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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ay My Life ] “40년 최씨고집 백년 후에도 지켜질 것”

[My Way My Life ] “40년 최씨고집 백년 후에도 지켜질 것”


광동제약은 한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한방생약과 양약이 조화를 이룬 독특한 의약품 포트폴리오를 가진 회사다. 최수부(73) 회장은 1963년 회사 설립 후 ‘한방의 과학화’를 기업 이념으로 삼았다.

그 후 최 회장은 한방생약의 과학적 연구와 신약개발에 정열적으로 매달렸고 최근에는 광동한방병원을 주축으로 한 한방의료업에도 뛰어들었다. 광동제약은 일반의약품인 우황청심원, 쌍화탕 등에 주력하다 2004년 비만치료제 아디펙스 정을 출시하면서 전문의약품 시장에도 발을 내디뎠다.

비만치료제 ‘마자놀정’, 인태반주사제 ‘뷰라센주’, 시부트라민제제 ‘시부펙스캡슐’ 등 웰빙의약품 분야를 중심으로 제품의 라인업을 확대하고 있다.

대중에게 광동제약이란 브랜드를 강하게 각인시킨 것은 단연 ‘비타500’이다. 2001년 출시 첫해 53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더니 지금까지 누적 판매가 무려 25억 병에 달했다.

지난해 ‘노바디’ 열풍을 불러왔던 ‘원더걸스’를 올해도 비타500의 광고모델로 연장 계약하고, 새로운 TV CF인 ‘러브보디(Love-Body)’편을 제작하고 있다. 비타500과 함께 옥수수수염차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맛의 승리일까, 마케팅전략이 주효했을까? 동아제약 박카스의 아성을 넘보는 비타500의 위대한 약진에 대해 먼저 물었다.

최 회장은 하루 3병씩 비타500을 마시는 것이 자신의 건강비결 중 하나라고 말했다. “성공비결은 그 산뜻하고 건강한 맛에 있다고 봐요. 맛의 승리라고 봅니다. 그 다음이 마케팅이죠.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원더걸스를 광고모델로 쓴 것도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고리타분한 보수 이미지를 과감하게 벗어 던진 거죠. 우린 비타500을 출시하면서 수퍼마켓, 편의점, 할인점 등으로 유통망을 다변화했습니다. 이게 또 적중했습니다. 3박자가 맞아 만든 성과라고 볼 수 있지요.”

지난해 광동제약이 이룬 매출은 2750억원. 올해 매출 목표는 3010억원으로 세웠다. 건실한 성장세를 이어가겠다는 복안인데 연구개발(R&D) 등에도 200억원 이상을 투자할 계획이다. 식품 부문에서 옥수수수염차를 전략 품목화하고, 비타500을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스테디셀러 음료로 만들기 위한 마케팅 전략도 다시 짤 생각이다.

의약품 부문의 판매 성장을 위한 고객관리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경영목표다. 불황의 그림자는 모든 사회 구석구석에 드리워지고 있고 광동제약과 최 회장 역시 그 음습하고 불길한 도전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당시에 맞은 항체주사로 강한 면역력을 키운 것이 광동제약의 자랑이요 자산이다.

“불황일 때 고객관리를 더 철저히 해야 합니다. 그게 제 지론이에요. 경영자가 돈과 건강을 잃었다면 그것은 조금 잃은 겁니다. 신용을 잃는 게 치명적이죠. IMF 한파가 일었을 때 부도위기에 몰린 적이 있습니다. 1998년 전 직원이 그해 상여금을 전액 반납하고 회사 구하기에 나섰지요. 저도 제가 보유했던 주식 10만 주를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양도했어요. 금액으로도 적지 않고, 저의 주식 소유 비율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직원들도 바로 화답하더군요. ‘30분 일찍 출근하고 30분 늦게 퇴근하기’ ‘연장 수당 반납’ 등의 캠페인을 하면서 생산성 향상과 재무구조 개선에 큰 도움을 줬거든요. 그래서 2000년엔 직원들이 2년간 반납했던 상여금을 모두 돌려줬습니다. 회사와 직원 간에 강한 신뢰감이 구축돼 있고, 이것이 불황을 이기는 가장 큰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최 회장은 일본 기타큐슈의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고향은 경북 금릉군(지금은 김천시에 편입)이었는데, 3대 독자였던 그는 1910년 혈혈단신 일본에 정착했다. 최 회장의 부친은 사업적 수완이 상당했다. 일본인과 동업으로 알루미늄 볼트와 너트 등 철제품을 만드는 공장을 운영했는데 태평양전쟁 시기 이 공장이 전쟁특수로 큰 호황을 맞았던 모양이다.


