 따르면 엔화대출로 손해를 본 기업은 860여 곳에 이른다. 이 중 99.9%가 중소기업·자영업체다.

피해액은 적게 잡아도 200억 엔을 훌쩍 넘어설 것으로 이 모임은 잠정 집계하고 있다. 물론 이번 엔화대출 피해는 중소기업·자영업체의 ‘부족한 환 지식’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이 있다. ‘낮은 금리면 원화든 엔화든 무조건 OK’라며 위험성을 따지지 않은 게 문제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은행권이 엔화대출을 권유하면서 엔화가치의 하락, 금리인상 등 각종 위험고지에 소홀했다는 비판도 많다. ‘환 헤지 상품 키코 사태의 판박이’라는 이야기도 그래서 나온다. 우영헌 엔대모 총무는 “예를 들어 기준금리 격인 리보금리는 올라도, 가산금리는 불변이라는 식으로 엔화대출을 권유했다”며 “하지만 엔화대출의 피해는 리보금리가 아니라 가산금리가 치솟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산금리는 고정’이라는 등 싼 금리로 거짓 유혹한 은행의 책임이 크다는 주장이다. 리보금리는 쉽게 말해 금융기관이 외화자금을 들여올 때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이를테면 국제금융시장의 기준금리다. 이때 외화차입기관의 신용도에 따라 금리가 달라지는데 신용도가 낮을수록 더 높은 금리가 붙는다.

이를 가산금리라고 한다. ‘가산금리는 불변’이라는 말을 믿고 엔화대출로 갈아탄 자영업자 C씨의 사례를 보자. 2006년 1월 5일, C씨의 첫 리보금리는 0.2%, 가산금리는 1.1%였다. 하지만 2008년 중순 C씨에게 적용된 리보금리는 0.9%, 가산금리는 4.9%다. 은행의 약속과 달리, 가산금리가 무려 445% 상승한 셈이다.

C씨는 “은행 담당자에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고 가산금리를 올리느냐고 따졌더니 조달금리가 높아져서 어쩔 수 없다는 변명만 돌아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3월초 손해배상소송 제기 방침

김인석 키움증권 부장은 “기업에 리보금리, 가산금리가 어떻게 변동하는지에 대해 꼼꼼히 설명하는 것은 은행의 책무”라며 “이를 대출자에게 설명 또는 고지하지 않았다면 큰 문제”라고 꼬집었다. 박종휘 한나라당 의원도 “은행들이 엔화대출의 가산금리를 (약속과 달리) 차등화하는 것은 은행의 리스크를 고객에게 전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홍강호 전국은행연합회 여신제도부 부장은 “리보금리와 가산금리는 함께 돌아가는 게 원칙이기 때문에 가산금리를 고정으로 했다는 엔대모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고 강조했다. 엔화대출 피해 기업의 요구사항은 어쩌면 간단하다. 치솟은 가산금리를 약속대로 낮춰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은행은 아직 요지부동이다. 금리를 낮추면 손해가 막심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엔화대출 잔액이 1조4500억 엔(23조1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잠정집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엔화대출금리를 1%포인트만 낮춰도 2300여억원의 손해가 발생한다. 엔화대출 피해 기업은 이르면 2월 말, 늦어도 3월 초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할 방침이다.

최재일 엔대모 위원은 “2월 중순 법무법인과 공식계약을 체결할 예정”이라며 “손해배상청구 계획은 일정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변수는 물론 있다. 정부가 뾰족한 대책을 발표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엔화대출 피해 기업들은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다.

우영헌 총무는 “한국은행·금융감독원·금융위원회에 수차례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늘 ‘다른 데 가서 알아보라’는 것뿐이었다”며 “현재로선 해결책이 나올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고 잘라 말했다. 엔화대출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이제는 정부 당국이 직접 나서서 합리적 해결책을 마련해야 할 때다.

꺾기로 지점장·담당자 실적 챙겨
엔화대출에 숨어 있는 불공정 거래
금융기관이 엔화대출 상품을 판매하면서 불공정 거래가 있었다는 의혹도 적지 않다. 대표적 사례가 ‘꺾기’다. ‘엔화대출을 하면 저리로 해줄 테니, (적금 등) 또 다른 상품에 가입하라’고 종용했다는 것이다. 중소기업의 ‘돈줄’을 빌미로 실적 쌓기를 꾀했다는 얘기다.

엔대모가 준비하고 있는 소송자료에 포함된 자영업자 D씨의 꺾기 통장(정기적금) 두 개를 보자. 겉으론 똑같아 보인다. 거래 개시일(2007년 6월 21일), 종료일(2008년 9월 1일)이 같다. 납입금액도 월 50만원으로 똑같다. 하지만 통장 뒷번호가 ×××-××-001518과 ×××-××-001525로 각각 다르다. 엔화대출을 권유하면서 ‘꺾기’를 통해 적금가입을 유도한 것인데, 한 개는 지점장용, 다른 한 개는 담당 직원용이다.

실적을 올리기 위해 두 개의 적금통장을 만든 것이다. D씨는 “왜 두 개를 만드느냐고 따졌더니, ‘우리도 먹고살아야지’라며 농을 던졌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출이 생명줄과 같은 중소기업, 자영업체에 돈을 빌려주는 은행의 입김은 막강하다. 미운 털 박혔다간 자칫 자금줄이 꽉 막혀버릴 수 있다. 중소기업, 자영업체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꺾기’에 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용어설명
리보금리란? 영국 런던에서 우량은행들이 단기자금을 거래할 때 적용하는 금리를 말한다. 국제금융시장의 기준금리로 통한다. 가산금리란? 금융기관이 외화자금을 들여올 때, 차입기관의 신용도에 따라 금리가 달라진다.

신용도가 낮을수록 더 높은 금리가 붙는데, 이를 가산금리(spread)라고 한다. 가산금리가 높게 적용되는 것은 은행의 대외신인도가 그만큼 낮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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