최수부 회장은 한방과 양방을 결합한 독특한 제품 포트폴리오로 최고의 제약그룹을 육성했다.

최 회장 부모는 지독한 성실함을 바탕으로 50명이 넘는 일본인 종업원을 거느리는 큰 회사를 키웠다. 당시 상황을 감안할 때 식민지에서 건너온 가난한 조선인이 일본 땅에서 이 정도 성공을 거두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게다.

부친은 공장 마당에 떨어진 쇳조각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고, 공장의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가족 같은 사랑을 베풀었다. “일본이 패망한 후 아버지는 지체 없이 고국행을 결심했습니다.

그건 일종의 모험이었습니다. 경제적 기반이 전무했던 때라 귀국을 말리는 일본인이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는 일본에서 일하면서 당신의 아버지 장례식 때도 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불효한 것을 늘 가슴에 묻어뒀다가 해방이 되자 바로 귀국선을 탔습니다. 일본에서 상당한 돈을 가지고 외가가 있는 경북 달성군 화원면에 정착했어요.

동네에서 제일 큰 집을 사서 살면서 아버지는 이것저것 사업구상을 하셨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큰돈을 노린 사기꾼들에게 재산을 모두 날리셨다고 해요. 제 나이가 열두 살 때였는데, 아버지는 폐인처럼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으셨고, 저는 그때부터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스토리는 그러나 당대 한국인 수난사의 전형적인 모습 중 하나일 게다. 식민지 시절 대다수 조선인의 삶은 피폐와 곤궁을 면치 못했다. 간혹 성공한 사람들이 나오긴 해도, 그들 주변엔 공들여 쌓은 성공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지뢰밭이 곳곳에 도사렸다. 최수부 일가의 운명도 그랬다.

“우리 동네는 낙동강을 끼고 있어 그 강변으로 길게 참외밭이 늘어서 있었지요. 어머니는 참외장수로 나섰고 저는 지게로 나무를 해서 땔감으로 파는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벽같이 지게를 지고 깊은 산을 오르내리는 일은 열두 살 소년에게 너무도 힘겨운 일이었죠. 빈 지게를 지고 산에 오르는 일이야 그렇다 쳐도 한나절 나무를 베고 그 나무를 진 채 산을 내려오는 일은 굉장히 힘든 중노동이었어요. 내 몸무게의 갑절이 나가는 나무를 지고 내려오다 산비탈에서 구른 적도 한두 번이었겠어요? 상처에서 피가 나도 개울에서 씻고 식구들에겐 절대 보이지 않았죠. 열두 살부터 지게를 지니까 체력단련에는 보탬이 됐어요. 그보다 더 좋은 육체 수련법은 없었지요. 사물엔 늘 양면성이 있어 선악도 공존한 듯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 처해도 일희일비할 것 없어요. 그것이 내 열두 살 지게꾼 소년 시절에 얻은 인생의 교훈이라면 교훈이지요.”

가장이 되었다는 것은 식솔의 끼니를 책임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연히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웠다. 일본에서 소학교 2년, 한국에서 2년이 최 회장 학력의 전부다. 광동제약을 운영하면서 그는 고려대와 서울대, 그리고 연세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누가 뭐래도 자신의 진정한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4년 중퇴’라고 말한다.

“요즘 속된 말로 저는 가방끈이 짧아요. 짧다기보다 끈이 없다고 하는 편이 정확한 표현이겠죠. 그러나 그 어린 시절에도 그랬고, 나중에 사회에 나와서도 그랬지만 나는 낮은 학벌 때문에 먹고살기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우선 저는 제가 가진 학벌로도 가능한 일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천직이라 여겼고,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거기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랬더니 누구도 내 짧은 가방끈에 대해 따지는 사람이 없었고, 내 자신도 배우지 못한 지난 일을 후회하거나 하소연할 일이 없었습니다.”

최 회장은 나무꾼 생활 2년 만에 소중한 생산수단을 하나 마련했다. 중고 자전거가 생긴 것이다. 자전거는 자유로운 이동을 가능케 했고, 무거운 짐으로부터의 해방이었으며, 그에게 직업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는 재량과 융통성을 부여했다.

“제가 자전거를 살 무렵 아버님도 실의와 절망에서 회복하셨습니다. 집안에 다시 활기가 넘쳤죠. 지게 대신 마당에 자전거가 떡 하니 서 있는데 더 이상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습디다. 우선 마을에서 많이 나오는 참외와 파 같은 작물을 떼어다 대구의 큰 시장에 나가 팔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고단해도 물건을 다 팔고 적당한 이문까지 남기고 돌아오는 길은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게 아니라 구름을 밟고 걷는 기분이었어요.”

시장을 오가는 데 익숙해지고 흥정에 이력이 붙기 시작하면서 취급하는 상품도 다양해졌다. 이문이 많이 남는 상품을 찾기 위해 쉴 새 없이 고민하고 돌아다녔다. 엿을 고아 시골 장터나 학교 운동회에 내다 팔고, 싼값에 연초를 사서 담배를 말아 팔기도 하고, 기계를 장만해 찐빵장사도 해보았다.

한번은 영덕게를 쪄서 내다 팔고 새벽 수산시장에 나가 해삼을 떼어 소매를 하기도 했다. 청과물에서 수산물에 이르기까지 먹고살 만한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다 해본 시절이었다.

“1960년 봄 군대에서 제대한 후 내 제약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는 아버지와 형을 제외한 나머지 식구들이 모두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했던 시절이죠. 막상 서울 변두리 한남동 월세방에 오밀조밀 모여 있는 대가족을 만났을 때,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더군요. 그때 제가 처음 시작한 일이 제약회사 외판원이었습니다. 종로 청진동에 있었던 작은 제약회사였는데 그때 취급했던 약이 바로 경옥고였습니다.”

경옥고는 예로부터 궁중에서 애용되었던 아주 귀한 보약이다. 생지황, 인삼, 백봉령, 꿀 등을 3일간 중탕으로 달여 만든다. 1회 음복량을 만드는 데 많은 분량의 약재가 들어가고 그 제조 과정도 까다롭고 복잡하다. 당시 경옥고의 가격은 2만원. 웬만한 샐러리맨 한 달 봉급에 육박하는 금액으로 요즘 가치로 치면 100만원이 훨씬 넘는 고가의 보약이었다.

“열흘 동안 10통의 경옥고를 팔아 3만원의 수당을 받았습니다. 수백 군데 허탕을 친 후 첫 고객은 당시 을지로 입구의 양복점 ‘미양사’의 사장이었습니다. 부인 것까지 2개를 팔아주더군요. 수당을 받아 옷부터 새로 빼입었죠. 군용 점퍼를 입고는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니까요. 나중에 미양사에서 양복을 한 벌 맞춰 입고 나서는 정말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그 후 미양사 사장과는 수십 년 단골이 됐어요. 제가 사람을 소개해 맞추게 한 양복이 수백 벌은 족히 될 겁니다.”

최 회장의 영업전략은 평범했다. 우선 끈기와 집념이다. 영업을 하러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고 나온 사무실이나 상점이라도 그 길로 바로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날이나 그 다음날 반드시 다시 들르는 전략이다. 사실 전략이랄 것까지도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끈질기게 열 번, 스무 번 자꾸 들른다는 것 자체가 아니다.

갈 때마다 진심이 담긴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 것, 비록 약을 사주지 않아도 결코 원망하지 않는 마음자세다. 언젠가는 그 사람도 내 고객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 그는 이런 자세를 이어갔다.

“지금 생각해봐도 제겐 배짱이 있었어요. 영업은 무조건 굽실거려서는 안 되는 겁니다. ‘나는 좋은 약으로 당신들의 건강을 지켜주는 파수꾼이다’라는 자기암시를 계속했습니다. 재무부 이재국장을 찾아가 경옥고 한 제 16개짜리를 판 적도 있었습니다. 전날 모욕을 당하고도 굴하지 않고 또 찾아가 만들어낸 결과였죠. 애프터 서비스도 철저했지요. 일단 경옥고를 사준 고객을 찾아가 복용 방법은 잘 지키는지, 효과를 보고 있는지를 점검했습니다. 효과가 별로 없다고 하면 다시 한 번 복용 시기와 복용량을 알려주고 약의 보관상태까지 확인했습니다. 직접 약 항아리를 열어보고 남은 양이 이전에 비해 별 차이가 없으면 시어머니처럼 잔소리를 하기도 했지요. 자꾸 이러면 약값 돌려주고 약 다시 가져간다고 엄포를 놓았거든요.”

최 회장이 그런 잔소리를 했던 것은 약을 빨리 먹게 해서 다시 새로운 약을 팔려는 수작이 아니었다. 경옥고가 좋은 약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약을 파는 일보다 그 약을 제대로 먹게 해서 제대로 효과를 보게 하는 일이 더욱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입사 첫해부터 3년 동안 판매왕 자리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월급날 저는 질시의 대상이 됐어요. 수십 명의 수당을 합친 월급을 받았으니까요. 웬만한 대리점 전체 영업수당에 육박했습니다. 영업사원으로 취직한 지 몇 달 만에 저는 15만원이 넘는 월급을 받았는데 지금으로 치면 월 1000만원 넘게 받는 고소득자가 된 셈이었죠. 포기하지 않는 끈기, 당당한 자세와 배짱, 성실한 고객관리… 이런 것이 내가 영업사원 시절 얻었던 소중한 교훈입니다. 나는 죽는 날까지 기꺼이 영업사원이고 싶습니다. 영업은 모든 비즈니스의 근본 바탕이니까요.”

최 회장은 스물여섯 나던 해 경상도 고령의 처녀 박일희 여사와 결혼했다. 장가 들기 전날까지 하루 종일 서울시내를 돌아다니며 영업을 했다. 야간 완행열차에 지친 몸을 싣고 대구역에 도착한 시각이 결혼식 당일 새벽 4시였다.

“결혼식을 올리고 저는 1년에 100만원짜리 적금을 들었습니다. 창업자금 300만원을 모으기 위해서였지요. 마침내 용산구 동빙고동에 살림집 겸 공장을 지었습니다. 창업은 경옥고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추진했던 것이었고요. 경옥고를 달일 수 있는 가마를 설치하고 포장실로 쓸 수 있는 공간과 비품을 마련했죠. 한 달에 200개 정도 경옥고를 팔았는데 그중 절반은 제가 팔았습니다.”

그는 29세의 나이에 제약회사 사장이 됐다. 정직과 신용을 회사의 모토로 삼았다. 우선 약재를 고르는 데서부터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한약재는 어차피 가마 속에서 중탕이 되므로 질이 떨어지는 약재를 써도 소비자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최 회장은 약재 고르는 일만큼은 반드시 자신이 직접 챙겼다.

“백복령, 인삼은 비싼 약재이기 때문에 양을 조금만 줄여도 전체 비용이 상당히 절감됩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짓은 죽어도 못하겠더군요. 제분소에서는 아무리 오줌이 마려워도 단 1분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어요. 경옥고는 꼬박 72시간 중탕을 해야 합니다. 가마솥 옆에는 꼭 제 간이침대가 있었어요. 거기에 누워 경옥고가 익어가는 소리를 들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습디다.”

광동제약은 1970년대를 맞으면서 도약하기 시작했다. 1972년 장질환에 쓰는 ‘쾌장환’과 부인병 치료약 ‘비너스환’을 개발했다. 그해 좁아터진 동빙고동 공장 시대를 마감하고 대지 800평의 시흥동으로 공장을 지어 이전했다. 1973년 12월에는 ‘거북표 원방 우황청심원’ 제조 허가를 취득했다.

“우황청심원 효능을 결정 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원료의 질입니다. 사향과 우황이 워낙 구하기 힘든 재료이다 보니 엉터리 약재가 횡행합니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저는 원료를 제 손으로 직접 고릅니다. 우황청심원을 만들고부터 그 원칙은 더 강해졌어요. 그래서 40년 최씨 고집이라는 말도 생긴 것이고요. 우리가 만드는 광동탕(쌍화탕)도 가격 인하 압력에 굴하지 않았어요. 가격을 인하해 타사와 경쟁하는 것은 질이 떨어지는 재료를 쓰자는 것과 같습니다. 전 그런 일은 못한다고 버텼습니다. 다행히 고객들이 먼저 알아주고 호응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우황청심원을 복용하는 미국인, 쌍화탕을 마시는 러시아인이 나올 겁니다. 우리 한방을 세계화하는 일이지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그 길을 묵묵히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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